현대170. <복종>, 미셸 우엘벡, 문학동네 (2015)

지난 5월 스위스를 여행했다. 취리히로 들어가 루체른, 인터라켄, 몽트뢰 등을 거쳐 제네바로 나오는 여행이었다. 마지막 여행지인 제네바에서 조금 충격적인 모습을 보았다. 제네바 중앙역인 코르나방역에서 도보로 10분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숙소에서 묵었는데, 중동-아프리카계 사람들에게 점령된 듯한 거리였다. 중동 음식점들, 누추한 차림의 중동인이나 흑인들.... 거리도 지저분했다. 바로 길 하나 건너 있는 다른 거리는 안 그랬다. 유독 그 거리만 슬럼화되어가는 듯했다. 취리히나 루체른, 인터라켄 등 독일계 도시나, 몽트뢰 같은 휴양도시에서는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문득 종종 인종폭동이 일어나는 프랑스 대도시 얘기들이 생각났다. 프랑스와 지리적-역사적으로 가까운 도시이다 보니 그런 현상도 유입되는가 싶었다.

어쩌면 프랑스의 그런 현상은 과거 식민제국의 업보인 듯 했다. 영국도 파키스탄 출신 영국 국적 테러스리스트들의 테러로 종종 홍역을 치르듯이 말이다.

2015년 프랑스 역사는 이슬람테러로 얼룩진 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1월7일에는 이슬람 예언자 모하메트를 풍자하는 만화를 그렸던 프랑스 잡지 <샤를리 에브도>가 테러리스트들의 습격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샤를리 에브도>편집장을 비롯해 12명이 사망했다.11월3일에는 파리 도처에서 총격사건이 발생, 130명이 목숨을 잃었다.

<샤를로 에브도>사건이 있던 1월 7일, ‘문제적 작가’ 미셸 우엘벡의 신간 소설이 발간됐다. 소설의 제목은 <복종>! 2022년 프랑스에 이슬람정권이 들어선다는 디스토피아 소설이었다. <샤를리 에브도>사건과 맞물리면서 이 소설은 논란의 중심에 놓였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이슬람포비아(이슬람공포증)’를 조장하는 책이라고 비난했다.

이 소설의 화자는 파리제3대학에서 19세기 프랑스문학을 가르치는 40대 중반의 교수다. 젊은 시절 상당한 수준의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지만, 이후 그의 삶은 무료하다. 젊은 시절의 업적을 소비하면서 학기마다 여자(그 여자들 중에는 제자들도 여럿 있다)를 갈아치우면서 사는 권태로운 삶...소설의 앞부분은 그의 삶만큼이나 심심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삶은 바뀐다. 2022년 프랑스 대선! 이 선거에서 전통적인 양대정당이었던 대중운동당(우파 드골주의당)과 사회당(좌파)가 몰락하고, 극우파 국민전선과 이슬람박애당이 1,2위로 약진한다. 파시스트세력의 집권이 눈앞에 왔다고 생각한 사회당, 대중운동당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이슬람박애당 후보 모하메드 벤 아베스를 지지한다.

그 결과 프랑스 최초로 무슬림 대통령이 등장한다. 아베스 정권은 이슬람 교육, 일부다처제 등 이슬람화 정책을 착착 펼쳐나간다. 여성들이 가정으로 복귀를 강요당하면서 실업률은 낮아지고, 아프리카계들의 폭동은 줄어든다. 오일머니가 유입되면서 부동산값이 올라가고 경기도 좋아진다. 모로코, 튀니지, 이집트 등 북아프리카 국가들이 EU에 가입하고, 이슬람 프랑스는 새로이 외교의 중심이 된다.

유서 깊은 소르본대학은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자본의 손에 넘어간다. 이슬람교로의 개종을 거부한 학자들은 학교를 그만둔다. 하지만 적지 않은 교수들은 정권과 대학당국이 제공하는 당근(엄청난 액수의 월급이나 일부다처제 아래서 합법적으로 가질 수 있는 젊고 예쁜 아내들)에 차례로 넘어간다. ‘파리-소르본 이슬람대학’에서 해직됐던 주인공도 결국은 그 유혹에 굴복한다. 그러는 사이에 시민들의 자유는 서서히 사라져간다.여자들이 예쁜 옷을 입을 자유, 교육의 자유, 학문의 자유 등등...

