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관의 폭발

= 16일 오전 부산대학교

경찰은 전날의 선언문 사건으로 긴장, 비상을 걸었다. 1백9명의 사복형사들을 캠퍼스내 아홉 군데에 배치했다. 도서관 앞엔 20명을 깔았다. 공소유지 물증 확보를 위해 녹음·촬영반 네 명도 투입했다. 오전 9시30분께, 603호 강의실. 경제과 2학년생 40명이 첫수업이 일찍 끝나 중간시험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 때 鄭光敏이 뒷문을 통해 뛰어 들어왔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돼 있었다. 그는 가방에서 선언문을 꺼내 책상을 돌면서 나눠주었다. 강당으로 뛰어오르더니 「여러분! 때가 왔읍니다. 모두 나갑시다」고 소리쳤다. 학생들은 한꺼번에 용수철처럼 뛰어올라 우루루 몰려나갔다. 주저하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그야말로 폭발이었다. 유신정권이 7년간 강요했던 억지, 79년에 연쇄적으로 일어났던 사건들이 이湧?가슴에 분노라는 인화물질을 차곡차곡 쌓았고, 鄭光敏이 거기에 성냥불을 그어댄 것이었다.

경제과 2학년생들은 뇌관이었다. 유신선포 7주년을 하루 앞두고 터진 이 뇌관은 부산대학생 전체를 폭발시키고, 동아대학생과 부산시민들까지도 끌어들여 불태운 뒤 마산으로 불똥을 튀기고 종국에는 유신정권의 뿌리를 뽑아버리는 연쇄반응으로 치닫게 된다. 이 연쇄폭발의 시발은 「욱!」하는 정의감의 단순한 집단 표출이었다. 朴대통령은 죽기 직전까지도 이 부산사태의 원인을 「신민당의 조종」으로 오해하고 있었으니 여기에서 유신체제의 비극을 본다. 그 방대한 정보조직도 사태의 진상을 통치자에게 올바로 인식시키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40여명의 경제과 2학년생들이 도서관 앞에 도착했을 땐 데모대가 어느새 3백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鄭光敏은 선언문 뒷면에 「자유」라고 써 갈겨 그것을 두 손 높이 쳐들고 대열을 선도했다. 부산사태의 주제가가된 「우리의 소원은 자유…」를 부르면서 데모대가 도서관 앞에 당도하자 안에서 공부하건 학생들이 쏟아져 나와 합류하기 시작했다. 朴기채 총장이 교수들을 이끌고 달려와 말리기 시작했다. 데모대는 성탄절의 성가대처럼 「선구자」, 교가, 「봉선화」등을 불러댔다.

경찰개입이 휘발유 부은 격

이때 경제과 2년 金창수는 힘차게 시작됐던 데모가 노래만 부르고 끝날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지휘자가 나서지 않아 시위는 모멘팀을 잃고 있었다. 사그러지는 것 같은 불기에 휘발유를 끼얹은 것은 경찰이었다. 도서관 앞에 배치됐던 李성희, 金성수 두 형사는 鄭光敏이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 데모합세를 선동하고 잔디밭으로 나설 때를 기다렸다가 돌진했다. 李형사가 鄭군의 멱살을 잡는 순간, 학생들이 에워쌌다. 주먹과 발길이 날아왔다. 만년필 같이 뾰족한 쇠붙이가 李형사의 손바닥을 그었다. 두 형사는 뭇매를 피해 후퇴하다가 3m 언덕 아래고 굴러 떨어졌다. 형사들의 기습을 도서관에서 방관하던 학생들을 데모대열로 끌러들이는 자극제가 됐다. 갑자기 천여 명으로 불어난 데모대는 다섯 줄의 어깨동무 대열을 만들더니 뛰기 시작했다. 신관을 한 바퀴 돌고 운동장으로 쏟아져 내려갔을 땐 2천 명쯤으로 불었다. 데모대는 굳게 닫힌 신정문을 향해 달렸다. 그 바깥에는 동래경찰서 진압부대 약 6백 명이 포지하고 있었다.

