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컴사령관의 배신감

존 A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은 전형적인 직업군인이었다. 그는 1928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1950년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 하바드 대학에서 행정학과 및 정치경제학 석사학위를 받기도 하였다. 위컴은 엘리트장교 코스를 두루 거쳤다. 월남전 때 보병 대대장으로서 싸웠다. 베트콩의 기습에 걸려 옆구리에 총격을 받아 死境을 헤매면서도 『부하들을 살릴 수 있을 때까지만 목숨이 붙어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는 사람이다.

위컴은 미국의 최강부대로 불리는 제101공정사단의 사단장을 지낸 뒤 미 육군본부의 작전참모부장(副長), 합참본부의 작전국장을 거쳐 1979년 7월에 주한미군사령관으로 왔다가 질풍노도에 휩쓸려 든 것이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신변 관리에 철저하였다. 담배와 술을 하지 않았다. 그의 부인 앤 린슬리 프라이어 씨는 미인이었다. 위컴장군과 全斗煥장군은 같은 장군이지만 벌써 생리적으로 맞지 않는 유형이었다. 12·12사태의 유혈극은 문민통치에 익숙한 위컴 장군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위컴 사령관은 신군부의 접촉창구였던 김윤호(金潤鎬) 1군단장에게, 『그 날 밤에 한국군 수뇌부가 그런 지리멸렬상을 보였는데 인민군이 쳐내려오면 어떻게 싸우겠느냐』고 탄식하더라고 한다. 위컴사령관 등 주한미군장성들은 「전선방어는 미군한테 맡겨 놓고서는 안심하고 정치에 기웃거리는 군인답지 않은 군인」이라는 시각으로 全斗煥장군 그룹을 보았다. 韓美야전사의 포레스터 중장은 한국군 일선부대장들을 만나면 『제발 북쪽만 보고 서울은 뒤돌아보지 말라』고 당부하거나 『위컴, 글라이스틴과 전두환이 싸우도록 내버려두고 우리는 북한에만 신경 쓰자』고 말하곤 하였다.

위컴 사령관은 全장군이 군의 지휘부를 초토화시킨 12·12사태도 미군이 북한의 위협에 울타리를 쳐주고 있다는 것을 믿고 한 짓이라고 생각했으므로 배신감은 더욱 강렬하였다. 실제로 12·12사태 직후 주한미군은 대북(對北)경계의 강도를 높였다. 조기경보기의 정찰비행이 강화되고 병력이 증강배치 되었으며 미국정부는 소련과 중국을 통해서 북한에 대해 「오판하지 말라」는 경고를 보내기도 하였다. 위컴 사령관은 이런 불쾌감의 표시로서 全장군을 만나주지 않았다. 1980년1월에는 全장군이 경호병들의 호위 속에서 미8군 골프장에 나와 골프를 치자 경호병들을 바깥으로 내몰게 했다.

책상에 발 얹고...

全장군측과의 접촉은 글라이스틴 대사, 로버트 브루스터 미CIA서울지부장(대사의 특별보좌관이라는 명칭을 쓰기도 했다), 제임스 하우스맨 주한미군 정치고문이 주로 맡아 왔다. 글라이스틴 대사도 全장군을 직접 만나기보다는 브루스터 지부장을 활용하였다. 브루스터는 직업상 그 전부터 全장군을 잘 알고 있었고 특히 10·26사건 뒤에는 긴밀하게 접촉해 왔었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브루스터 지부장은 12월11일 밤에 全장군을 연희동 자택으로 찾아가 만난 적도 있었다. 위컴 사령관은 全장군을 한국의 실력자가 아닌 소장으로 대하려고 했다.

