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대학가에서 주체사상을 퍼뜨리고 지하당(민혁당)을 조직하였다가 월북, 김일성을 만나고 실망하여 轉向(전향)한 뒤 북한 민주화 운동을 벌이고 있는 김영환 씨가 최근《다시 강철로 살아》라는 책을 냈다. 이 속에 내가 月刊朝鮮 편집장이던 1999년에 있었던 秘話를 소개하였기에 그 부분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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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화원

민혁당은 1997년 7월에 이미 해체되었는데, ‘공안사건’ 민혁당 사건은 1999년 9월에 알려지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국정원의 민혁당 사건 발표가 있기 40여 일 전인 그해 7월29일 나는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중국에서 사업하는 아내를 만나러 출국하였다가 부부간첩단 사건이 터지면서 남북 정보당국 양쪽으로 추적을 받는 특이한 상황이 벌어져 그대로 중국에 체류하게 된 지 2년 만의 귀국이다. 그 특이한 상황이 오히려 기회가 되기도 하였는데, 중국에 체류하는 기간 동안 탈북자들을 만나고 조직화를 준비하는 등 북한민주화운동의 기반을 만들어 놓는 계기로 삼았다.

미리 이 점부터 밝혀두는 것이 좋겠다. 나는 2년 만에 입국하여 과거 민혁당 활동에 대해 조사를 받고 그에 대한 처분을 받았던 全 과정에서 충분한 배려를 해주었던 당시 ‘국민의 정부’와 국정원에 감사한다. 물론 내가 생각하기에 완벽하게 이상적인 매듭이 지어진 것은 아니지만 민혁당 문제를 처리하는 데 있어 그 정도면 대한민국이 베풀 수 있는 관용의 범위를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입국하는 과정을 주선해주었던 <월간조선>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1999년 6월호 <월간조선>에 나를 비롯해 과거 주사파 운동권에서 전향하여 북한민주화운동을 하고 있는 한기홍, 조혁, 이승규, 홍진표, 유재길 동지 등에 대한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민혁당을 해체한 뒤로 나는 ‘푸른사람들’이라는 청년단체 활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주사파 종북노선의 전환과 새로운 진보운동의 대안을 만들기 위한 공부모임을 이끌어왔다. 거기서 중심적으로 활동했던 동지들이 의기투합해 1998년 말 <시대정신>이란 격월간 잡지를 창간했다. 잡지를 통해 우리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새로운 대안으로 공동체주의에 대한 견해, 북한민주화운동의 시대적 절박성 등을 거침없이 주장했다.

그런데 잡지사에서 잡지사를 취재한다는 것은 제법 이례적인 일이지만 <월간조선>에서 <시대정신>에 취재요청이 들어왔다. 이념적 지향이 강한 <월간조선>사의 성격 때문에 <시대정신> 필진들의 이념적 변화에 대해 큰 흥미를 가졌을 법하다. 우리 편집위원들을 취재하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시대정신> 편집장이었던 한기홍 동지가 ‘보수우파의 대변지’라는 이미지가 강한 <월간조선>과 인터뷰를 하면 과거 주사파들을 설득해나가는 데 장애가 될 수 있겠다고 판단하여 수차례 취재요청을 고사하였다. 한기홍 동지의 신중한 성격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그렇게 6개월을 거절하다가 “북한민주화운동에 있어 좌파를 설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파와 연대하여 대합작을 이루는 것도 큰 의미를 갖고 있으니 더 이상 거절하는 것은 옳지 않겠다”는 생각에 <시대정신> 핵심 멤버들에 대한 연쇄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기사의 제목은 “한국 지성사의 일대사건-<시대정신>을 만드는 김영환(강철) 등 ‘80년대 주사파 활동가들’의 대전환”이었다. 나는 중국에 체류 중인 관계로 ‘북한민주화를 위한 좌우 대합작을 제안한다’는 서면(書面) 인터뷰로 대체하였다.