얼핏 황당해 보이는 설정이지만, 내용은 탄탄하다. 소설 속에서 나오는 여러 정치적 사건들과 비슷한 사건은 이미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소설 속에서 대선 전 프랑스 도처에서는 내전을 방불케 하는 총격전과 폭동이 벌어진다. 실제로 지난 11월 파리 테러 사건으로 130명이 죽었다. 북아프리카계 청소년들에 의한 폭동도 다반사로 일어났다. 프랑스 일부 대도시에서 무슬림 거주지역들은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그들만의 해방구가 되고 있다.

극우 국민전선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좌우파가 특정 후보를 ‘묻지 마’지지하는 현상은 2002년 대선 때에도 있었다. 당시 국민전선 당수 장 마리 르펜이 대통령이 되는 걸 막기 위해 드골파, 중도우파, 사회당, 공산당 할 것 없이 프랑스의 모든 정파는 드골파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을 지지했었다. 프랑스나 영국에서는 이미 무슬림 각료가 탄생했다. 앞으로 무슬림 수상이 탄생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는 얘기다.

‘설사 그렇다 해도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람? 그건 프랑스나 영국인들의 고민이다’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았다. 아, 그렇다고 오해는 말기를! 나는 ‘이슬람의 한국정복계획’ 같은 걸 믿는 건 아니니까....

나에게는 이 소설이 한 체제의 ‘정체성(正體性)’에 대한 고민으로 읽혔다. 자기 체제의 정당성, 정체성을 지키는데 실패한 체제와, 기성의 체제가 무너지고 전혀 다른 정체성에 기초한 체제가 들어서는 과정에 대중과 지식인들이 보여주는 비겁함에 대한 우화(寓話)라고 할까...

그런 경험은 우리에게도 생소하지 않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누가 뭐라고 하든, 그 이전의 정권과는 색깔을 달리하는 정권이었다. 스스로는 ‘진보정권’이라고 했지만, 그들은 ‘좌파정권’이었다. 그 시기에 일어났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많은 일들이 이 소설 속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우선 소설 속의 프랑스 정치상황(실제의 정치상황이기도 하다)은 대중운동당(우파 드골주의정당)과 사회당이라는 익숙한,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런 비전도 보여주지 못하는 양대 낡은 정치세력에 대한 환멸과 관련이 있다. 벌써 극우 국민전선은 그 구도에 균열을 내면서 유력한 대안정당으로 성장해 왔다. 며칠 전 스페인 총선에서도 우파 국민당과 좌파 사회민주당의 양당 구조가 깨지면서 좌파 포데모스와 우파 시우다다노스라는 신생 정당들이 돌풍을 일으켰다. 프랑스처럼 이슬람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나라에서 수년 내에 이슬람정당 하나가 더해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상황은 우리나라와도 무관하지 않다. 새누리당과 새민련이라는 양당 독점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피로감은 극에 달했다. 이미 정치적 능력이 어느 정도 드러난 안철수씨의 신당에 대해 국민들이 일부나마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안철수씨는 아니더라도 나름의 비전과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고, 대중 앞에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능력을 가진 이단아가 민주적 선거제도를 이용해 한국정치를 갈아엎을 가능성은 상존해 있다. 아니, 10년 전 우리는 그런 경험을 해 보지 않았던가?

이슬람박애당의 대통령 후보 모하메드 벤 아베스는 “선거의 승부는 경제 영역보다는 가치관 영역에서 판가름됨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가진 것은 권력욕 뿐인 중도 우파 출신의 원로 정치인 프랑수아 바이루를 총리로 끌어들인다. 그를 상대로 하는 ‘이념전쟁’의 각을 세우기 어렵게 만든 것이다.

마치 평생 이념적 의구심을 안고 살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보수정치인 김종필씨를 끌어들여 DJP연합을 해 정권을 잡은 것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집권 초기에 노련한 관료 고건씨를 총리로 기용해 국민들을 안심시켰던 것을 연상케 한다.

소설 속의 이슬람박애당은 앞서 잠시 존재했던 이슬람 급진주의 정당들과는 달리 온건하고 합리적인 이미지로 대중들 사이로 파고든다. “팔레스타인을 지지할 때도 온건한 태도를 취했으며, 유대교 지도층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엄밀한 의미에서의 정치활동이 청년운동, 문화센터, 자선단체와 촘촘한 조직망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일부 좌파세력이 온건하고 중도성향의 ‘시민단체’를 자처하고, 소외계층에게 다가가는 유사 복지단체의 모습으로, 혹은 백화점이나 언론사의 문화강좌를 통해 우리 사회의 ‘시민권’을 획득한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 덕분(?)에 이제 ‘공산주의자’들은 더 이상 ‘뿔 달린 괴물’이 아니라, ‘쿨하고 깨어 있는 시민’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특히 연예인이나 지식인들은 뭔가 ‘진보적’인 멘트를 날려버릇해야 ‘개념 있어’ 보인다.