全斗煥-위컴의 최초 대면은 1980년 2월14일 연합사 사령관실에서 있었다. 이 회담을 주선한 이는 위컴사령관의 정치고문실과 보안사의 許和平비서실장이었다. 위컴사령관은 집무실 책상 위에 성경책을 얹어놓고 비스듬히 앉아서 全장군을 만났다. 하급자 대우였다. 全장군은 노기를 띤 듯했으나 냉정을 유지했다. 위컴은 1987년에, 부산에 사는 현대사연구가 마크 피터슨씨와 만나 이날의 면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었다.
『전 장군은, 우리는 부정부패를 일소한 뒤 병영으로 돌아갈 것이며 우리를 밀어주면 언젠가는 우리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생각할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나는 옛날 자료를 찾아보았다. 5·16쿠데타 뒤에 매그루더 사령관이 태평양 사령부에 보고한 김종필씨와의 대화요지였다. 그때 김종필씨가 말한 것과 전 장군이 내게 한 말은 일치하였다. 나는 전 장군의 말을 의심하게 되었다.』

이날 위컴사령관은 12·12사태의 유혈과 9사단병력의 이동에 관해 질책하듯 말했고 全장군은 계엄사발표문대로 자신의 행동을 해명하였다. 全장군은 『우리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안심하시게 될 것입니다』라고도 했다. 위컴사령관은 이날의 대화를 상부에 보고했는데 이런 촌평을 덧붙였다. 「그는 마치 왕으로 태어난 것처럼(born to the purple)행동하였다.」 위컴사령관은 이즈음 신군부의 한 핵심장성에게 이런 말을 했다. 『군부가 부정부패를 일소한다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군이 정치를 하게 되면 반드시 신부패(Neo-Corruption)가 생기게 된다.』

주한미군 측은 全斗煥 전 대통령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 12·12사태 때부터 계속 기만당해온 기억이 아직도 새롭고 全장군의 등장이 반미감정 확산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한미군 정보관계자들은 全씨를 지칭할 때 비어를 쓰기도 한다. 이런 감정이 표출된 것이 1989년 미국정부가 우리 국회의 광주특위에 제출한 「광주사태에 관한 답변서」에서였다. 이 문서 작성에는 주한미군사령관 정치 고문실이 관계했었다. 「全斗煥장군이 이끄는 일단의 한국군 장교들」로 번역된 원문에는 「일단」을 「클리크」(clique)라고 표기하였다. 이것은 그룹(group)과는 달리 「도당」에 가까운 의미를 갖고 있다. 「비도덕적인 私조직」이란 의미가 내포돼 있다. 굳이 이런 용어를 선택한 데 대하여 한 미국 측 관계자는 『그룹보다는 결속력이 강한 조직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단어를 고르다가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미군 힘 안 먹히는 한국군

주한미대사관은 朴正熙대통령 말기에 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할 경우의 대비책을 가상 시나리오 식으로 정리해두었다. 미국은 유혈충돌의 방지, 북한의 남침예방, 정치적 파괴의 최소화를 목표로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쿠데타의 주동세력과 접촉을 유지함으로써 5·16 때처럼 바보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지침을 설정하였다. 5·16 때 매그루더사령관은 朴正熙장군측에 대해 병영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었다. 생명을 걸고 나온 쿠데타군에게 그런 지시가 먹혀들 리 만무했다.

12·12사태 때도 워싱턴에서는 그런 명령을 내리라는 권고가 서울로 내려왔으나 5·16 때처럼 무시당할 것이 뻔했다. 글라이스틴 씨는 1987년 피터슨씨와 만난 자리에서 『한국군 내부에서 전두환 세력에 대한 지지가 광범한 데 놀랐다』고 실토하였다. 위컴 사령관에게 한국군의 몇 장성이 접근해 와서 카운터 쿠(Counter Coup)를 하겠으니 도와달라고 요청했으나 『그들을 쫓아 보냈다』는 것이다. 그들이 한국군부 안에서 지지기반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주한미군은 全斗煥그룹에 대하여 손 쓸 방법이 없어 더욱 애가 탔을 것이다.

