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하도 포함됩니까?』

= 저녁 6∼7시

朴대통령과 차지철이 도착한 것은 6시5분께. 나동 만찬장의 자리배열은 직사각형 식탁의 한쪽에 朴대통령이 혼자 앉고, 그 맞은 편에 김재규와 김계원, 車실장은 김재규의 왼쪽 측면에 떨어져 앉았다. 朴대통령은 앉자마자 부마사태와 관련, 국내치안에 별 이상이 없느냐고 물었고, 김재규는 평온하다고 대답했다. 이어서 삽교천 이야기, 신민당 공작실패, 정보부의 무능, 金泳三구속 문제 등으로 화제가 전개됐다. 朴대통령은 김재규를 공박하고, 차지철은 이에 가세하는 형편이 됐다. 김계원은 김재규가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는 것을 옆에서 복 있기가 딱했다고 한다. 그래서 『삽교천 공사가 잘 됐읍니다』 『충청도 농촌이 아름답습니다』 『金부장이 이래도 칵테일을 잘 합니다』식으로 화제를 억지로 바꾸려고 했다. 6시50분쯤 여가수와 여대생이 들어와 朴대통령의 양쪽에 앉았다. TV 7시 뉴스에 삽교천 준공식이 나오면서 대화는 잠시 중단됐다.

= 저녁 7∼7시20분

저녁 7시에 의전과장 박선호는 한숨을 돌리고 나동(棟)의 대기실에서 청와대 경호처장 鄭仁炯, 부처장 安載松과 잡담을 하고 있었다. 대행사가 있는 날은 눈코뜰 새 없이 바쁜 날이었다. 이날도 예고없이 대행사 연락을 받고는 여가수와 여대생을 황급히 불러내, 내자 호텔과 플라자 호텔에서 만나 데리고 왔다. 이 두 여자에게 「교육」을 시키고 들여 보낸 뒤 그는 두 경화관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잡담을 하고 있었다. 鄭처장과는 해병장교 동기생이며 올림픽 사격선수인 安부처장은 해병대 후배였다. 두 사람과 모두 절친한 사이였다. 박선호은 해병대 대령으로 제대한 뒤 김재규(당시 차장)덕분으로 정보부 총무과장까지 지냈으나 申직수 부장 시절 모종 사건에 관련, 75년에 해임됐다. 윤활유회사를 경영하다가 78년11월에 다시 김재규에?불려가 의전과장이 됐다. 김재규는 朴이 김천중학교에 다닐 때 체육교사였다는 사제지간의 인연도 있었다.

朴은 신경을 무척 써야 하는 일인데다가 격무에 지쳐 한달 쯤 전엔 김재규에게 그만두고싶다는 얘기를 꺼낸 적도 있었다. 김재규도 『몸도 약하고 해서, 나도 朴대통령이 그만두라고 했으면 좋겠다. 우리 같이 시골에서 낚시나 하고 장기도 두고 하면서 놀자』라는 말을 하곤 했다. 업무의 성격상 기독교신자인 박선호의 양심에 가책이 되는 일이 있었고, 사후수습에 골치를 썩인 적도 많았다. 애써 사람을 골라 오면 경호실에서 퇴짜를 놓는 일도 잦아 친구인 정인형과(鄭仁炯) 가볍게 다투기도 했다. 이날 박선호는 웃옷 속 주머니에 20만원씩이 든 봉투 2개를 넣어두고 있었다.

7시15분쯤 만찬장에 음식을 나르는 南효주 사무관이 朴에게 오더니 『부장님이 나오신 지 5분이나 됐는데 모르고 있느냐』고 했다. 놀란 朴고장은 플래시를 비추면서 본관 쪽으로 갔다. 김재규가 朴興柱대령(수행비서관)을 데리고 나오고 있었다. 金은 구관 침실 뒤쪽 잔디밭에서 『둘 다 모여!』라고 했다. 金부장은 바지 호주머니를 툭 쳐 권총을 가졌다는 시늉을 한 뒤, 『자네들 어떻게 생각하나. 잘못되면 너나 나나 다 죽는거야. 오늘 나는 방에서 해치우겠다. 너희들은 경호원을 맡으라』고 했다. 김재규는 두 부하의 표정에서 「안했으면」하는 주저를 읽었다. 그는 용기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육군참모총장과 차장보도 와 있다 각오는 돼 있겠지』박선호는 부마사태가 굉장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참모총장까지 와 있는 걸로 미뤄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각하도 포함됩니까』 『응』 『오늘은 안 됩니다』