오전 10시25분께, 서장은 진압부대의 캠퍼스 진입을 명령했다. 정부의 데모진압 제 1원칙은 발생단계에서 신속히 분쇄한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블랙 마리아」라고 부르는 검은 짚차가 페퍼포그를 뿌리면서 부대의 선봉을 섰다. 청명한 가을하늘, 단풍 무르익은 금정산 아래에서 캠퍼스는 최루가스 연기와 투석과 폭음과 함성의 도가니로 변했다. 「블랙 마리아」는 운동장에서 달아나는 학생들을 집요하게 뒤쫓았다. 「저러다가는 깔아 죽이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스탠드 바로 밑에까지 달려왔다. 경찰진입은 두번째의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그때까지 수업을 받고 있던 온건한 학생들도 바깥으로 뛰쳐나와 데모대에 합류했다. 캠퍼스가 최루가스로 뒤덮이자 「이럴 수가…」하면서 시위대열로 끼어 든 것이었다.

진압부대가 데모대를 흩어놓고 정문 바깥으로 물려나자 다시 모인 데모대는 5천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5천 명의 학생들과 6백 명의 경찰은 정문을 사이에 두고 엎치락뒤치락 공방전을 펼쳤다. 학생 수백 명은 담벼락을 무너뜨린 뒤 인근 주택가로 뛰어나왔다. 다시 진압부대가 캠퍼스로 들어와 대열을 흩어놓고 물러나면 학생들은 또 모이고…. 정오 무렵 朴기채 총장은 스탠드 본부석에서 마이크를 잡고, 운동장을 맴돌고 있는 데모대를 향해 해산을 호소한 뒤 총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다른 교수들도 데모저지를 포기하고 점심을 먹으로 하나 둘씩 사라졌다. 학생들도 언제까지나 교내 시위만 할 필요가 없게 됐다. 이때 누군가가 아스팔트 보도 위에 백묵으로 「부산 역으로!」라고 썼다. 『오후 2시에 모이자』는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날 데모의 특징은 지휘자가 없는 데도 모든 것이 자연발생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강력한 자발성과 의지로 가능했다. 이점을 무시한 경찰은 데모가 조직적으로 진행되는 걸 보고 배후에 불순세력이 있다는 오판을 했다. 이때쯤 유일한 주모자 鄭光敏은 친구들의 권유로 캠퍼스 뒷담을 넘어 피신 길에 올라 있었다. 오후 1시께부터 학생들은 가방을 들고 캠퍼스를 떠나기 시작했다. 1시간 전까지만 해도 학생들의 진출을 최루탄으로 막았던 경찰은 『이젠 집으로 간다』면서 정문을 나서는 학생들을 강권으로 막을 구실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학생들은 금방 물결처럼 캠퍼스를 빠져나가 교정은 썰렁해지면서 평온을 되찾았다.

불길한 예감, 문교장관 하부(下釜)

= 16일 오후 서울 중앙청

신민당 金泳三총재가 부산에서 걸려온 전화로 부산사태를 안 것은 이날 오후였다. 상도동 집에서 UPI 도오꾜지국장과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자신의 선거구에서 일어난 이번 사태가 『간단하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는 예감이 들더라고 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부산데모」를 UPI기자에게 알려, 이 기자는 특종을 했다. 부산출신인 朴찬현문교부장관은 金총재보다 더 빨리 데모보고를 부산대학교로부터 받았다. 朴장관은 일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몇달 전 친구인 朴기채 고려대 교수를 부산대 총장으로 임명케 했었다. 朴장관은 보고를 받자마자 김포공항으로 달려갔다.