<월간조선>이 발간되자 엄청난 반향이 몰려왔다. 물론 우리가 끝내 설득하지 못했던 민혁당 종북진영은 부글부글 들끓었고, 학생운동권에서도 우리를 지지하는 그룹과 그렇지 않는 그룹이 확연하게 갈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의 생각을 널리 알리는 계기로는 그보다 좋은 기회도 없었지만 득과 함께 실도 많았다. 그런 상황에 <월간조선> 趙甲濟 편집장이 “왜 김영환은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있는가?”라는 당연한 의문을 품었고, 우리 측의 한기홍 동지가 전후간의 사정을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조갑제 편집장으로서는 이미 사상적으로 완전히 전향한 사람이 과거의 문제 때문에 해외에만 체류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 같고, 그래서 본인이 나서서 내가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의견을 청와대 주요인사에게 전달하였다고 한다. 이어서 한기홍 동지와 내 어머니께서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방식으로 2년 만의 귀국이 추진되었다. 7월29일 그렇게 해서 나는 한국에 왔다.

공항에는 가족들과 <시대정신> 동지들이 함께 나와 반겨주었다. 혹시라도 국정원에서 나와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는데 공항에 나오지 않은 것은 물론 도착하고도 열흘이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조차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런 점들이 당시 정부와 국정원의 상당한 배려였다고 생각한다. 첫 조사는 8월8일에 이루어졌다. 국정원 조사실이 아니라 서울 중구청 인근의 對共상담실이었다.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조사관 對 피의자의 관계가 아니라 對共상담원 對 전향자의 관계로의 조사가 아닌 ‘심사’가 이루어졌다.

오전의 심사에서 나는 내가 전향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물론 ‘이론적’ 측면에서만 설명했다. 주체사상의 핵심은 인간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인데, 북한에 과연 그러한 가치가 실현되고 있는지 회의를 느꼈다 하는 정도로 말이다. 노동당에 입당한 이야기,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온 이야기, 민혁당을 창당한 이야기 등은 하지 않았다. 점심시간에도 외부 식당에서 조사관들과 식사를 함께 하며 오랜 사상의 짐을 공개적으로 내려놓는 홀가분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런데 오후 심사가 시작되자마자 국정원 조사관이 한 권의 책을 내 앞에 내놓았다. 《나는 너에게 장미의 화원을 약속하지 않았다》는 제목의 책이었다. 순간 이것까지 알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아찔했지만 “책이네요…” 하면서 얼버무렸다. 그랬더니 조사관이 빙그레 웃으며 “그런데 이 책이 왜 김 선생 집에 있었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냥…, 메모 같은 것을 적어서 놓아두는 책입니다.”
“아니죠, 그런 책이 아니죠,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조사관의 이 한 마디에 인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증거를 통한 백 번의 추궁도 필요 없었다. 그 책 한 권이 과거에 내가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조앤 그린버그의 소설 《나는 너에게 장미의 화원을 약속하지 않았다》는 여느 집 서재에 꽂혀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한 350페이지짜리 소설책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책이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간첩들 사이에는 주고받을 메시지가 있을 때 숫자를 사용하여 암호화하는데, 이를 해독하려면 서로 간에 약속된 책이나 잡지가 필요하다. 나에게는 북한과 약속된 해독의 키워드가 바로 《나는 너에게 장미의 화원을 약속하지 않았다》였다. 부부간첩단 사건이 터지고 나서 국정원이 우리 집을 압수 수색했을 때에 그 책을 가져갔는데, 많은 책들 가운데 그것이 난수표 해독용이라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더 이상 숨길 것이 없었다. 국정원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조사 결과를 갖고 있었다. 여수 半잠수정 내부에서 발견된 파일이나 보고서를 토대로 하영옥이나 심재○을 장기간 내사하는 중이었고, 내가 북한과 어떠한 연계선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여러 사건을 통해 이미 포착하고 있었다. 이왕 그렇게 된 상황에서는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정면승부를 하면서 정정당당하게 결말을 짓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택림을 만나게 된 과정과 노동당에 입당한 사실 그리고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만났던 이야기, 민혁당을 결성하였다는 사실 또한 연락책 진운방과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이 책에서 독자들에게 고백한 내용을 그대로 국정원 조사관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입북했고 김일성을 직접 만났다는 이야기에는 조사관도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조건