박선호는 친구 정인형 생각이 나서 이 거사를 미루고 싶었다. 鄭처장은 군 동기생의 부탁을 잘 들어주어 친구들 사이에 신망이 높았다. 『안돼! 오늘 안 하면 보안이 누설돼서 안돼』『각하 경호원이 오늘은 7명이나 됩니다. 다음으로 미루죠』 이것은 박선호의 거짓말이었다. 그날 경호원은 4명 뿐이었다. 『안돼. 똑똑한 놈 3명만 데리고 와』 이때 박선호는 이 일을 왜 박흥주대령에게 시키지 않느냐고 속으로 원망했다고 한다. 『알았읍니다. 30분간 여유를 주십시오』 『30분 전엔 절대로 행동해서는 안돼!』

『우리 같이 살자!』

= 저녁 7시35∼45분 대기실

7시35분께 주방장 南효주가 만찬장으로 들어와 김재규에게 귓속말로 『과장님이 뵙잡니다』고 말했다. 박선호는 옆방에서 김재규를 맞아 『준비 끝났읍니다』고 했다. 박선호는 마침 화장실에 갔다오는 안재송(安載松)을 따라 대기실로 돌아와 입구쪽 소파에 앉았다. 鄭, 安 두 경호원은 맞은 편 의자에서 땅콩을 까먹으면서 AFKN-TV를 보고 있었다. 박선호는 재판과정에서 『궁정동 식당에는 경비원이 20∼30명이나 있고 수류탄과 기관단총까지 있어 얼마든지 해치울 수 있었다. 내가 대기실을 맡은 것은, 다른 사람을 보냈을 경우, 그냥 쏘아버릴 것 같아서였다.…수사할 때 수사관이 날 보고 바보라고 했다. 金부장을 쏘거나 밀고했으면 되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배신했으면 金부장은 마음 아플 것이다. 신의가 중요하다. 신의가 없으면 상관은 죽은 상관이다』고 이때의 심경을 말했다.

7시40분쯤, 「땅!」첫 총성이 울렸다. 김재규가 차지철을 쏜 것이다. 이 순간 대기실의 세 사람, 朴, 鄭, 安은 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또 「땅!」 김재규가 일어나면서 대통령을 쏜 것이다. 박선호는 재빨리 38구경 권총을 뽑았다. 鄭·安 두 경호원을 거누며 소리쳤다. 『우리 같이 살자!』 鄭처장이 권총을 뽑으려고 했다. 『꼼짝말라. 움직이면 쏜다』 박선호(朴善浩)가 경고하자 鄭처장은 한 순간 포기하는 표정이었다.
『우리 같이 살자!』
朴이 재차 소리쳤다. 安과 鄭의 눈이 마주쳤다. 안재송(安載松)은 번개같이 몸을 일으키며 총을 뽑아들었다.
「땅!」
박선호가 安을 향해 발사했다. 安이 쓰러지는것과 동시에 鄭처장의 손도 권총으로 갔다.
「땅!」「땅!」
박선호는 뒷걸음치면서 두방을 쏘았다 鄭처장이 쓰러졌다. 그 순간 박선호(朴善浩)도 문지방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달려들었다면 박선호가 당했을 것이다. 朴이 『같이 살자』며 총을 겨누고 있었던 순간은 불과 15초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 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박선호가 바깥에 나갔을 땐 암흑이었다. 「땅!」소리를 합선 스파이크인줄 알고 지하실의 배전공이 전원을 꺼버린 것이었다. 주방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어리둥절해 있는 朴의 손에서 누군가가 권총을 빼았아 갔다. 김재규였다. 金은 다시 엉망진창이 된 만찬장으로 들어갔다. 이어서
「땅!」
5·16 당일 시청 앞 광장에서 떡 버티고 서 있었던 두 군인은 이 순간, 죽음의 길도 함께 했다. 초저녁을 뒤흔든 10월의 총성은 얼마간 더 계속됐다.