잔뜩 긴장되어 있는 시국에 하필 부산에서 일이 터졌다는 것이 불길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친구가 수습을 잘 해야 할텐데 하는 걱정도 생겨 현장으로 내려간 것이었다. 그가 부산대학교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 데모는 이미 끝나 캠퍼스는 조용했다. 제헌국회의원 출신에다가 대사, 신문사사장 경력도 가진 朴장관은 강당에 전체 교수들을 불러모아 열변을 토했다. 『여러분, 학생들로부터 어용교수란 소리 듣기를 두려워하십니까. 우리는 자랑스런 어용이 돼야 하겠읍니다』

연설을 끝낸 뒤 朴장관은 총장과 함께 숙소인 해운대 동백섬의 조선비치호텔로 갔다. 두 사람은 저녁까지 같이 있었다. 『시내 한복판에서 야간데모가 터져 경찰차에 불을 지르고 야단이다』는 급보가 호텔로 들어온 것은 밤 8시께 였다. 경악한 朴장관은 비서를 데리고 택시를 이용, 광복동으로 달려갔다. 구자춘(具滋春)내무장관은 오전의 경찰보고를 접하고 신속하게 대응했다. 金泳三총재의 근거지인 부산에서 그것도 평소엔 가장 얌전한 학교로 꼽히던 부산대학교에서 데모가 났다는 것이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具장관은 송재근(宋齊根)치안본부 제2부장을 불러 『즉시 부산으로 내려가 시위에 대처하라』고 지시했다. 宋치안감은 육사8기 출신으로서 치안국 정보, 작전과장을 지냈다. 데모 진압에는 권위자로 알려져 있었다. 具장관은 이날 「남민전(南民戰)」에 대한 추가수사결과를 발표, 이 조직은 북괴와 관련있는 간첩단이라고 밝혔다.

「80년대를 위한 유신체제」강연

= 16일 서울 국회

이날 오전 국회 본회의는 휴회기간중에 사망한 고 김성환(金聖煥)의원에 대한 묵념을 올리고 의원직을 승계한 고귀남(高貴男)의원의 선서를 듣고 5분만에 끝났다. 金泳三총재 제명 이후 처음 모인 여당의원들은 텅 빈 야당의석을 의식해서인지 좌석에 앉아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는 등 본회의장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朴浚圭 공화당의장서리는 기자들과 만나 신민당의원들의 의원직 사퇴문제에 대해 『야당의원들이 자살한다고 해도 곡할 사람들이 있는 줄 아느냐』고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정회는 이날 유신7주년 기념 강연회를 세종문회회관에서 가졌다. 「80년대를 위한 유신체제라는」강연에서 유정회 갈봉근(葛奉根)의원은 『유신체제의 궁극적 과제는 안정 속의 번영에 있는것이며, 이는 구민총화와 능률의 극대화 없이는 이룩될 수 없다』고 전제, 『이런 뜻에서도 국민총화를 깨뜨리는 요인은 그 구실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국가적 차원에서 용납될 수 없다』고 말했다.

유정회 사무실에 부산사태의 정보보고가 들어온 것은 이날 오후 3시께였다. 太完善의장등 당직자들은 그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후 5시쯤 청와대 金桂元 비서실장이 太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일 저녁 6시부터 청와대 영빈관에서 유신선포 기념일 만찬이 있으니 유정회 의원들은 모두 참석하라』고 덧붙였다. 太의장은 『부산에서 저런 일도 났는데 악단과 가수까지 부르는 것은 뭣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金실장은 『나도 그런 생각이 드는데, 사태 발생 전에 각하께서 잡아놓으신 스케줄이다』면서 『조정하는 방향으로 노력해보겠다』고 했다. 옆에 있던 모 유정회 의원은 『李厚洛실장 같았으면 각하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조정했을텐데…』라고 혀를 끌끌 찼다. 이날 오후 6시30분 싱가포르의 李光?수상 내외가 6일간의 공식방문을 위해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崔圭夏총리, 朴東鎭외무부장관이 영접했다. 朴장관은 그 보름 전에 UN총회 참석을 위해 미국에 갔다가 밴스 미국무장관등을 만나 한국사태에 대한 우려를 듣고는 朴대통령에게 金泳三총재의 제명을 제고해달라는 전문을 쳤었다.

