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과 일본군의 혈투가 3주나 이어졌고, 야마자키 부대장이 이끄는 일본군 2000명 전원이 한 병사도 남김없이 전사.
미국 알래스카와 일본 홋카이도 사이에 알류샨 열도가 있고, 그 서쪽 끝에 아투라는 섬이 있습니다. 일본군은 미국과의 전쟁이 터지자 이 섬을 점령하고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1943년 5월 11일 미군은 이 섬을 총공격하여 탈환하였는데 미군과 일본군의 혈투가 벌어져 3주나 이어졌고, 야마자키 부대장이 이끄는 일본군 2천명 전원이 한 병사도 남김없이 전사하여 여기서 ‘옥쇄’라는 말이 처음 쓰인 것이라고 합니다.

‘옥쇄’라는 낱말은 사람이 죽을 때 기왓장처럼 너절하게 부서지지 않고 구슬이 바위에 떨어질 때 산산조각이 나듯 깨끗하고 멋있게 죽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으로 풀이가 됩니다. 사내대장부가 비록 전쟁에서 패배한다 하여도 포로가 되어 모욕을 당하거나 비겁한 모습으로 죽지 않고 당당하게 최후를 맞이하라는 일종의 ‘사무라이’(武士) 정신의 발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가면서 일본의 패전이 점점 불가피하게 되자 사이판, 괌 등 태평양 섬들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 그의 가족들은(그리고 억울하게도 ‘옥쇄’를 강요당한 한국인 노무자들도) 다 함께 목숨을 바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경 미술학교 출신의 후지다 쯔구하루(1886-1968)는 종군 화가로 전쟁 중에 맹활약을 했는데 그는 <아투섬의 옥쇄>라는 대작을 남기고 프랑스에 귀화하여 전쟁 뒤에는 일본 화단에서는 별로 활약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작품에는 미군과 일본군의 시체들이 뒤엉켜 있고, ‘돌격’을 지휘하는 야마자키 부대장의 표정에는 분노 대신에 슬픔이 가득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은 ‘필요악(惡)’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이나 국제연합(United Nations)이 창설되었지만, 전쟁은 막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으니 진정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본이 시작한 전쟁들(중일전쟁, 미일전쟁)을 직접 체험한 우리 세대는 일본의 재무장을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또 다시 일본군은 ‘옥쇄’하게 될 것인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오늘이 크리스마스인지라 다른 어느 날보다도 ‘평화’를 생각하게 됩니다.

김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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