『야수의 마음으로』

= 김재규의 심리

이날 김재규(金載圭)가 취한 행동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야기 꺼리가 될 것이다. 미스터리성은 아니지만 이해가 안가는 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알아보면, 「이해가 안간다」는 것은 김재규가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걸 전제로 한 말이다. 金은 특출한 인물이 아니었고 평범한 인간이었다. 피를 보면 흥분하고, 자신의 죄과에 두려워하고, 살고싶어하고 죽기 싫어하는 보통 인간이었다. 金이 보통 인간이었다면 이날밤의 일들은 거의 이해가 된다. 金의 살의는 정승화총장의 초대를 결심했을 때부터 비롯됐지만, 만찬장의 분위기 여하에 따라선 포기할 수도 있는, 굳어지지 않은 살의였다. 김재규(金載圭)도 진술했다시피, 그 전에도 세 차례나 살해나 납치를 결심하고 권총까지 준비했는데도 『대통령의 얼굴을 대하면 마음이 약해져』그만두었던 예도 있었다. 울컥하기 쉬운 사람은 포기도 잘하는 법이다.

더구나 시해 전날까지도 김재규(金載圭)는 야당공작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었다. 살의는 순간적이었고, 사그러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만찬장의 분위기는 김재규를 집중적으로 몰아세우는 것이었다. 김재규가 7시 10분쯤 바깥으로 나왔을 때, 그의 감정은 극도로 악화돼 있었다. 박선호에게 결행준비를 지시한 이때야말로 金의 의지가 결정적으로 굳어진 시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김재규(金載圭)는 車실장과 대통령을 쏘면서도 『각하,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라고 충고하는 투의 이야기를 했고, 김계원에게도 『각하를 똑똑히 모십시오』라고 소리치고 있다. 가장 절박한 순간의 본능적 이야기가 가장 진실되다면 김재규는 끝까지 朴대통령에 대한 외경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 같다.

살해장면의 상황에선 민주주의를 위해 朴대통령을 희생시킨다는 이념이나 소신은 발견이 안 되고 車실장에 대한 원색적인 감정분출이 압도적이다. 김재규(金載圭)의 독특한 사행관으로 미뤄볼 때 그가 朴대통령을 시해할 만한 인물이었고, 총격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朴대통령이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車실장에 대한 증오심이 뇌관을 터뜨리는 구실을 하여 발작적 폭발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10·26직후 金의 직속국장급 부하들은 수사관 앞에서 金의 동기를 이렇게 추정했다.

玄○○ : 『車실장과의 의견대립으로 인한 것으로 본다. 야당관계 문제에 있어서도 車실장은 항상 강경하게 제압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정보부장 입장에서는 실패의 책임이 중정에 돌아오므로 좀더 온건하게 해야 된다는 쪽이었다. 과격한 면이 있어 순간적으로 정신이상 상태였던 것 같다. 능력에 비해 직위가 과했다. 심리적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일을 저질렀다』

金○○ :『강경만으로는 수습이 곤란하드는 자신의 판단에서 감정이 폭발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번 부마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야당을 활성화시키고, 장기집권에 대한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국회의 개편, 물가·세제·농정의 시정 등 국민의 불만요인을 해결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나 조직을 통해서 보고를 올렸는데도 관철되지 못해서 그런 일을 저지를 것 같다』

朱○○ : 『무능한 인물이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모자란 두뇌와 안목의 범위 안에서 행동에 옮긴 것이다. 미련한 사람임으로 부마사태를 명분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

미국 원격 조종설의 논리구조

김재규(金載圭)가 시해 직후 육본벙커에서 『나의 뒤에는 미국이 있다』고 했다는 풍문은 이번 취재에선 확인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장관들에게 『미국에 대해서도 보안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음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김재규를 미국에서 조종했다는 소문은 10·26직후부터 있었으나 물론 증거는 없다. 김재규(金載圭)가 朴대통령과 달리 친미적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김재규뿐 아니라 두 전임자 이후락(李厚洛) 김형욱(金炯旭)도 친미적인 부장이었다. 사석에선 습관적으로 「미국×」이라 부를 정도로 미국과 불편한 관계를 지속해 온 朴대통령 밑의 정보부장들이 대체로 친미적이었다는 것은 일단 주목할 만하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런 친미적 정보부장들의 존재가, 자주국방·핵개발·유신체제 강화 등으로 독자노선을 추구하던 朴대통령에 대해서 견제역할로서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朴대통령은 60년대부터 이후락을 가까이 부리고 있으면서도 『그 자가 CIA ××라면서?』란 가시 돋힌 말을 측근에게 한 적이 있었다.

