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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업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조선인들 사이에 ‘신일본주의(新日本主義)’라는 사고들이 퍼지고 있었다. ‘신일본주의’는 일본민족만의 일본이 아닌 조선의 토지 인민을 포함하는 새로운 일본 밑에서 공존공영(共存共榮)을 달성하자는 사상이었다. 노련한 정치인인 조선총독 사이토는 조선인 민원식(閔元植)을 통해 국민협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그 운동기관으로 협성구락부를 조직했다. 민원식은 동경을 드나들면서 참정권 청원운동을 전개했다. 조선인 출신 의원을 선출해 일본 의회에 보내게 해달라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조선인에게 정치적 기대감을 던져 주기도 했다.

사이토의 교육정책은 상민(常民)이나 노비 출신의 자식들도 보통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게 했다. 양반집 마님들이 보통학교의 일본선생들을 찾아가 어떻게 상것들을 양반집 자제들과 함께 앉혀 교육을 시키느냐고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천대받던 조선 무당(巫堂)들을 면허제로 조직화하고 그들을 정식 직업인으로 인정했다. 조직에 소속한 무당들은 당국의 보호하에 굿과 예언, 신탁 등을 하게 했다.

서자(庶子)나 노비들의 자식들에게 공무원이 될 수 있는 평등권이 보장됐다. 기생들도 제도권 내로 흡수했다. 기생단체인 ‘대동권번(大同券番)’을 만들어 갓 상경하는 신출내기 기생들을 가입시켰다. 대동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은 당국의 특별보호 밑에서 일어(日語)와 일본노래를 배우게 했다. 경무국은 일본인들의 연회(宴會)가 있으면 일어와 일본노래를 하는 조선기생들을 불렀다.

한 번은 조선에 관광을 온 일본인 300명 앞에서 조선기생들은 일본 게이샤보다도 더 훌륭하게 일본 속요(俗謠)를 불러서 일본인들을 놀라게 했다. 총독부는 조선기생단의 일선융화(日鮮融和) 장면을 홍보영화로 찍어 전국에 순회상영을 하기도 했다. 사이토의 노련한 정치는 사회 곳곳에 스며들고 있었다. 

경성 거리에 변화의 물결이 밀려들고 있었다. 뉴욕과 파리의 유행이 동경을 거쳐 바로 경성에도 퍼져나갔다. 극장가가 붐볐다. 종로에는 우미관(優美館), 단성사(團成社), 조선극장(朝鮮劇場)이 조선인 관객을 놓고 3파전을 벌였다. 지금의 명동, 을지로 쪽으로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남촌에는 황금관(黃金館), 대정관(大正館) 같은 극장들이 일본인 관객들을 끌고 있었다. 극장들이 관객을 조선인 일본인 따로 받은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설명하는 변사(辯士)들이 조선인과 일본인으로 나뉘어지면서 자연스레 관객도 갈라졌다. 조선민중에게 불을 붙인 영화는 프랑스 영화 ‘몽파리’였다. 조선일보(朝鮮日報)는 프랑스 영화 ‘몽파리’에 대해 이렇게 보도했다.

‘불란서 영화 몽파리의 세례를 받은 청춘남녀는 모든 것에 있어서 최첨단이어야 한다는 이 1930년이다. 이 땅 경성의 청춘남녀의 옷차림이나 걸음 거리는 확실히 영화 몽파리에 나오는 그것이다. 거미줄보다도 더 설핏한 옷 사이로 움직이는 모던 걸의 몸뚱아리 그 여자들은 큰 길거리를 그런 벌거벗은 몸으로 쏘다닌다. 수십 수백의 벌거벗은 여자들의 관능충동의 변태적인 딴스. 그것은 잔인 음탕한 현대인의 신경을 자극시키기에 족하다.’

경성 거리는 숱한 모던 보이와 모던 걸로 넘쳐났다. 서양의 음악이 들어와 대중화되면서 경성거 리는 댄스가 유행했다. 생활이 넉넉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저마다 재즈나 블루스 혹은 왈츠의 춤바람에 빠져들기도 했다. 총독부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 해 팔리는 레코드가 120만 장이었다. 그중 40만 장은 조선의 소리판이었다. 경성의 레코드업계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영화산업도 발달하고 있었다. 춘향전이나 이어서 제작된 ‘은하에 흐르는 정열’ 등이 흥행에 성공했다. 경성은 상업중심의 근대도시로 탈바꿈해 가고 있었다.

