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의 지도자상은 비슷한 듯하지만 뚜렷이 구별된다. 한국은 아버지 또는 가장(家長), 중국은 큰형(따거/大哥), 일본은 주군(主君) 또는 장군(쇼군)이 바로 그것이다. 지도자의 권위는 달리 천심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민심에 의해 결정되는데, 동양 삼국에서는 각기 그런 위치에 올라서야만 확보된다.

<삼국지>와 <수호지>에 큰형의 권위와 그 권력의 한계가 잘 드러난다. 유비와 송강은 어떤 상황에서도 최고 지도자이지만, 반드시 덕을 갖춰야 한다. 여기서 덕이라는 것은 유교적 의미의 덕이 아니다. 그것은 의(義)로 맺어진 동생들에게 권력과 부를 골고루 나눠 주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둘째가 중요한데, 그는 실질적으로 큰형보다 능력이나 인품이나 모든 면에서 뛰어나지만, 큰형님한테 절대 복종한다. 당연히 중요한 일은 대개 둘째형이 담당한다.

왕조시대에는 황제와 재상이 각각 큰형과 둘째형이었다. 오늘날은 주석과 총리가 이에 해당한다. 주석은 정치를, 총리는 경제를 담당한다.

이 관계를 깨뜨리고 큰형이 둘 다 차지할 때, 천하대란의 조짐이 보이거나 세상이 어지러워진다. 모택동이 주은래에게 총리 자리는 끝까지 인정하되, 그의 충언을 더 이상 듣지 않았을 때 저 피비린내 나는 문화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충신장(忠臣藏/주신구라)>에 일본의 전통적인 지도자상이 잘 드러난다. 천야(淺野/아사노)가 억울하게 할복하자, 지방의 작은 영주에 지나지 않지만 그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47인의 가신들은 가족도 버리고 친지도 버리고 자신도 버리고 복수의 길에 나선다. 기본적으로 일본의 영주(다이묘)는 크든 작든 전국시대의 장군 출신이었기 때문에 군대(현대적 의미의 조직)의 상명하복이 잘 지켜진다.

그러나 한국이나 중국과 달리 일본은 의사결정이 위에서 아래로(top down)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bottom up)로 향한다. 폭도가 아닌 군대는 동서고금 어디서나 원래 그렇다. 장군 한 사람의 판단만으로는 생사를 건 전투에서 적군에게 승리할 가능성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중지를 모아야 한다. 나치 군대가 승승장구했던 비결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일본의 수상은 어디까지나 조직의 장에 지나지 않으므로 조직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천하대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일개인이 수틀린다고 정당을 새로 만들지 못한다.

반면에 한국은 지도자가 아버지이므로 자식을 우르르 데리고 나가서 언제든지 분가할 수 있다. 여차하면 평생 동안 정당을 10개라도 만들 수 있다. 

<춘향전>은 흔히들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만 알고 있는데, 실은 여기에 한국의 아버지상이 잘 드러난다. 이몽룡이 이상적 아버지가 되는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 과정에서 이몽룡이 하층 서민의 은유(메타포)인 성춘향과 극적인 사랑을 나눈다. 만약 이몽룡이 암행어사 출도, 이 한 마디로 변학도를 묵사발 내지 못하면, 그는 가장으로서 자격이 없다. 퇴기이자 장모가 될 월매에게도 천대 받는다. 성춘향은 후에 기생 출신이지만 정경부인이 된다. 이처럼 한국의 아버지는 지역 공동체나 국가보다 가족이 우선이라서 사회적, 법률적 제약도 얼마든지 뛰어넘을 수 있다.

문제는 아버지가 변학도 같은 자일 때이다. 그래도 아버지니까 자식들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 아니, 아버지를 믿고 유세를 부린다. 그러면 다른 아버지들이, 다른 자식들이 다들 뒤에서 손가락질한다. 다시 말해서 이몽룡은 권위가 있지만, 변학도는 권위가 없다.

한국에선 지금까지 아버지 또는 가장에 오른 지도자가 다섯 명 있다.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 박근혜! 이들은 누가 뭐래도 생전에 30% 이상의 고정표가 있다.

아버지는 이몽룡처럼 스스로 그 지위를 쟁취해야 한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아버지가 되지 못하고 큰형의 위치에 올랐는데, 비록 저승에 있었지만 아버지 박정희의 음덕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박정희는 아버지의 아버지라는 특수한 지위에 오른 지도자이다. 그래서 그 영향이 제일 크다. 노무현은 김대중의 후광으로, 이명박은 김영삼의 후광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들도 큰형의 지위에는 올랐다. 한국에서는 중국과 달리 큰형과 아버지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김종필과 이회창이 끝내 대통령이 되지 못한 것은 어디까지나 큰형이었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아버지의 음덕도 받았지만, 그것만이라면 큰누나 곧 큰형의 지위에 머물러 대통령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미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오래되었으니까! 여자로서 가장(家長)이 되는 길은 과연 멀고도 험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천막당사 공덕이다. 그때 20석 예상을 깨고 그보다 100석을 더 확보했기 때문에, 120명(본인 빼고)의 자식에게 권력과 부를 안겨 주었다. 마침내 아버지, 가장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여자 가장은 친자식에겐 똑같지만 다른 가장들에게, 심지어 양자들에게도 영 마뜩찮다. 그래서 심증이나 본능적 거부감뿐 물증 하나 없이 탄핵되었을지 모른다. 9급 공무원도 그렇게는 파면 못한다. 양자들마저 일제히 등을 돌리거나 침묵으로 정적에게 동조한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한국의 무당에게 제일 인기 좋은 귀신은 최영 장군이다. 조선의 태조에게 억울하게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한국에선 동정심을 사는 순간 광범위한 지지를 얻는다. 김대중이 김영삼보다 골수팬이 많은 것은 그가 억울하게 감옥살이하고 해외로 추방되었다는 확신에 따른 동정심이 호남인을 중심으로 뼛속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도 이제 김대중처럼 골수팬이 생기기 시작했다. 현재 ‘좌파 불구속, 우파 구속’의 불문율이 철저히 지켜진다.

고영태, 노승일, 김수현, 이진동, 000검사 등에겐 수사는커녕 호위무사까지 붙여 주면서,

간첩 혐의자나 폭력 시위 수배자는 심지어 9년이나 도망 다닌 자도 불구속하면서,

죽은 백남기에게는 발부된 판사의 영장조차 집행하지 못하면서,

헌법 84조를 제멋대로 짓밟으면서, 무죄추정의 원칙을 제멋대로 찢어발기면서,

현직 대통령과 그 주변 사람들은, ‘엮인’ 대기업의 회장도, 동일 기업으로부터 8천억 원을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기부금의 명목으로 강제 헌납 받을 때는 언제고,

법률에 따라 공익 재단에 출자한 세계 2위 영업이익을 자랑하는 대기업의 회장도 1.6평 방에 일단 처넣고,

구속자들에게 무지막지 길고 긴 인권유린 수사로 갖은 인간적 모멸감을 안겨 준다. 기소도 전에 대역죄를 기정사실화하여 악의 괴수와 그 똘마니들로 매도한다. 

 이에 동정의 물결이, 태극기의 물결이, 전국에 넘실거리게 되었다.

122명에 달하던 국회의원 중에 박근혜 가장(家長)의 친자로 확인된 국회의원은 단 두 명뿐이다. 그중의 한 명이 급조된 ‘태극기당’에서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었다.

지금은 찻잔의 태풍 같겠지만 만만찮을 것이다.

  (2017. 4.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