사실 한국에 도착하여 국정원 조사를 받기 전까지 열흘 정도의 기간 동안 시대정신 그룹을 비롯한 동료들과 향후 대책을 논의한 상태였다. 귀국하면 신변 안전을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은 국정원 비공개 채널을 통해 이미 확보해놓고 있었지만 내 개인적인 신변 안전에만 국한될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그룹에 속해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과거에 우리와 함께 활동했던 모든 사람들의 문제까지 걸려있었다. 동려들의 의견은 둘로 나뉘었다. 공안당국에 모든 것을 다 사실대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던 반면, 그렇게 할 경우 아직도 과거 활동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다칠 수 있다고 걱정하는 의견도 다수였다.
첫날 조사를 마치고 동료들과 대책을 다시 논의했다. 그리고 사흘 후 2차 조사에 출석했다. 장소는 서울 도심의 호텔 객실이었다. 조사에 앞서 내가 국정원에 요구한 것은 딱 하나였다.
“모든 것을 더욱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다. 오직 바라는 것은 민혁당 사건으로 인하여 어떠한 사람도 입건을 하지 말아 달라.”
조사 과정에 이 부탁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했는지 모른다. 국정원은 매번 “그런 점은 걱정하지 말라”고 약속했고, 나는 사람들의 실명과 구체적인 활동 단위 등을 밝히지 않는 범위 안에서 과거 민혁당 활동의 전모를 공개했다.

국정원이 북한의 공작현황 및 종북세력의 실태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 국가 안보를 위해 종합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사관들도 “우리나라 주사파의 규모와 영향이 이 정도였나” 하면서 혀를 내두르며 놀라곤 했다. 우리가 활동하던 당시만 놓고 보면 민혁당은 남한 최대 규모의 주사파 지하조직이었다. 단지 민혁당의 규모만으로 국정원 조사관이 그렇게 놀랄 정도니, 앞서 소개했던 것처럼 우리가 진출하지 못했던 지역까지 포함하면 남한의 주사파는 결코 가볍게 무시할 수만은 없는 세력을 갖고 있었다.

내가 민혁당 사건으로 인한 입건을 강력히 반대했던 이유는 단지 과거의 동지들을 보호하기 위한 인간적 의리나 동정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동안 꾸준하게 추진해온 주사파에 대한 설득 활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99년 당시는 동유럽과 소련의 완전한 붕괴, 북한의 대기근 사태 그리고 여야 정권교체 등으로 정치적 혁명운동에 대한 기존 운동권의 신념이 전반적으로 흔들리고 있던 시기였다. 조금만 조직적으로 노력하면 민혁당 계열을 포함한 운동권 전반을 크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공안당국과 특수한 관계가 되고, 설사 내가 구속되지 않더라도 공안당국에 특혜를 받는 듯한 관계가 된다면 이러한 활동은 앞으로 어려움에 빠질 것이 너무나 명확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민혁당으로 인해 누군가 입건되는 것을 일관되게 반대했고 진술 과정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국정원의 약속을 받아두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지켜지지 않았다. 국정원은 정치적 판단을 하는 조직이 아니라 법률과 직무규칙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공무원조직이었기 때문이다. 국정원의 조사관과 담당자들은 남한의 종북세력을 사상적으로 개조하는 대의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눈앞에 증거가 가득하고 자신의 행위까지 인정한 ‘범법자’들을 관련 법규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 더욱 자신들의 사명에 가깝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확신한다. 그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면 종북세력의 해체가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민혁당이 사건화되면서 나를 비롯한 운동권 개혁파들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좁아졌고 강경세력들의 목소리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마치 나는 배신자고 그들은 신념을 지킨 사람들이라는 엉뚱한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어쨌든 민혁당은 내가 뿌린 씨앗이고 국정원은 자기 본연의 임무와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이지만, 돌이켜보면 이 점에 대해서는 약간의 아쉬운 마음을 갖고 있다.

조유식

내가 진술을 시작한 지 일주일 정도 지나자 국정원은 처음의 약속을 어기고 이 사건을 입건하겠다고 했다. 심지어 열 몇 명에 대한 구속수사가 불가피하다고 했다. 그 열 몇 명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 인양된 잠수정에서 입수한 정보를 기초로 오랫동안 추적해온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보다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나의 진술을 필요로 했다.

