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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그리고 사랑> 

1920년 2월 10일 오후 4시. 긴장된 공기가 남대문역 부근에 가득 차 있었다. 플랫폼 서쪽에는 일본군 제78연대장 홋타 대좌의 휘하 보병 2개 대대가 도열해 있었다. 동쪽에는 조선인 대정친목회원, 실업단체 등 환영객들이 겹겹이 둘러서 있었다. 이윽고 해군대장 출신 사이토 남작(男爵)을 태운 기차가 흰 김을 뿜어대며 남대문역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3·1운동의 정치적 책임을 지고 하세카와 총독이 물러나고 사이토가 총독이 되었다. 사이토의 인생은 다채로웠다. 그는 현청(縣廳)의 급사 출신으로 고학(苦學)으로 해군학교에 들어가 장교생활을 했다. 미국 유학 후 그는 정치가로 변신했다. 그는 정치를 아는 수완이 비상한 인물이었다. 그는 그를 맞이하는 군중 앞에서 동경에서 작성해 온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적은 연설문을 꺼내 발표했다.

“저의 정책방향은 문화주의입니다. 조선민족의 3·1만세소동 같은 일대 반항적 시위는 우리 일본의 정책에 잘못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총칼로 지배하는 것은 일시적이고 표면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정말 중요한 건 조선민족을 설득하고 납득시키는 것입니다. 남을 지배하려면 철학이 있고 종교가 있고 문화가 앞장을 서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은 마음으로 인정합니다. 이것이 세계사의 교훈이며 고금을 통해 변함없는 진리일 것입니다.”

잠시 말을 끊었던 사이토 총독은 미리 준비해온 구체적 정책을 알리기 시작했다.
“저는 조선 사람들에게 위압적인 헌병제도를 철폐하겠습니다. 공무원과 교사들이 의무적으로 입던 제복도 없애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조선의 전체 지역에 언론의 자유를 보장할 것입니다. 저는 해군장교로서 세계를 두루 다니면서 많은 걸 보고 배웠습니다. 정치란 백년 앞을 내다보고 사람들의 마음을 살펴가며 유연하게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총칼을 휘둘러 민중을 굴복시키는 순간 통치자는 이미 자신의 묘혈(墓穴)을 파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식민지 정책은 흔히 무단정치(武斷政治)입니다만 그것은 예외 없이 실패한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나는 이 땅에 총과 칼이 아니라 일본의 문화와 제도를 옮겨다 심을 것입니다. 늙은이는 차례로 죽어갑니다. 이제부터 조선 땅의 어린이들을 자애로운 손길로 교육하겠습니다. 백년 이백년 뒤의 일본과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조선을 위해서 준비하겠습니다. 조선 민중들에게 온정을 베풀겠습니다. 교육, 문화, 종교로 그들의 정신이 깨어나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나의 문화정책입니다. 국제적으로도  조선 사람을 문화적으로 통치한다는 좋은 여론을 조성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조선총독은 권력자가 아니라 정치인이어야 합니다. 나는 선물로 조선인들에게 자유와 문화라는 포도주를 선사하려고 준비해 왔습니다.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총독부는 조선인들의 정치적 성향을 민족계, 중간계, 친일계로 분류했다. 민족계의 신문으로 동아일보(東亞日報), 중간계의 대변지로 조선일보(朝鮮日報), 그리고 친일계통의 신문으로 시사신문(時事新聞)을 허가하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조선일보의 발행인은 대정실업친목회(大正實業親睦會)의 예병석(芮丙錫)으로 예정했다. 그동안의 행적으로 보아 그 논조는 크게 염려될 것은 없었다. 동아일보의 발행을 신청한 김성수(金性洙)는 과격한 인물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총독 사이토는 모리야 비서과장을 불러 ‘조선 민간 신문 발행 허가신청 서류’를 가져오게 해서 서명하고 도장을 찍었다. 1920년 1월6일부로 한글 신문들이 탄생했다. 한글신문은 수많은 조선의 문인들의 활동공간을 제공하게 됐다.

김동인(金東仁)은 다시 세상에 나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친구 주요한(朱耀翰)도 전영택(田榮澤)도 돌아왔다. 주요한은 조선독립의 격문을 만들어 시내에 돌리다가 경찰에 발각되자 상해로 도망쳤었다. 전영택은 그 부인이 독립선언 때 잡혀 가는 바람에 유산(流産)을 하기도 했다. 인쇄를 부탁했던 ‘창조(創造) 2호’가 창고에 쌓여 있었다. 최초의 문예지 창조가 다시 살아났다. 김억(金億)의 번역시나 전영택(田榮澤)의 완성도 높은 소설이 실렸다. 많은 작가들이 창조에 글을 실으면서 문단에 얼굴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김소월(金素月)은 창조에 ‘낭인의 봄’이라는 시를 내면서 데뷔했다. 김소월은 본래 김억의 제자였다. 김억의 문하에서 시도(詩道)를 닦을 적에 시풍(詩風)은 물론이고 원고용지의 모양 형식까지도 스승을 따랐다. 김동인은 그런 모방성을 보고 처음에는 김소월에 대해 시큰둥했다. 창조성을 가지지 않으면 시인으로서의 장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창조에 많은 문인들이 글을 기고했다. 노자영(盧子泳) 방인근(方仁根) 황석우(黃錫禹) 등이 기고하기도 했다. 김소월(金素月)은 자기의 길을 민요에서 발견하고 그 길을 꾸준히 갔다. 민요시인 김소월의 출현은 문단의 경이(驚異)였다. 그의 스승인 김억(金億)조차 지금껏 고집하던 자기의 시풍(詩風)과 시도(詩道)를 버리고 제자인 소월이 개척한 신민요로 개종을 했다. 이광수와 최남선이 동인(同人)으로 새로 가입했다. <창조>는 조선청년들의 방향을 설정하는 푯대였다. 작품을 준비하면서 김동인은 ‘4000년 조선에 신문학이 나간다’고 큰소리로 외쳤다. 창간호 2000부가 모두 팔렸다. 조선 내에서 ‘창조(創造)’는 경성(京城)의 동양서원, 평양의 기독서원과 광명서원에서 팔았다.

1921년에서 1922년에 걸친 겨울을 김동인(金東仁)은 경성의 패밀리 호텔의 한 방을 빌려 묵으면서 글을 썼다. 복도 건너편 방에는 작가 김찬영(金瓚永)이 묵고 있었다. 그 호텔에 노자영(盧子泳)이라는 작가도 있었다. 문인들이 한 곳에 모여 서로 소재나 문학을 토의해 가며 작품을 쓰는 게 훨씬 능률적이었다. 여러 사람의 다양한 아이디어가 책으로 생산되어 나왔다. 작가 노자영은 김동인을 비롯해서 그곳에 있는 작가들에게 연애편지를 하나씩 써달라고 했다. 노자영은 그렇게 모은 연애편지들을 책으로 만들어 ‘사랑의 불꽃’이라는 제목을 붙여 출판했다. 그 책은 조선 청춘남녀들의 교과서같이 되기도 했다. 이광수(李光洙)가 ‘백마강’이라는 노래의 가사를 만든 걸 김영환(金永煥)이 곡을 붙이기도 했다. 목소리가 아름다운 소설가 나도향(羅稻香)이 김산월(金山月)이란 여자에게 그 노래를 주어 부르게 했다. 당시 창가라고 부른 그 노래가 히트를 쳐서 애창되기도 했다. 시인 김억(金億)은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발행하는 링컨전이나 워싱턴 등의 전기(傳記)를 만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