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래사상을 신(神)으로 받들어 자주(自主)를 죽이고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를 반대한 최만리는 그 이유를 중화적 가치관인 사대사상에 반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오직 몽고, 서하, 일본, 여진, 서번 따위가 제 글자를 가지고 있으나 이들은 모두 오랑캐의 일이니 이를 만한 것이 없습니다. 중국 것을 써서 오랑캐를 변하게 한다고 하였으나 오랑캐에게 변화를 당한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이 사실이) 중국에 흘러 들어간다면 큰 나라를 섬기고 중국을 사모함에 부끄러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보다 더 기가 막히는 논리를 정창손(鄭昌孫)이 폈다. 「삼강행실을 펴낸 뒤에 충신효자 열녀가 배출됨을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행하고 행하지 않음은 단지 사람의 자질이 어떠함에 있을 뿐이니 어찌 반드시 언문으로 그것을 번역한 뒤에 사람이 그것을 본받겠습니까」

세종대왕이 언문을 일반 백성들이 읽도록 하면 교화가 많이 되지 않겠느냐고 한 데 대하여 이런 답답한 억지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세종대왕이 한 말-『이 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사리를 아는 말이겠는가. 심히 쓸모 없는 속된 선비로다』-은 한 위대한 개혁가의 고독을 느끼게 해준다. 선비들의 논리 어느 구석에도 백성을 중국적 가치관에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의 위대성은 당시 지식인 사회의 패션이 된 주자학의 사대성을 무시할 수 있었던 그 놀라운 자주성에 있다. 이 자주성은 백성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 요새 말로 하면 인도주의에 뿌리내리고 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만들 때 우리와 음운체계가 비슷한 몽골 문자를 많이 참고로 하였다. 경멸해야 할 오랑캐에게서도 배울 게 있으면 배우겠다는 이 주체성이 중국인들보다도 더 중국을 숭배했던 당시의 선비들에게 못마땅했던 것이다.

소련보다도 더 공산주의에 교조적 충성을 바친 북한 노동당의 선비들은 주민들의 복지향상을 위해 집단농장 제도의 개선을 주장한 사람을 수종주의자로 몰아 제거하고, 미국보다도 더 자유민주주의에 충성한 남한의 선비들은 그것을 한국의 실정에 맞게 변용 하겠다는 박정희(朴正熙)를 反민주주의로 몰았다. 朴正熙를 그렇게 몰았던 사람들이 정권을 잡은 뒤 보여준 행태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일이었다.

주자학, 공산주의, 자유민주주의와 같은 외래사상을 받아들여 그것은 신(神)으로 받들고 숭배하면서 거기에 반기를 든 세종대왕, 광해군, 정조, 이승만(李承晩), 朴正熙 같은 자주, 실용노선의 인물들을 「오랑캐 추종자」 「反민족, 反민주」로 몰았던 것이 한국 지식인의 끈질긴 전통이었다. 다행히 백성, 민중, 대중들의 평가는 항상 이들 위선자들보다는 정확하고 정직하였다. 1990년대 들어서 모든 여론조사에 朴正熙가 60∼80%의 인기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요사이는 金대통령의 인기가 10% 이하로 떨어지는 바람에 더욱 관심사항이 되고 있다.

명분론자의 귀착점은 사대와 위선

한국의 지식인들은 또 명분의 극단적 추구로써 민족과 국가의 정통성과 연속성을 파괴하려는 기질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최초의 민족국가를 만든 김유신(金庾信)을 외세를 끌어들였다고 모함한다. 조선조(朝鮮朝)의 선비들은 그 朝鮮朝로부터 벼슬을 하고 봉급을 받으면서도 그 朝鮮의 건국에 반대하였던 길재(吉再), 정몽주(鄭夢周)를 정신적 스승으로 삼아 존경하였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반대한 김구(金九)이고 신한국당은 그 金九의 역사관을 받들어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로 잡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자학적인 역사관은 항상 주적(主敵)을 내부에서 찾는다. 민족중흥의 기수가 쓰러졌을 때는 냉소하던 사람들이 민족의 원수가 죽으니까 갑자기 인도주의자로 변해 조문하자고 주장하여 국론을 분열시킨 것이 좋은 예이다.