경찰이 광복동으로 몰아붙여

= 16일 오후 부산 서면

경찰은 부산대 학생들이 학교 문을 나와 시내버스를 타고 중심부로 몰려가는 것을 막아보려 했다. 자동차로 시내버스를 뒤쫓았다. 학생들은 승강구 문을 걸어 잠그게 했다. 그리곤 정류소에 멈추지 말고 시내 쪽으로 계속 달리도록 운전사에게 부탁했다. 경찰차가 뒤따라오자 『기사아저씨, 자동차경주엔 이겨야 해요』라고 응원을 보냈다. 멋모르고 신바람이 남 시내버스 운전사는 차를 내쳐 몰았다. 경찰은 서면 로터리에서 학생들이 탄 시내버스를 검문하여 그들을 끌어내리려 했다. 몇 번 이 짓을 해보고 경찰은 손을 들어버렸다. 서면 로터리는 하루에 10만대의 차들이 오가는 부산에서 가장 번잡한 교통중심지다. 이곳에서 시내버스를 모두 세운다면 시내교통은 마비될 터였다.

학생들이 부산역에 모인다는 정보에 따라 부산시경은 역 광장과 지하도 주변에 미리 병력을 깔았다. 맨 처음 버스에서 내린 수십 명의 학생은 몽땅 붇들려 갔다. 경찰은 학생들을 가득 태운 시내버스가 부산역 지하도 근방 정류소에 잇달아 닿자 승강구 문을 열지 못하게 하고 광복동쪽으로 계속 가도록 했다. 학생들의 집결지 목표는 타의에 의해서 시청부근으로 바뀐 것이었다. 이것도 10·16사태를 폭발시킨 많은 우연들 가운데 하나였다. 광복동·남포동 거리가 부산역보다 월씬 좋은 데모환경을 갖추고 있음은 몇 시간 안 돼 밝혀질 것이었다. 역사의 손길은 경찰을 통해서 유신정권의 목을 죄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화약 지고 불속으로

= 16일 오후 부산 광복동

광복동 일대는 데모대에겐 천국, 경찰에겐 지옥이었다. 데모대에겐 들판, 경찰에겐 미로였다. 데모대에겐 피신처, 경찰에겐 벽이 됐다. 상가와 사무실 및 유흥·숙박업소 건물들 사이로 사통팔달의 길들이 바둑판처럼 얽히고 설킨 이곳은 데모대에게 이상적인 집결처와 탈출구를 제공했다. 6백50m의 광복동 거리를 하루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30만 명쯤, 길이 5백m가량의 남포동 거리의 하루 통행인구는 50만 명쯤. 야간엔 20∼30대의 혈기왕성한 젊은이가 주류다. 이런 인파의 바다에 학생이 뛰어들었던 것이다. 수많은 인파는 언제나 데모대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경찰은 일반시민과 데모대를 구별하기가 어렵게 됐다. 차도로 나오면 데모대고 인도로 피하면 선량한 시민이었다. 이곳은 또 불쏘시개였다. 학생들이 불씨를 안고 뛰어들 때 확 번질 수 있을 만큼 이곳 사람들의 마음은 바싹 말라 있었다.

