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이 다 갈 즈음 괌(Guam)에 갔다. 큰아이네가 저들 여행에 우리 부부를 초대한 셈이다. 얼마 전 백일 지난 작은 손주까지 데리고 나섰으니 만만한 여행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족여행이라 그만큼 푸근했다. 아내는 신이 나서인지 벌써부터 새 수영복을 준비했다. 내 몫까지도 샀다. 며느리 보기에 시아비 체면도 생각해야 한다는 거였다. 덕분에 평생 처음 새 수영복을 입게 되었다.

가보니 올해 네 살 된 큰 손주 연우와 노는 게 재미있었다. 해변에서 모래성 쌓기, 허물기, 물놀이 등이 다 그랬다. 그러고 보니 연우와 이렇게 바닷가에서 함께 보내는 건 처음이었다. 태어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컸구나 싶었다. 야외 수영장에서 노는 게 인상적이었다. 보고 있자니 아예 물 속에 들어가는 걸 싫어했었던 지애비의 옛 그 때가 생각났다. 헌데 연우는 저렇게 좋아하는 게 아닌가!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 했는데 소질(素質)이 다른 것일까?

수영장 가생이(가장자리)를 잡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제 홀로 간다. 처음에 잠시 잡아주다 놓으니 곧 제출물로 가는 것이다. 그저 흥미롭다.

얼마만큼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제 또래 한 아이가 다가오더니 이번엔 새로 놀이를 바꾼 연우의 장난감 탱크를 줄곧 바라본다. 저도 그걸로 놀았으면 하는데 연우는 짐짓 모르는 채 아예 눈길도 안 주려 한다. 저도 어제 똑같은 경험을 했으면서다. 보기가 딱해 “연우야, 너도 어제 빌려 놀았으니 이번엔 너도 빌려줘야지.” 했더니 머뭇대다 내어준다. 그리곤 이내 뺏어 오는 것이다. 이렇게 몇 번 오고가더니 사이가 좋아졌다. 친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이들 세계가 이렇구나.’ 싶었다.

잠시 있자니, 분위기가 다소 자연스러워져서인가 삼십 중반쯤으로 보이는 그 아이의 엄마가 돌연 “친정아버지신가 봐요.” 라고 하는 게 아닌가! 엉겁결에 “아니, 시아버지입니다.”라고 했다.

“아, 그러세요. 저는 친정식구와 함께 와서요.” 라는 게 아닌가. 다소 의외인 양 싶은 표정이었다. 내심, 요즘은 시아비와 함께 여행하는 며느리는 적은가보다 싶었다. 문득 이런 ‘세태(世態)’가 궁금해졌다.

딴은 그렇다. 흔히 큰아이 집을 방문할 때는 미리 연락하고 간다. 불쑥 들어갔다 며느리가 당혹해 할까싶어서다.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딸네 집에 갈 때는 대개 그냥 간단다. 그러고 보니 시아비가 본시 어려운 법이기도 하고 ‘고부(姑婦)간’에도 조심스러움이 있을 수 있으니 여행이라면 친정식구끼리가 만만한가 싶었다. 그럼에도 몇 년 전 신혼시절에 이번처럼 외국을 함께 여행했었고 연우가 태어나서도 국내 여기저기 함께 다니지 않았던가.

결혼은 젊은이들 ‘연정(戀情)의 맺음’이지만 ‘가문(家門)의 맺음’이기도 하다. 그래 두 젊은이가 결합하는 순간 번거롭게도 ‘가문’이 슬그머니 따라 들어온다.

‘가문’은 하나의 ‘문화(文化)’일 것이다. 가계(家系)를 이어온 사람들의 정신과 생활의 습관일 것이다. 그러기에 신혼부부는 흔히 각기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경제적인 윤택함이 다르고 배움의 정도도 다를 수 있다. 그뿐인가, 제 자식을 통해 이를 보는 부모들의 인식도 다를 것이다. 이러한 ‘다름 투성이’를 어떻게 조화시킬까가 젊은 부부 행복의 관건이 될 것이다. 남편을 사이에 두고 ‘시집’과 ‘친정’에 대한 인식, 아내를 사이에 두고 ‘처가’와 ‘본가’에 대한 인식, 여기에 노후 부모들의 오늘날 운명도 함께 하는 것 같다.

2019. 11.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