현실(민족, 국가, 안보, 역사)을 비하하고 명분(金九, 도덕, 이념, 중화(中華), 민주)을 숭배하게 되면 자신을 멸시하게 되고 힘세고 근사해 보이는 것을 섬기는 사대와 종속에 이르게 된다. 선명한 도덕주의자들의 귀착점이 비굴한 위선일 수밖에 없는 공식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黃씨의 논문을 읽고 있으면 이 사람이 신중하고 균형감각을 갖춘 지식인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소련 공산당의 과오를 가차없이 공격하면서도 지난 70년의 역사건설에는 인민들의 피와 땀이 들어 있기 때문에 허무적으로 대하여 전면적으로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한 그의 주장 같은 것은 간단히 나온 말이 아닐 것이다.

얼마 전 하버드 대학에서 한 시인이 강연을 하는데 『나는 자기 확신과 자기 회의 속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언어와 씨름하고 있다』고 하는 말을 새겨들은 적이 있다. 자기 확신만 가진 인간은 교만해지기 쉽고 자기 회의만 있으면 비굴해진다. 이런 상반된 요소를 어떻게 균형 있게 통합하는가가 인간사의 큰 과제 중 하나다.

지성과 야성, 문(文)과 무(武), 예술과 논리, 물질과 정신, 중앙과 변경, 보편과 특수, 공격과 방어의 이상적 균형 잡기가 그것이다. 黃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늘 자기 비판의 견지에 서 있어야 한다. 자기 비판과 자기 긍정은 모순되는 것같이 보이지만 인간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런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하며, 자기 긍정과 자기 부정의 두 요인을 종합하여야 한다. 여기에 정, 반, 합 도식의 철학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진리는 이단으로 탄생하여 미신으로 죽는다는 말은 자기 부정이 어렵다는 면과 자기 긍정에 떨어지기 쉽다는 면을 말해주고 있다. 자기 부정을 주장하는 진리는 현존하는 자기 긍정의 권위를 부정함으로써 이단시되고 박해를 당하지만 그것의 진리성이 인정된 다음에는 자기 긍정을 절대화하고 자기 부정을 배제함으로써 발전하는 현실과 떨어진 미신으로 되어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게 된다」

기독교가 로마시대에 박해를 받다가 국교로 공인된 다음에는 그 권위를 절대화하여 중세 암흑기를 연 것이나,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민주계가 민주화 투쟁 시절에 박해를 받다가 정권을 잡은 뒤에는 자기 긍정의 오만에 빠져 우정어린 충고도 「反개혁」이라고 부정하다가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위기에 몰린 경우에 해당하는 경구이다. 金泳三 대통령은 지금 자신이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았던, 그리하여 바로 세우기가 필요하다고 보았던 그 역사의 보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역사가 그를 바로 세우려 하고 있다.

金泳三 대통령의 위기는 한국 현대사의 주역이었던 기성세대, 보수층이 지난 4년간 金泳三 대통령으로부터 당했던 수모를 그대로 그에게 돌려주려는 데서 생긴 것이지 노동자와 학생들의 반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한국 현대사의 3대 업적인 경제건설, 국가보위, 민주화 중에서 金대통령은 두 부문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다. 건설자가 아니고 구경꾼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역사의 보복

구경꾼에게는 건설물에 대한 애착이 없다. 「5천년 석은 역사」라는 그의 표현은 이 고난의 역사, 그 격류속으로 몸을 던져 헤엄쳐 본 적이 있는 사람의 입에서는 나오기가 어려운 자학이자 허무적인 발언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깨끗한 정치인인 줄로만 알려졌던 그의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려는 작업에 앞장서고 있는 언론, 여론, 중산층, 사법기관, 정치제도는 지난 50년간의 현대사가 쌓아올린 귀중한 근대적 제도이다.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 제도의 기능에 의하여 역사의 심판, 사회 정의의 구현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역사가 썩지 않고 살아 숨쉬고 있다는 증거이자 金泳三 대통령과의 스코어를 정리해 놓겠다는 역사의 의지가 아니겠는가.

黃씨는 종교를 비판하지만 부정하지 않고 있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사회주의의 기초인 집단주의적 사랑과 생명관에 종교가 기여할 여지가 있다고 보고 있다.

