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와 슐리만

전설 좇아 30년, 미케네 세계를 발견한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 7세 때의 꿈을 이루기 위해 68년의 일생을 송두리째 바친 그는 세계역사상 가장 낭만적인 인물로 꼽혀야 할 것이다. 미케네 발견으로 그는 알렉산더大王(대왕), 나폴레옹, 칭기즈칸에 못지않은 정복자가 됐다. 이들 帝王(제왕)들이 기존 문명을 파괴한 뒤 새 문명을 세웠는데 반해 슐리만은 잃어버린 古代(고대) 문명을 지하에서 재생시켰다. 창조와 부활의 정복자였다고 할까? 잡화상 급사에서 시작해 백만장자가 되고 13개 국어에 통달한 뒤 그리스 여인과 결혼, 트로이를 찾아 나선 이 위대한 인물은 세상을 꿈처럼 살다간 셈이다.

1829년 독일의 메클렌부르크 지방. 목사인 아버지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어린이를 위한 그림 세계사》에 홀리고 있는 일곱 살 소년이 있었다. 트로이城(성)이 함락되는 광경이 그를 사로잡았다.
“트로이가 어디 있었는지 아무도 모른단다.”
아버지의 대답에 슐리만 소년은 소리쳤다.
“제가 찾겠어요!”
당시 유럽인에게 트로이를 포함한 미케네 세계는 오디세이에나 등장하는 전설에 불과했다. 그리스 시인 호머에 따르면 그 전설은 이렇게 전개된다.

3100년 전 부강을 자랑하던 미케네王(왕) 아가멤논(Agamemnon)은 트로이 원정군을 일으켰다. 동생의 妃(비) 헬렌을 트로이 왕자 패리스에게 빼앗긴 데 대한 복수의 원정군이었다. 발이 빠른 아킬레우스(Achilleus), 모사꾼 오디세우스(Odysseus) 등 그리스 一流장사들을 끌어 모은 아가멤논은 바다를 건너 트로이를 쳤다. 철벽같은 성에 둘러싸인 트로이는 만만치 않았다. 攻城(공성)은 10년 계속됐다. 아킬레우스까지 패리스의 화살에 쓰러지자 정복은 희망 없는 듯했다.

아가멤논은 최후의 속임수를 쓴다. 천하장사들을 집어넣은 거대한 木馬(목마)를 버려두고 원정군은 철수. 트로이人들은 이 목마를 끌고 들어가 승리의 축제로 그날 밤을 亂舞했다. 트로이가 木馬(목마) 속의 그리스 복병에 의해 폐허가 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합리주의가 석권하던 19세기에 이 전설을 史實(사실)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슐리만과 그의 소꿉동무 민나 마인케를 제외하곤.

슐리만의 일생은 출발부터 파란만장이었다. 14세 때 그는 학교를 중퇴, 퓌어스텐베르크에 있는 잡화상 급사로 들어갔다. 집안이 몰락, 가족은 풍비박산된 것이다. 19세에 그는 함부르크~베네수엘라 상선의 급사로 전향, 첫 항해에 배가 침몰하는 꼴을 보게 된다. 구사일생 으로 목숨을 건진 슐리만은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무역회사 급사로 주저앉았다. 여기서 그는 어학의 천재로 돌변한다. 2년 만에 슐리만은 영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어를 마스터했다. “뛰어난 집중력 덕분에 한 언어에 6주 이상 소모할 필요가 없었다”고 그는 자서전에서 떠벌렸다.

젊은 시절의 슐리만.

22세 때 그는 러시아를 상대하는 무역회사 통신서기로 승진한다. 러시아語(어)도 6주 만에 익혔다. 러시아語(어)에 유창한 한 유태인이 그의 옆에 앉아 종일 교재를 읊도록 하는 식으로. 그리스語(어) 공부엔 그는 아직 마음을 먹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그리스語(어)에 몰입하면 트로이에 완전히 미쳐버리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846년 24세의 슐리만은 고향을 찾았다. 소꿉친구 민나 마인케에게 청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민나는 며칠 전 이미 시집갔다는 소식이었다. 슐리만에겐 쇼크였다. 함께 트로이를 찾겠다는 꿈은 물거품이 된 것이다. 위인들이 항상 그렇듯 슐리만은 그 실망을, 성공을 향한 채찍질로 받아들인다. 