소설 속 이슬람박애당의 핵심 아젠다는 교육이다. 이들을 관찰해 온 DGSI(대내종합안보국) 요원은 이렇게 말한다.

“경제니 지정학이니 하는 것들은 신기루일 뿐이에요. 아이들을 장악하는 자가 미래를 장악한다. 그것으로 얘기 끝이죠. 그러니 유일하게 중요한 부분, 그들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기들의 주장을 관철하려 하는 유일한 부분이 바로 아이들 교육입니다.”우리에게도 익숙한 모습이다. 당장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을 보라. 대통령이 국정화를 들고 나오자 야당과 전교조, 좌파시민단체들이 총궐기하고 있다. 이는 지금 자기들이 강고하게 장악하고 있는 아이들에 대한 역사교육 기득권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의의 표명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게 섬뜩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러한 지각변동 속에서 언론과 지식인들이 보여주는 나태함, 무능함, 비겁함이다.

대선을 앞두고 극단주의세력에 의한 테러가 계속되고, 위험은 다가오지만, 언론은 침묵한다. 언론은 오히려 증대하는 이슬람세력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 사람들을 나무란다. 그들이 극우세력의 대두를 촉진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그리고 위험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언론은 일제히 침묵한다.

이 또한 익숙한 풍경이다. ‘좌익’을 ‘진보’라고 불러주고, 특정 유력 정치인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우리 언론들의 모습이 여기서 얼마나 다른가?

소설 속 언론은 오히려 대선 1차 투표 후 기존 양당체제가 무너지면서 지각변동의 기미가 보이자, 이를 여러 정당들간의 합종연횡의 가능성 등에 대해 흥미 위주의 보도를 해 댄다. 거기에서 ‘체제’에 대한 애정이나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아베스는 후보 시절 ‘분배주의’라는 생소한 경제철학을 들고 나오지만, “자기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정보는 무시해버리는 습성이 있는” 기자들은 아무도 이에 주목하지 않는다. 아베스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다시 ‘분배주의’를 들고 나오자, 기자들은 허둥대다가 그제서야 그게 20세기 초 영국에서 나왔던 경제철학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노무현 정권 시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의 경제참모였던 이정우 대구대 교수는 19세기 미국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의 토지소유개념을 추종하는 ‘조지이스트’였다. 그 사실이 그를 ‘사회주의자’로 속단했던 사람들을 얼마나 당혹스럽게 했던지....

두 가지 경우 모두 기자들은 새로운 집권세력의 실체를 제대로 알리는 데 실패한 셈이다. 게을러서건, 무지해서건 간에 말이다.

하지만 새로운 체제 속에서 지식인들은 하나 둘 현실에 순치되어 간다. 처음에는 별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시한 지식인들이 먼저 투항한다. 학문의 세계 속에서만 살아온 고매한 학자분이나, 주인공처럼 나름 실력 있는 지식인들이 그 뒤를 잇는다. 그들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액의 급여, 학자로서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여자가 주어진다.

이것도 낯선 풍경은 아니다. 분명히 보수적인 것으로 알려졌던 지식인, 언론인, 관료들이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들어서자 자신의 평생을 부인한 대가로 한 자리씩 꿰차던 모습이 떠오른다.

조지 오웰의 <1984>는 1948년에 쓴 책이었다. 다른 디스토피아 소설들도 멀면 여러 세기 이후, 가까워야 한 두 세대 이후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불과 7년 후의 프랑스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 소설 속 장면들은 이미 지금의 프랑스나 유럽, 혹은 한국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이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대선을 앞둔 혼란의 와중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미 정립된 사회시스템 속에서 번영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시스템에서 아무것 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별다른 두려움 없이 그것을 파괴하려 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생각하기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바로 그런 태도가 자신들이 살아온 기독교적 세계를 사취(詐取)당하고 이슬람에게 ‘복종’해야 하는 디스토피아를 만들었다. ‘복종’을 받아들인 주인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후회할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라고...그게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하지만 자신이 살아온 삶, 그 삶을 가능하게 한 가치관과 체제를 포기한 자에게 기다리고 있는 삶이 정말 “후회할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삶일까?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내가 살아온 조국을 그렇게 잃고 싶지는 않다. 이미 정립된 사회시스템 속에서 번영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깨어 있어야 한다. 이 시스템에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별다른 두려움 없이 그것을 파괴하려 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그들을 경계하고, 그들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를 발해야 한다. 자신의 삶과 자유와 번영을 유지하고 싶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