朴대통령 시절에 한국군부는 완전히 미군의 정치적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군부에 대한 지식이 약했던 李承晩·張勉씨와는 달리 朴대통령은 군에 정통하였으므로 미군 측의 자문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朴대통령의 민족주의적 성향 때문에 한국군의 장교들은 미군과 접촉하는 것을 기피하였다. 한국군 장교가 미군과 친하거나 영어를 잘 한다는 것은 진급이나 보직에 장애요인으로 작용했다. 주한미군 사령관은 자기가 직접 데리고 쓴 한국군 대령의 준장 진급에도 영향력이 먹혀들지 않았다. 이런 군대였으므로 주한미군은 반(反)全斗煥의 지렛대를 한국군 안에서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12·12 사태후 한국군부가 쉽게 안정될 수 있었던 것은 주도세력에 의한 숙군 덕분이었다. 12·12사태의 명분을, 「金載圭수사의 연장선상」이라고 하는 것은 全斗煥씨측의 주장이지만 12·12사태가 바로 정권탈취를 목적으로 했다는 것도 과장된 표현이다. 12·12사태를 주도한 정규육사출신 장교들의 공감대는 「군 개혁」이었다. 「군 개혁」에 관한 시나리오가 구체화된 것은 12·12사태 열흘쯤 전인 79년 12월초였다. 黃永時 당시 1군단장과 全斗煥합수본부장 및 서울로 휴가 나와 있던 金潤鎬광주보병학교장, 이 세 사람은 12·12사태 뒤의 군인사 안까지 짰던 것이다. 이때 오고간 이야기는 주로 군부내의 기성세력을 물러나게 한다는 것이었다. 盧載鉉국방장관과 鄭昇和육군참모총장은 다른 자리를 만들어 용퇴시키고, 새 육군참모총장에는 黃永時, 참모차장에는 全斗煥장군이 들어가 군을 정규육사 중심 체제로 개혁한다는 것이었다.

승진바람으로 군은 안정

全斗煥씨측에서는 지금까지도 「12·12사태 그날 鄭총장을 모셔와 용퇴를 건의하고 합참의장으로 모시려 했다」는 해명을 하고 있다. 이것은 12월초에 한 번 구상하였으나 포기했던 계획을 12·12사태 날에 갖다 붙인 것이다. 黃永時중장은 군개혁을 위한 인사안을 만들어 두었다가 12·12사태 뒤 「6인 군사위」(가칭)에서 반영하였다. 약70%가 그 인사안대로 되었다는 것이다. 12·12사태 때 경복궁 30경비 단장실에 참석하였던 黃永時, 兪學聖, 車圭憲중장 중 兪, 車 두 사람은 예비지식 없이 왔었다는 것이 정설로 되고 있다. 군의 개혁지침을 결정한 이른바 6인 군사위원회에서 金潤鎬장군은 『우리 군은 지난 18년간 육사8기에 의해 지배당했다. 꼭 필요한 사람만 남기고 육사8기 출신은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6인 군사위는 군개혁 인사안을 미리 주한미국대사관에 통보하였다. 金潤鎬장군이 대사특별보좌관에게 인사개혁의 배경설명을 했다. 그는 『12·12사태 대 군 지휘부의 무력함을 당신들도 보지 않았나. 일본군 지원병·하사관출신 장성들을 퇴진시킴으로써 일제 식민지 군대의 잔재를 청산하여 군의 세대교체를 이룩하고 정예화하기 위해서다』고 강조하였다. 한국군의 일부 장성들은 위컴 사령관에게 『6·25전쟁 경험자를 너무 많이 잘랐다』는 불평을 전달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신군부에서는 『6·25전쟁의 경험자라 해보았자 보병, 포병대대 이하의 경험이고, 월남전 경험이라고 하는데 전선에서 실제로 고생한 것은 소총 중대장 이하였는데 뭘 그러나』고 답변했다는 것이다. 군개혁에 의해 40여명의 비정규 육사출신들이 한꺼번에 군복을 벗자 군부 내에서는 승진바람이 불었다. 인사침체로 불만이 많았던 정규육사 출신들에게 숨통이 트인 것이다. 계급사회인 군대에서 승진 이상의 기쁜 소식은 없다. 신군부는 인사적체의 해소를 통해서 재빨리 군심(軍心)을 장악할 수 있었다.