그는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이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하기 위한 사상면에서의 혁명이라고 보고 있다. 黃씨는 종교를 神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개조하려고 한 포이에르 바하의 시도는 탁견이었다고 높이 평가한다. 마르크스가 종교를 부정한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줄곧 주장하고 있는 자신의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차이점을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을 사회관계의 총체(경제관계의 총체)로 이해하였으며 인간을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역사의 주체로 파악하지 못했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인간 중심의 사회주의 이론과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인간 중심의 사회주의를 그는 주체사상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는 이 주체사상이 북한에서 적용된 과정에 대하여 자세히 밝히지 않고 있다. 지금 북한에서 써먹고 있는 소위 주체사상의 핵심은 인간의 자주성을 인정하면서도 개인이 그 자주성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위대한 수령에게 위탁하여 놓고 그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기로 하자는 것이다. 黃씨가 발전시킨 집단적 사랑에 기초한 주체사상을 가져가서 그 위에다가 수령론을 얹어놓는 식으로 이용해 버린 것 같다. 黃씨는 근사한 이론이 세계를 바꿔놓을 수 있다고 과대 망상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지만 黃씨의 「집단적 생명관(觀)」은 사회과학 이론이라기보다는 종교적 느낌을 많이 주면서 그 또한 인간 본성에 대한 낙관론이 오류에 빠져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전향자의 금단현상

프랑스 대혁명이 유혈로 치달은 것은 혁명가들이 인간성에 대한 낙관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고 미국의 독립혁명이 성공한 것은 토마스 제퍼슨, 벤자민 프랭클린 같은 주도자들이 비관론자들이었기 때문이란 말도 있다. 인간 세상에서 천국을 만들겠다는 주자학이나 공산주의는 가끔 지옥을 만들고, 인간의 약점을 인정한 바탕에서 그런 지옥을 피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견제장치를 하다가 보면 천국은 아닐지라도 살 만한 공동체를 만든다는 얘기이다. 黃씨는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세기적으로 뒤떨어진 종교적인 특권을 영구화하려는 권력욕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어 그의 통치 밑에서 티베트가 독립하면 중세기적 암흑세계가 펼쳐질 것이다」고 했다. 그는 종교권력에 의한 국가 통치를 봉건주의로 보고 있다. 黃씨의 가치기준은 이처럼 역사발전 단계에 따른 인간의 각성이라는 데 있다.

그가 주체사상에 입각한 사회주의의 청사진을 설명한 논문 「사회주의 정치학 요강」부문에는 상당히 보수적이고 순진한 생각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 「아무리 고생한 노동자 농민이라 하더라도 건달을 부리고 사회 공동의 재산을 좀먹으면 인민의 적으로 규정하고 단호히 처벌하여야 한다」 「당이 기업활동을 벌여 자금을 마련해야 한다」 黃씨는 사회주의적 인간은 결코 무식자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도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노동자의 역할을 지식인보다 위에 놓은 것은 잘못이었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주의는 무식한 사람이 유식한 사람을 지도해야 한다고 했다. 지도할 수 있는 사상과 문화가 없으니 관료주의적 방법, 독재적 방법에 매달릴 수밖에 없게 된다」 그는 사회주의는 계급 타파를 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계급이 정권을 잡아서는 안되고 자주성, 창조성, 휴머니즘을 갖춘 사회주의적 교양인이 지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사회주의론은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는 논리의 틀로서는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는 데 반하여 실현 가능성이 있는 대안(代案)으로서는 총론에 머물러 있어 실감이 들지 않는다는 약점이 있다. 비판은 쉽지만 건설의 논리는 어려운 법이다. 黃씨가 공산주의의 악마성을 가차없이 폭로하면서도 「인간 중심의 주체 사상에 기초한 사회주의」에 집착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아서 퀘스틀러는 공산주의로부터의 전향은 어떤 마약을 끊는 것보다도 어렵다고 실토하였다. 그 자신도 공산당을 탈당한 뒤 금단현상을 겪었다는 것이다. 그는 소련이 과거의 혁명동지들을 스파이로 몰아 처형하고 있는 상황에 대하여 서구의 공산당들이 침묵하고 있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안락한 환경에서 사법의 불공평성을 용감하게 비판하면서도 소련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간 도륙에 대해서는 눈감고 있었다. 독일 공산당에 탈당서를 낸 뒤에도 소비에트에 대한 충성심은 지니고 있었다. 그것을 깬 것은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