백만장자가 된 슐리만

슐리만의 傳記를 읽을 때 독자는 인간적 순수함에 감동하게 된다. 트로이를 발견, 세계고고학자들을 무색케 한 것도 물론 위대한 업적이었지만 보다 가슴을 울려오는 것은 7세 때 품게 된 꿈을 이루기 위해 한 생애를 바친 그의 순진성이다. 급사 시절에도, 백만장자가 됐을 때도, 마인케의 결혼을 알았을 때도, 그는 트로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13개 국어에 통달하고 세계적인 부호가 된 것도 오직 이 꿈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1846년 슐리만은 러시아 수도 페테스부르그에 무역회사 지점을 열고 본격적인 돈벌이에 들어갔다. 1850년 골드러시를 타고 미국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은행을 창립한 그는 미국시민권을 얻었다. 1853년 크리미아 전쟁과 몇 년 뒤의 남북전쟁을 통해 그의 재산은 눈사람처럼 부풀어갔다. 남북전쟁을 예감, 목화를 무더기로 사재놓았던 그는 전쟁에 따른 원료난에 편승했던 것이다.

그렇게도 그리던 그리스語(어) 공부에 뛰어든 것은 1856년. 6주 동안 이 언어를 마스터해버린 그는 호머의 서사시에 빠져들었다. 오디세이의 무대가 된 그리스 반도를 비롯, 中東(중동)지방과 이집트를 두 차례 여행, 古代(고대)세계에 대한 교양을 넓혀간다. 1864년 그는 사업에서 손을 뗐다. “이 이상의 富(부)는 공명심에 속한다”고 은퇴 이유를 밝혔다. 이제 슐리만은 완전한 자유인이 됐다. 세계여행을 즐기며 그는 파리에서 잠시 고고학 공부에 열중했으나 재미를 보지 못했다. 슐리만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전야의 日本(일본)에도 들른 적이 있다. 1868년 《중국과 일본》이란 책도 냈다.

1868년 45세의 슐리만은 드디어 트로이를 찾아 그리스로 향했다. 당시 고고학자들이 오디세이를 신화 이상으론 생각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우선 오디세이를 쓴 호머의 實在(실재)를 증명할 수가 없었다.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제우스, 아폴로, 포세이돈 등등의 神(신)들이 또 고고학자들의 눈을 가렸다. 이런 신들이 펼치는 이야기가 역사적인 사실을 반영한다고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는 일찍이 오디세이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합리적인 이론으로 무장한 19세기의 학자들은 이 “역사학의 아버지”조차 부정했다.

슐리만은 實體(실체)를 가리는 이런 논리에 구속되지 않고 천재의 직관으로 이 신화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위대한 발전이나 발명이 문외한에 의해 종종 이뤄지는 이유―그것은 기존학설의 틀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슐리만은 트로이를 위해 30년 동안 쌓아온 巨金(거금)을 갖고 부나르바시에 도착했다. 에게海(해) 西岸(서안)에 있는 이 시골마을은 지금의 터키 공화국, 당시엔 오스만 터키 제국에 속해 있었다. 일부학자들이 “만약 트로이가 실재했다면 이곳에 있었다”고 지목한 장소였다.

이곳엔 우물이 둘 있었다. 학자들은 일리아드 제22章(장)에 나오는 우물이 이것이라 추리했다. 우물을 조사한 슐리만은 단번에 이곳이 트로이가 아니라고 선언한다. 두 우물의 수온은 섭씨 34도였다. 일리아드엔 한 우물은 차다고 적혀 있지 않은가? 호머의 詩(시)를 성경처럼 믿었던 슐리만은 이렇게 의심했다. 그는 다시 일리아드를 펴놓고 전투장면을 상상했다. 트로이의 용사 헥토르가 말을 달리며 敵將과 대결하는 장면. 슐리만은 트로이로 지목된 언덕이 이런 전투엔 너무 좁다고 생각한다. 슐리만은 일리아드를 트로이 발견의 오직 하나뿐인 안내서로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