법정에서 김재규(金載圭)는 자신의 거사를 합리화하는 자료로서 민주회복과 함께 「朴대통령의 제거에 의한 한미관계의 개선과 이로 인한 집단안보의 강화」를 꼭 들었다. 「자주국방이 이상일지는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잠꼬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10월유신으로 미국과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읍니다. 그러면 우리의 안보도 끝장입니다」(항소이유보충서). 金은 이런 한미 관계의 개선을 10·26의 필연성으로까지 꼽았다. 朴대통령 서거 이후 한미관계와 집단안보가 개선된 것도 사실이다. 金은 朴東宣사건의 본질을 朴정권의 독재에 대한 미국의 견제와 경고로 이해하여 민주화를 건의했었고, 미군의 전면철수 방침에 대한 朴대통령의 오기에 가까운 동의를 번의하도록 유도했었다고 진술했다.

이처럼 친미적인 김재규에게 미국이 정보조작으로 세뇌를 시켰다고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즉, 金에게
「朴대통령 때문에 한국의 안보가 위태롭다→미국이 朴대통령의 제거를 환영하지는 않지만 반대하지도 않는다→부마사새로 민심이 朴정권을 떠났다→따라서 대통령만 제거하면 정권은 절로 붕괴될 것이고, 미국도 새정부를 지원할 것이고, 집단안보도 강화될 것이다」
는 논리구조가 형성되게끔 김재규에게 정보공세를 폈으리라는 추리다. 이런 원격세뇌엔 증거가 남을 리도 없고 본인도 모른다는 얘기다. 이런 추리는 그야말로 기사가 아니라 첩보물의 영역일 터인데, 당시 권력 중심부에 있었던 사람 중에서도 그런 추리를 하는 이들이 많다는 계 문제라면 문제겠다.

하얀 시트에 덮여 돌아오다

= 27일 새벽 청와대

박진환(朴振煥)특보는 26일 자정께 崔광수 의전수석비서관으로부터 『빨리 청와대로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朴특보는 『나같이 별볼일 없는 사람을 왜 부를까. 혹시 방공연습인가』하고 생각하면서 청와대로 갔다. 도중에 탱크가 두 대나 보였다. 낯선 군인이 검문을 해 더욱 불안하게 생각했다. 청와대 본관으로 가니 접견실에 병풍을 치고, 책상을 갖다붙여 제단을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임방현(林芳鉉) 대변인을 찾아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각하께서 돌아가셨읍니다』
『어디서』
『궁정동에서…』
朴특보는 더 물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리는 듯했다. 金日成이 당장 우루루 밀고 내려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청와대 현관에 나서니 朴대통령의 두 딸이 옷 보따리 같은 것을 안고 말없이 서 있었다. 밤 공기는 싸늘했다. 누군가가 들것을 들고 들어 왔다. 하얀 시트로 덮여 있었다. 키가 작은 것을 보고 朴특보는 『각하다』고 생각했다. 병풍 뒤에 시신을 안치했다. 5년전 육영수(陸英修)여사의 몸이 눕혀졌던 바로 그 자리였다. 朴특보는 『이 일을 어쩌나』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새벽 3시쯤, 촌 할머니 같은 분이 달려왔다. 시신 앞에 퍼져 앉더니 『정희야! 니가 이게 우짠 일고…』하면서 통곡했다. 62년전, 며느리를 둘이나 본 44세의 어머니는 임신한 것이 창피스러워 낙태를 시킬 양으로 간장을 두 사발이나 마셨다. 그래도 배속의 생명은 끄덕없이 태어났고, 이 땅에 유사이래 최대의 변혁을 가져 온 주인공이 됐다. 조국근대화란 화려한 명제 아래에서 「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은 성취했으나 「도덕성의 황폐」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도록 한 인간 朴正熙는, 자신의 빛과 그림자를 상징하듯, 그 최후의 날에 농촌의 양광과 궁정동의 총성을 고루 경험한 뒤, 그의 분신과도 같았던 부하의 손으로 종말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10·26은 부마사태의 배신