1934년 4월18일 저녁 무렵. 경성의 장안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밤사쿠라 구경을 가기 위해 돈화문(敦化門)에서 창경원(昌慶苑)에 이르는 거리는 인파로 뒤덮였다. 벚꽃이 만발하는 봄이었다. 전국적으로 벚꽃놀이가 유행이었다. 경성 사람들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서울로 올라와 전차를 타고 창경원을 갔다. 종로사가에서 원남동으로 가는 길도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거리를 밝힌 일만 개가 넘는 오색영롱한 전등불이 축제의 분위기를 띄웠다. 수백 명의 경찰관이 출동하여 호루라기를 불며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화사하게 핀 벚꽃나무 아래서 사람들은 찬합에 싸온 김밥들을 먹고 사이다를 마셨다. 이광수(李光洙)의 소설 ‘무정(無情)’이 영화가 되어 황금좌(黃金座)에서 개봉됐다. 이기채(李基采) 감독이 김신재(金信哉) 이금룡(李錦龍) 한은진(韓銀珍)을 출연시켜 만든 영화였다.

김동인의 동생 김동평(金東平)이 ‘춘희(椿姬)’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평양에서 그 영화가 흥행했다. 김동인은 영화에 흥미를 느꼈다. 영화사업을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는 서울로 올라와 영화사의 아는 사람을 통해 필림을 빌렸다. 일본인 변사(辯士)도 나중에 돈을 주기로 하고 고용했다. 진남포로 가서 첫 번째 상영을 했다. 그는 문에서 들어오는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사흘 동안 일본인을 상대로 영화를 틀었다. 나흘째 되는 날은 평양으로 와서 조선인을 상대로 상영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방 씨라는 조선인 변사를 고용했다. 흥행이 끝나면 변사와 함께 중국 음식점으로 가서 식사를 했다. 꽃샘추위가 남아있는 4월 초순경이었다.

김동인은 다섯 프로를 짜가지고 진남포로 내려갔다. 여태까지는 수입을 영화관 주인과 분배하는 흥행방식이었다. 이번에는 과감하게 그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영화관을 세를 얻어 모든 흥행수입을 독차지하고 싶었다. 꽤 대담하게 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다. 모두 특선 영화였는데도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심지어 그날그날의 영화관 임대료조차 나오지 않았다. 여관비 밥값 등 매일 비용들이 쌓여만 갔다. 빚만 가득 남긴 채 어느날 밤 그는 진남포를 도망쳐 빠져나왔다. 그는 진남포에서의 손해를 회복하기 위해 정주로 갔다. 그러나 정주에서도 실패했다. 선천으로 장소를 옮겼다. 그곳도 실패였다.

빚은 산더미 같이 늘어났다. 도저히 갚을 길이 없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파산이었다. 그는 빚쟁이를 피해 도망을 다니고 있었다. 어제는 군산, 오늘은 대구, 내일은 신의주 그렇게 그는 지향(志向) 없이 헤매고 있었다. 불안한 그는 잠시도 한 곳에 머물고 있을 수 없었다. 아편이 그리웠다. 전에 아플 때 먹었던 아편이 꿈같았다. 그는 무인도에 혼자 버려진 것 같았다. 그는 직업을 가져 본 적이 없다. 돈을 벌 수 있는 기술도 없었다. 그렇다고 노동을 할 만한 근육의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둠이 밀려오는 무렵 대구의 좁은 골목에서였다. 정처 없이 헤매던 나그네 김동인의 눈에 길 쪽으로 문을 열어놓은 어떤 작은 방 안의 모습이 들어왔다. 초라한 단칸방이었다. 그 안에는 젊은 부부가 등불 아래 마주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남편은 노동자 같았다. 지극히 평범한 그 광경을 보는 순간 김동인은 흠칫했다. 노동자에게는 밥을 벌 만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이미 노동자보다도 더 바닥으로 떨어진 그였다. 그의 머리에는 두 개의 운명이 서성거렸다. 하나는 노숙자였다. 다른 하나는 죽음이었다. 앞으로 삼십 년이 될지 사십 년이 될지 모르는 비참한 인생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길거리에서 거지아이들을 보면 문득 어머니에게 맡기고 온 아이들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여관방에서 혼자 죽음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반성을 해 보았다. 사업가로서의 자질이 없는 그의 실패는 예견된 것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