6인 군사위원회는 여섯 가지 군개혁 실천지침도 마련하였다.
첫째는 지휘계통확립이었다. 군사령관이 군단장을 거치지 않고 바로 사단장에게 지시하지 말자는 식이었다.
둘째는 보안부대의 월권행위 금지.
셋째는 예하부대에 불필요한 지지를 하지 말자. 경계강화 지시가 수시로 내려와 앞의 지시와 중복되는 사례 같은 것을 지적한 것이다.
넷째는 근무시간 엄수. 무리한 과외 훈련이나 야간작업을 시키지 말자는 뜻이었다.
다섯째는 「데프콘3」 이하이거나 「진도개」(대간첩비상출동명령)가 아니면 외출·휴가를 중지시켜선 안 된다.
여섯째는 미군과의 접촉을 활발히 하자는 것이었다. 그 전에는 미군장교를 만날 때 허락을 받았는데 이제는 업무상의 상대자를 자유롭게 만날 수 있도록 하자는 뜻이었다.

정권을 잡을 조건들

이런 행동지침은 5·17조치까지는 대충 지켜졌다고 한다. 한 주도세력출신 장성은 『12·12∼5·17까지가 그래도 좋은 분위기였다. 정규육사 출신들이 뭔가 새롭게 군대를 움직여보려고 했다. 정승화 총장에게 미련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비정규육사출신 장교들이 상대적으로 불만이 있었다』고 했다. 신군부는 대(對)국민신뢰회복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80년 2월중순 문산에서 空地합동기동훈련 시범을 했다. 1군단장의 지휘하에서 막강한 화력시범이 있었다. 30사단과 제2기갑여단 및 미군헬기와 공군전투기가 동원되었다. 崔圭夏대통령과 金泳三신민당총재도 초대되었다. 金총재의 초대는 글라이스틴 대사가 신군부측에 부탁하여 이뤄진 것이었다.

신군부는 80년3월의 팀스피리트 훈련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주도세력의 한 사람인 金潤鎬1군단장이 한국 측 지휘관이 돼 군단병력의 반을 인솔하여 미 본토에서 공수돼온 미군병력과 함께 작전훈련을 했다. 위컴 사령관은 경기도 이천에 이동해 있던 수도기계화 사단에 대해 24시간 안으로 현리의 본부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수도기계화 사단은 이 명령을 차질 없이 완수, 기동력을 입증했다. 全斗煥장군그룹은 미군에 잘 보여 그들의 신뢰를 회복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80년3월 서울에서 黃永時, 金潤鎬, 鄭鎬溶, 盧泰愚장군 등 신군부의 핵심들이 회동한 자리에서 한 장성이 군부의 집권 조건에 대해서 이렇게 분석했다. 『첫째는 북의 남침위협이 있어야 하고 미국이 이를 인정해야 한다. 둘째 국내질서가 무너져 4·19나 5·16직전과 같은 혼란상이 초래되고 崔대통령이 경찰력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해야 한다.』

그런 상황은 5월에 벌어지게 될 터였다. 신군부에서 그런 상황을 유도하고 조작하려 했던 일면도 있으나 사태 발전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3월에만 해도 全斗煥그룹에서는 아직 정권을 잡자는 확고한 결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계엄령이 해제된 뒤에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이런 견해를 피력하는 이도 있었다. 『앞으로 국방장관은 군에서 추천하고, 군의 인사에 대해서는 외부에서 간여하지 못하도록 정치적인 보장을 받아둔 뒤 병영으로 돌아가야 한다.』 말하자면 제국일본시대의 군부처럼 정치로부터 독립된 聖域을 만들자는 논의였다. 이에 대해서 한 장성은 『그런 보장을 정치인들로부터 받아야 하는데 과연 그들을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