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당을 지어 싸우더라도 공통의 구심점이나 가치가 있어야 하는데 이게 사라지니 아귀다툼이 된 것이다. [현종개수실록 24권, 현종 12년(서기 1671년) 6월 4일]

< 엎드려 생각해 보건대, 전하께서는 위로 300년간 돌보아 주던 인자한 하늘에게 노여움을 받으시고 아래로는 300년간 길러온 백성들을 죽이게 되어, 300년의 힘쓰고 고생한 대업이 전하의 몸에 이르러 망하는 결과를 장차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궁하면 근본으로 되돌아가니, 전하께서는 여기에서 나라의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른 이유를 두려워하고 깨우치지 않으시겠습니까? - 中略 - 전하께서 몸을 삼가서 수행하심이 위로 천심에 합하지 않기 때문에 밝으신 (옥황)상제께서 발끈 화를 내시고 동녘 땅 수천 리에 참혹함을 내리시어 반드시 백만의 생령들을 모조리 죽이려 하시는 것입니다.>

대사헌 장선징이 현종 임금에게 올린 서면 보고서 내용중 일부다. 아주 신랄하다. 드라마를 통해 임금 앞에서는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에 익숙해진 현대인의 상식으로 당시 신하가 임금에게 감히 이런 글을 올릴 수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 내용이 도발적이다. 이 때 현종의 나이 30세였다. 젊은 혈기에 노기를 나타낼 법도 한데 담담히 이를 받아들였다. 어릴 때부터 儒學으로 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려 500년이라는 왕조를 지탱한 힘의 원천이 바로 儒敎사상이었다. '反正'이나 '사색당파'로 어지러웠을 때도 유학의 근본이 있었으니 추슬러 갈 수가 있었다.

그런데 대사헌 정선징은 왜 이런 거친 글을 임금에게 올리게 되었을까? 보고서의 다음 내용을 보면 기근으로 온 나라 백성들이 굶어 죽을 지경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된다. 이 때가 이조 500년 중 가장 참혹한 대기근이었다고 한다. 그 실상을 실록을 통해 보자.

< 서울 내외에 굶어 죽은 시체가 도로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혹은 부모 처자가 서로 베고 깔고 함께 죽은 경우도 있고, 혹은 어미는 이미 죽고 아이가 그 곁에서 엎드려 그 젖을 만지며 빨다가 곧이어 따라 죽기도 합니다. 울고 불고 신음하는 소리에 지나가는 자도 흐느낍니다. 더욱이 전염병은 날로 치솟아 열풍이 불꽃을 일으키는 듯한 기세입니다.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드문데, 걸렸다 하면 곧 성 밖에서 죽습니다. 사방이 염병이라 온통 움막을 지어 끝없이 펼쳐지니, 참혹한 광경과 놀라운 심정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서울 밖의 죽어가는 참상은 이미 전쟁에 비길 바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보리와 밀을 이미 그르쳤고 수수와 좁쌀도 다시 벌레가 먹었으니, 이로부터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은 생기가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소설이 아닌 실록이다. 세상에 이토록 참혹한 광경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러나 이도 이겨냈다. 그 힘이 바로 유교사상이었던 것이다. 《삼강오륜(三綱五倫)》과 《오덕(五德/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은 유학의 도덕적 바탕이다. 이런 도덕적 무장이 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아귀다툼의 場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나라를 지탱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북한이 곧 자빠질 듯하면서도 지탱해 나갈 수 있는 것도 바로 '主體思想'이다. 잘못된 것이긴 하지만 사상이란 이처럼 한 국가를 지탱해 나갈 수 있는 뿌리가 된다.

그러나 조선은 철종 대에서부터 이러한 유학사상이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중심점이 흐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 고종 대에 이르러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놓고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죽기살기로 싸움질을 하니 그 나라가 어떻게 온전히 지탱할 수가 있겠는가? '삼강오륜'과 '오덕' 모두가 무너진 것이다.

유학사상이 해이해지자 결속을 해쳤다. 이러한 내부의 변화에 외부의 변화가 가세하였다. 開化의 진통 또한 너무 컸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개화라 해서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킬 것은 지켜야 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 하는데, 지킬 것은 못 지키고 받아들여야 할 것은 못 받아들인 것이다. 왜? 파당을 지어 싸우더라도 공통의 구심점이나 가치가 있어야 하는데 이게 사라지니 아귀다툼이 된 것이다.

儒敎는 宗敎라기보다 인간의 福된 삶을 위한 훌륭한 길잡이이다. 이를 지키지 않음으로 禍를 부르는 것이다. 물질문명이 발달되면 될수록 그 값어치를 생각하게 된다. 이는 반드시 보존해야 할 삶의 덕목으로 우리가 버려야 할 게 아니라 오히려 서양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봉건사회에서나 통할 사상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도 놓치지 않고 다듬어 간다면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훌륭한 규범으로 정착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가? 한국판 '도덕재무장운동'이라도 벌여야 할 판이다. 또 한 가지 빼 놓을 수 없는 사실은 漢字가 사라지면 이 모두가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註) 三綱은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정리한 것이고, 五倫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친애(親愛)가 있어야 하고, 임금과 신하는 의리가 있어야 하며, 부부 사이에는 서로 침범치 못할 구별이 있어야 하고,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 친구간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