= 에필로그

김재규(金載圭)에게 있어서 법정은 그의 마지막 무대였다. 살해에는 성공했으나 탈권에는 실패했던 그는 대역죄인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노출됐다. 그의 연기는 훌륭하였다. 『사나이로서 태어나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는 이 무대에서 명연기를 보여야 했다. 그는 10·26을 민주혁명이라 했고, 자신의 죽음의 마산 김주열군의 죽음처럼 대단한 소요사태를 야기시킬 것이라고 걱정했다. 부하들의 용서를, 朴대통령의 명복을 빌기도 했다. 눌변으로 알려진 그는 최후진술에서 「감동적인」웅변을 토로하기도 했다. 변호인에겐 『참새가 어찌 대붕의 마음을 알리요』라고 말했다.

그는 「車실장과 사이가 나빴다」는 사실과 「車에게 꿀렸다」는 사실을 잡아뗐다. 자신의 행동이 사감에 좌우된 것이 아니란 점을 보여주려는 억지였고,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집착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의연해 보이던 자세는 흐트러져 갔다. 朴대통령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가도 「역사 기록을 위해서」라며 털어놓았고, 『나의 손으로 혁명과업을 완수케 한 뒤 내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해달라』는 황당한 진술도 하게 됐다. 『나를 만약 신이라 부른다면 자유의 수호신이라 부르겠지』란 시도 지었는가 하면『나한테 물으면 부정부패의 청소를 잘 지도해 줄 터인데…』라고 아쉬워했고, 『나는 이미 성불(成佛)했다』고 말하다가도 5·17직전 학생데모가 서울을 뒤덮을 때는 생에의 희망을 보이기도 했다.

법정에서 시종일관 金을 감싸고 돌선 박선호도 옥중에선 김재규(金載圭)의 멍청한 짓을 경멸투로 이야기했으며, 朴의 세 부하들은 왜 총질을 했고, 누구를 죽였는지도 모르는 멍멍한 상황에서 교수대까지 가게 된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다. 마지막이 가까와 올수록 김재규는 깊이 불교에 빠져들었다. 사형 이틀 전 그의 아내와 처제가 면회를 갔다. 金은 읽던 금강경을 돌려주고 매만지던 염주를 아내 목에 씌어주고는 신심을 돈독히 할 것을 부탁했다. 통곡하는 아내를 한번 껴 안아주고 눈물도 안보이고 돌아선 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작별이 됐다. 집행 전날엔 예감이 있었든지, 면회 온 동생과 동서에게 갈아입을 양말·신·옷을 부탁했고 염의 절차까지도 언급했다고 한다. 김재규와 그의 부하 네명의 시신을 인수하여 검시했던 金의 동서인 의사 김봉태에 따르면 표정들이 모두 평온하더라고 한다.

남한산성공동묘지에 묻힌 김재규(金載圭)나 국립묘지에 묻힌 朴正熙나 한줌 흙으로 돌아간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金大中 전 신민당 대통령후보는 『10·26이 없었다면 10월29일엔 광주에서 터지게 되어 있었읍니다. 그렇게 되면 일사천리로 북상했을 겁니다. 김재규(金載圭)는 그 민중운동의 맥을 끊어 놓았읍니다. 그런 방법으로 민주화는 절대 안됩니다』고 말했다. 10·26과 정치인 김재규는 동기로서가 아니라 결과로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10·26은 부마사태의 연장이 아니라 그 배신이었고, 역사발전의 중단점이었다. 정치인 김재규(金載圭)도 실패했고, 역사는 그를 외면할 것이다. 다만, 인간 김재규(金載圭)에 대한 평가는 달리 나올 수 있는 바, 그것은 문학의 장르에 속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