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학교는 '교과서 전쟁'

6종의 근·현대사 교과서 중 50%이상 점유율
일부 교체 움직임에 전교조 교사들, 교장 협박
한국교총은 채택거부 운동… 학부모도 가세
이지혜 기자 wise@chosun.com
이영민 기자 ymlee@chosun.com



좌(左)편향 논란에 휩싸인 대표적 교과서인 금성출판사의 근·현대사 교과서 채택 여부를 놓고 전국 고등학교 현장에서 '총성(銃聲) 없는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

금성 교과서의 경우 6종의 근·현대사 검정교과서 중 50% 이상 점유율을 보이고 있는데, 그 비율을 낮추려는 학교 교장·교사·학부모들과 금성 교과서를 그대로 사용하려는 전교조 중심의 일부 교사 간의 대립이 날로 증폭되고 있는 것이다.

금성 교과서는 대한민국 건국이 남북 분단의 원인인 것처럼 기술(記述)하고, 남한의 경제 성장에 대해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북한 정권을 미화(美化)했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전교조 교사들 '바꾸기만 해봐라…' 교장 협박

전교조 소속 교사가 20여명 있는 서울 A고의 교장은 지난주 학교에서 전교조 교사들로부터 공박을 받았다. '우리 학교가 쓰는 금성 교과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교과협의회를 열고 한번 논의를 해 보자'고 제안을 하자 일부 교사가 '금성 교과서에 문제가 없는데 무슨 논의를 하라는 거냐'며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이어 며칠 뒤 이 학교 역사 교사들이 교장실로 찾아와 '금성 교과서를 바꾸려고 하면 전교조 서울지부에 연락해 학교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협박을 했다고 교장은 전했다.

부산 B고는 교과서 채택문제로 교사들끼리 갈등의 골이 깊어져 근·현대사 과목을 없애기로 결정했다. '교과서 채택에 대해 논의라도 다시 해보자'는 선배 교사와 '부장 교사로 승진하려고 교과서를 바꾸냐'며 비난하는 후배 교사 간에 말다툼이 벌어져 결국 사회 과목 중 근·현대사는 빼고 국사만 가르치기로 합의한 것이다. 비슷한 상황에 처한 부산지역 C고도 선택 과목을 세계사로 대체했다.

전국 고교에서 '근·현대사 교과서 전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진 것은 이달 초부터다. 지난달 발표된 교육과학기술부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의뢰 결과 좌편향 금성 교과서의 문제가 집중적으로 노출되면서 금성 교과서를 사용하던 학교에서 교과서를 바꾸자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대전의 D고 교장은 '신문을 보고 이런 교과서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정말 문제다 싶어 우리 학교 역사 선생님들과 (교과서 교체를) 몇 차례 얘기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교장은 '교사들이 수업에선 교과서대로만 가르치진 않는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더 이상 논의를 진전시킬 수가 없었다'고 털어놨다.

학부모 등이 적극 나서서 금성 교과서 대신 다른 교과서를 선택한 학교도 적지 않다. 서울 E고는 최근 학교운영위원 7명 중 6명이 금성 대신 중앙교육진흥연구소 교과서를 압도적으로 지지하면서 교과서가 바뀌었다.

부산 F고 경우에도 처음에는 역사 교사들 사이에 금성 교과서 교체를 반대하는 의견이 더 우세했지만 학교장과 학부모들이 다른 교과서들과 비교한 자료를 제시하며 조목조목 설득하자 교사들도 고집하지 않았다. 이 학교 이모 교장은 '상식 수준에서 봐도 문제가 있는 교과서로 우리 아이들을 가르칠 수는 없다. 운영위원회 의견을 교사들도 결국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교원단체간 맞대결 양상

역사 관련 검정교과서를 채택하거나 바꿀 경우 학교별로 역사 교사들이 검정교과서 3종(種)을 학교측에 추천하고 이어 학부모, 지역 인사, 교사 등이 참여하는 학교운영위에서 이 3종을 놓고 우선순위를 정한 뒤 최종적으로 학교장이 선택하게 돼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직접 해당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들의 의견이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교과서를 바꾸려고 해도 역사 교사들이 추천하지 않으면 교체작업이 진행되기 힘들다.

전교조 교사들은 이런 절차상의 허점을 이용해 금성 교과서 교체에 조직적으로 저항하고 있다. 전교조 서울지부는 지난주 서울시내 고등학교 학교장들에게 공문(公文)을 보내 교과서를 교체할 경우 교장에게 책임을 묻겠다며 압박하고 있다.

이에 지난 25일 금성 교과서 채택 거부운동을 선언한 한국교총은 '전교조가 교과서 교체를 저지할 경우 대항하겠다'고 말했다. 초중등교육법에 따르면 교과서 최종 선택권은 분명 교장에게 있는 만큼 교장이 소신을 갖고 교과서 선택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양대(兩大) 교원단체가 금성 교과서 채택을 놓고 정면 충돌하는 양상인 것이다.

◆학교에 짐 떠넘긴 교과부

근·현대사 교과서를 놓고 이처럼 학교 내 갈등이 깊어진 데는 교과부의 책임이 크다.

서울 G여고 교장은 '교과서가 잘못 됐으면 집필진에 수정 지시를 내리고, 수정을 거부하면 검인정을 취소하는 것이 당연한 절차 아니냐'며 '교과부가 이런 절차를 밟는 대신 모든 책임을 학교 현장에 떠넘기고 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지방 교육청 장학관도 '교육부는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주문과 관련해서는 공문 한 장 보낸 적도 없으면서 전화로만 상황을 점검하는 수준'이라며 '교과부는 교과서를 바로잡겠다는 '소신'도 없고, 잘못된 교과서에 대한 '책임'도 안 지며, 필요한 '공문' 한 줄 쓰지도 않는 '3무(無)' 부처'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