나는 국정원이 약속을 어긴 것에 항의하며 그때부터 공식적인 진술서 작성을 거부했다. 며칠간 국정원은 설득하고 나는 거부하는 줄다리기가 이어지다가 마침내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국정원의 요구에 순순히 응해주다가는 정말 거대한 공안사건이 터질 조짐이었다. 민혁당은 이미 해체됐는데 과거의 행위를 근거로 거기에 속해 있던 선의의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주사파 운동권의 사상 전환을 위한 우리의 노력도 완전히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그래서 <말>지와 인터뷰를 했다. 국정원이 대규모 공안사건을 준비하고 있다는 마감 직전의 ‘특종’ 보도였다. ‘김영환 긴급 인터뷰’라는 부제를 달고 ‘국정원, 대규모 간첩단 사건 조작 위해 나를 회유 협박’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갔다. 국정원의 입장에서는 그동안 충분히 배려하며 조사를 진행했는데 ‘협박’했다고 하니, 상당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고, 국정원과 나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었던 <월간조선>의 입장 또한 난처하게 되었다. 이 인터뷰는 나와 진운방 사이에서 연락책의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당시에는 <말>지 취재부장으로 있었던 김경○의 아이디어로 진행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국정원의 시도를 무위로 돌리려는 마지막 몸부림이었는데, 나중에 국정원과 협상을 하는 데 있어서는 분명 유리한 국면을 조성했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거짓말을 한 결과가 되었다. 이미 국정원에서 진술한 내용까지도 <말>지 인터뷰에서 전부 부정했기 때문이다.

<말>지 인터뷰 다음 날 나는 중국에 가기 위해 김포공항에 들어섰다. 발권을 하고 출국장까지 들어갔지만 출국심사대 앞에서 국정원 수사관들에게 붙잡혔다. 그 사건과 관련하여 “정말로 중국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느냐”는 질문을 듣곤 했는데, 그렇게 하여 갈 수 있으면 좋고 재빠르게 출국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하더라도 당시로서는 그것이 내가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정면돌파’ 방식이었다. 그때부터는 구속된 상태에서 국정원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국정원도 내게 실망과 배신감을 느꼈겠지만 나 역시 국정원이 이 사건을 입건하지 않겠다는 애초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해 크게 못마땅한 상태였다. 그래서 구속 상태에서도 2주일 가까이 진술을 거부하였다. 국정원은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나를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그들이 선택한 마지막 방법은 나와 함께 구속된 조유식과의 면담이었다.

조유식은 나의 대학 1년 후배로 구국학생연맹, 반제청년동맹 때부터 아주 깊은 인연을 맺어왔던 친구다. 1991년 북한에 갈 때도 동행할 만큼 신뢰하였고, 그 후에도 북한과의 연락책을 맡겼다. 그런 특수한 역할 때문에 민혁당 조직에는 함께 하지 않았지만 조유식은 나의 고민과 노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지지해주고 있는 사람이었다. 월간 <말>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내가 변화된 생각을 <말>지를 통해 대외적으로 알려나가는 데에도 조유식이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나와 같은 날 국정원에 체포된 조유식은 내가 진술하기 전까지는 자신도 진술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던 조유식이 2주일쯤 지나자 조사관들에게 나를 설득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국정원 역사에 전례가 없는, 피의자와 피의자끼리의 단독 면담이 성사되었다.
조유식과의 면담은 한밤중에 이루어졌다. 나와 조유식은 둘 다 말수가 매우 적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많은 말이 오가지는 않았다. 조유식은 “장기적인 역사적 관점에서 봤을 때 진실이 무엇인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우리의 정치적 목적과 상관없이 진실을 피해갔을 때 지속적으로 더 큰 어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때부터 약속을 어긴 국정원 간부들에 대한 화를 가라앉히고 다시 생각을 정리해나갔다. 내가 진술 거부를 시작한 것은 국정원 간부들에 대한 반발과 함께 운동권 전반에 대한 설득작업이 어려움에 빠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건의 진실에 대해 숨길 의사가 없었다. 다만 그것이 운동권의 변화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을 크게 우려했다. 그러나 나의 진술 거부로 사건이 미궁에 빠져 진실공방이 중심이 되면, 오히려 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게 될 수도 있었다. “진실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것이 역사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조유식의 조언 또한 명확한 사실이다. 내가 만약 사법기관에서 진술을 거부한다면 사법기관 이외의 다른 장소에서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도 매우 어려워지게 될 것이다. 그에 비하면 내가 당장 처벌을 피할 목적으로 <말>지 인터뷰를 자청하며 ‘정치쇼’를 벌였다든지, 아니면 수사기관의 강압에 못 이겨 진술을 했다든지 하는 오명을 쓰는 것쯤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왕 진실을 회피하지 않기로 한 이상 사법기관에서부터 진실을 이야기하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後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