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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발생한 KAL기 격추사건 당시 구소련 당국은 사건 당일 새벽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하여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논의했다. 국가안보회의에서 KGB는 이 사건을 국가 위기 요인으로 단정하고 강력한 대응을 주문했다. KGB는 예고 없이 직면하게 되는 정보적 당면 과제를 신속하게 처리해 나가는 위치에 서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을 주도적으로 처리했다.

KGB가 내놓은 복안은 KAL기가 소련 영공을 침범한 사실이 입증된 만큼 모든 수단을 동원해 ‘격추의 정당성’을 국제 여론에 호소하여 소련 당국의 입장을 이해-인식시켜 나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국제 여론을 주도하는데 필요한 선전 주제 3가지와 행동방법까지 내놓았다.

선전의 주요 목표 방향은 ‘국제사회와 소련 국민을 상대로 ’격추의 정당성‘을 이해-인식시키는 것’이었다. 선전의 주제는 1. KAL기는 미국의 스파이기다. 2. 미국이 뒤에서 조종했다. 3. 국가 안보상 격추할 수밖에 없었다. 둥의 순으로 우선순위가 매겨졌다.

KGB가 마련한 계획에 따라 사건 당일 각국의 조간신문과 석간 신문에 영국의 A 칼럼니스트, 일본 자민당 거물 K국회의원, 일본 사회당 C기관지, 프랑스의 G기자 등이 KAL기 사건 첩보 내용이 1면 톱을 장식하게 되었다(인용: 이광헌 저, <<심리를 읽으면 성공이 보인다>>).

세계는 KGB에 의해 만들어진 메시지만을 들었다. 다른 어떤 첩보와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소련의 비인도적 행위에 비판적 생각을 하면서도 국가 안보상 격추가 불가피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오고 갔으며, 이 사건에 미국의 음모가 있었다는 내용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소련의 심리전술은 계획대로 잘 진행되어 나갔다. 사람들이 사건을 보고 생각하는 관점에 신속한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즉, 사건의 핵심이 되는 ‘비인도적 행위’에 대한 관점으로부터 ‘미소 스파이 전쟁’과 ‘격추의 정당성’에 많은 관심을 갖도록 변화시켜 나간 것이다.

이렇게 미확인된 첩보와 정보들이 오가는 사이에 소련은 자신들이 당할 수 있는 위급한 불을 모면했다. 사건 발생 4일 후 소련은 침묵을 깨고 공식 발표를 했다. 내용은 ‘격추의 정당성’과 ‘미국의 스파이설’을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여론의 화살을 미국 쪽으로 몰았다.

소련은 신속하고 교묘하게 미국을 이 사건에 끌어들였다. 미국은 소련에 의한 국제 첩보 심리전쟁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소련에 당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대응방안을 짰다.

<미국의 대응>

1. 소련의 입장을 대변했다고 판단되는 칼럼니스트, 기자, 언론사, 저명인사들의 정보 입수 루트를 추적하여 그들의 ‘정보 회색성’을 폭로하고 또한 발설된 첩보 내용의 신뢰성을 추락시켜 나갔다.

2. 유엔을 무대로 소련의 비인도적 행위를 인류에 대한 범죄로 규정하고 비판 공세를 강화해 나갔다.

3. 미국의소리방송(VOA)을 활용하여 소련과 동구권 국가 국민을 대상으로 소련 지도부의 반인간성과 잔인성을 규탄-폭로하여 소련 내에 정치적 갈등을 증폭시켰다.

4. KAL기 격추 사건을 계기로 소련의 극동 군사력의 실체를 폭로하면서 미국 국민과 자유 진영 사람들에게 ‘반소련 무드’와 미국 내 ‘군비 증강’ 여론을 높여 나갔다.

사건 발생 후 1주일간은 소련의 선전 주제가 힘을 얻었으나 그 이후부터는 미국의 대항 선전 주제가 설득력을 높여 나갔다. 한국 심리전 학회 출신의 이광헌 전 국가정보대학원 교수는 미소 첩보 심리전에서 발견된 하나의 교훈은 사건과 상황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 잘하느냐에 따라 여론이 움직여 나간다는 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