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아래 글의 출처는 문화일보 입니다.

노재봉 前 국무총리

 유럽연합(EU)이 형성돼 가는 것은 우리에게 여간 관심사가 아니었다. 아직 민족국가로 완성도 이루지 못한 한국의 입장에서 EU는 민족국가의 차원을 뛰어넘는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연방(聯邦)국가가 탄생하는 것인지를 놓고 많은 사람이 주목했었다.

그러던 것이 최근 영국의 브렉시트 사태가 벌어지면서 이제는 누구나 판단에 혼란을 겪고 있다. 언론에서는 매일 이 사태를 다루면서 한국 경제에 미칠 영향에 대해 항간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것이 당연하면서도 못내 아쉬운 것은, 왜 EU가 이런 사태를 맞게 되는지 그 정치적 이유에 관해서는 분석이 별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헌정학적 분류 개념으로 EU는 ‘국가연합’과 ‘연방국가’의 중간에 위치한 것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 어느 것이든 EU 참여 28개국 모두가 주권적 민주국가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그것들을 하나의 통치 또는 정치질서로 묶어 유럽합중국을 만들겠다는 천명은 있었지만, 실현되지 못하고 여태껏 끌어온 게 불안의 기본적 배경이다. 여기에는 고려해야 할 정치적 상황이 있다.

20세기의 혹독한 두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는 유럽은 민족국가의 존재에서 그 이유를 찾고,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평화 이념을 전제로 하면서, 민족국가의 범주 내에서 성립된 민주주의를 탈(脫)민족국가화시켜 탈정치화에 이르는 개인의 권리에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라서, 반드시 시민이 돼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 그 이념이었던 셈인데, 각자 주권적이고 자유스러운 개인이 모인 ‘사회’가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과연, 인간이 어떤 집단적 정치체를 떠나서 경제적·문화적인 존재로만 살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근대 민주주의는 대표제라는 ‘체제’와 민족이라는 ‘형태’의 결합이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자주성과 시민이라는 집단적 자주성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그런데 EU는 줄곧 시민적 권리와 책임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 유럽으로서의 운명공동체라는 귀속 관념이 발전할 수 없게 흘러왔다. 여기에 이른바 세계화라는 흐름이 겹치면서, 인터넷에 의한 획일화는 이뤄지면서도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우의’ 또는 유대의식은 점점 약해져 왔다. 이런 바탕 위에서 공동체로서 갖춰야 하는 ‘영역’조차 불투명하게 확장돼 왔다.

이 모든 게 집단적 존재를 시민사회의 활동 영역으로 대체시키는 결과가 됐다. 이런 과정으로 보아, 회원국이면서 유로달러를 쓰지 않고 독자적 파운드화를 사용해 온 영국이 브렉시트를 택한 건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앞으로 EU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주권적 개인만을 기반으로 하는 세상은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에 입각한 세계주의가 된다는 것일 텐데, 그렇게 나아가지 않을 것만은 확실하다.

EU의 이런 사정이 통일을 국정 목표의 최우선에 두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테크놀로지와 경제 요소에만 초점을 맞춰 통일 문제를, 통일은 대박이라 하듯이 경제적 시각에서만 보려는 사고방식이 제법 팽배해 있다면, 이는 예사 착각이 아니다. 민주주의라는 체제 질서에 귀속되는 자유를 개인주권적 자유와 구별해서 보는 안목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뿐 아니라, 의식의 바람은 여기에도 어김없이 불어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통일 관념도 제법 유행하는 듯한데, 이야말로 ‘역사의 종언’ 관념에 해당한다. 나아가 주체성 있는 통일을 원한다면 반드시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EU와 마찬가지로 한국도 미국과의 관계를 확실하게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통일에 대한 정치적 사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한국 정치판을 보면 여간 걱정스럽지 않다. 북핵 문제에 대해 제14대 국회에서 결의안을 두 번 통과시킨 것 외에는 아직 아무것도 한 게 없다. 문제의식이 없으니 열정이 있을 리 없다. 무엇보다 내부의 집단적 결집력과 유대감을 강화해야 할 판에 정치인들은 국가부채율 올리기에 혈안이고, 국회의원의 세계에 시민적 미덕은 찾아보기 힘들다. 모두가 룸펜프롤레타리아트가 된 형국이다. 국제사회가 북한에 제재를 가하면서 우리에게 또 한 번 통일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음을 왜 인식하지 못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