광복동 일대가 그 중심인 부산시 중구 주민들의 1인당 세금부담액은 79년엔 27만6천원이었다. 이것은 부산시민 평균의 네 곱, 서울시민 평균의 두 곱쯤이었다. 이런 무거운 세금에 불만을 갖지 않는 상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 불만은 부가가치세 실시 뒤엔 더욱 심해졌다. 이곳에서 자리를 뜨는 상인들의 거의 전부가 무거운 세금에 견딜 수 없어서라고 푸념했다. 2차 석유파동이 닥친 79년의 경기침체의 한복판에서 당시는 또 부가가치세 확정신고 마감(10월25일)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세금에 대한 불만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몰리는 입장에 선 경찰

16일 오후 광복동 일대는 학생들로 뒤덮였다. 부산대학생 이외에도 고신대 등 타 대학생들도 모여들었다. 잠시 태풍전야와 같은 정적이 흘렀다. 그것은 무엇을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부산데모엔 주동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단계의 행동이 시작되기 직전엔 꼭 이런 기다림의 시간이 있어야 했다. 이것은 자연발화를 예비하는 시간이었다. 이 팽팽한 공기에 불씨를 던진 것은 미화당 백화점 앞에 있던 학생들이었다. 오후 3시께 상대생과 공대생 열 명이 「가자!」라고 부르짖으며 어깨동무를 했다. 그리곤 국제시장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풍선에 구멍이 뚫리듯 학생들의 에너지는 이제 출구를 찾은 것이었다.

『유신철폐!』 일반 시민들은 듣기조차 두려운 구호가 튀어나왔다.
『잘한다!』는 함성이 시민들 속에서 터져나왔다.
고층 사무실과 다방에선 시민들이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박수를 보냈다. 성미 급한 어느 시민은 담배개비를 밑으로 확 뿌렸다. 유신시대에서 일반 시민이 명시적으로 학생들을 응원한 것은 이게 처음이었고, 이것이 부산사태의 심각성을 결정해 버렸다. 동아데파트 앞에선 네줄의 어깨동무대열이 만들어지더니 국제시장쪽으로 몰려갔다. 15분 뒤엔 창선파출소 앞에 1천 명가량의 학생들이 구름처럼 밀려들어 스크럼을 짰다. 이들은 미국 문화원 쪽으로 질주했다.

한번 당겨진 불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학생들은 불티를 사방에 흩어놓았다. 경찰은 데모대를 뒤쫓았다. 학생들이 요리조리 골목을 빠져나가면 그 꼬리엔 경찰이 물려 다녔다. 경찰도 데모에 합세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한 경찰관은 가스분사기를 지고 숨을 헉헉거리며 데모대를 뒤쫓다가, 고층 건물에서 내려다보면서 학생들을 응원하는 시민들을 발견하자 신경질이 난 듯 최루가스를 위로 쏘아 올렸다. 그 경찰관을 향해 욕설과 야유가 사방건물에서 쏟아져 나왔다. 몰리는 쪽은 이젠 학생이 아니었다. 한 경찰간부는 뒤에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죄짓는 기분이 들었어요. 시민들까지 학생 편을 드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무슨 잘못된 짓인 것 같은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소수인 경찰입니다. 경찰에게 쏟아지는 야유와 욕지거리, 앞뒤에서, 양쪽에서, 그리고 윗 쪽에서 소나기처럼 퍼붓고 있었으니까 무력감과 함께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이래서 진압작전을 과감하게 수행할 수 없었어요. 시민들이 무슨 감시자처럼 지켜서 구경하는데 학생들을 마구 다룰 수도 없었고요』

시민, 응원에서 가세로

『독재 타도!』 이 구호가 처음으로 외쳐진 것은 하오 3시30분쯤 새부산예식장 앞길에서였다. 이때까지 학생들이 가장 많이 부르짖은 구호는 『유신철폐』『언론자유』였다. 이 구호의 호소력은 「독재 타도!」에 비할 바 못됐다. 구호의 성격이 「건의」에서 「도전」으로 바뀐 것이었다. 많은 부산시민들은 이 구호를 4·19이후 처음 들었다. 혼자서도 입에 담기조차 두려웠던 「독재타도!」를 수천 명이 합창하고 있었다. 그 구호는 시민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유신이란 껍질을 부수어가는 햄머소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경제과 2년 呂성모가 낀 데모대는 국제시장골목에서 경찰의 협공을 받았다. 학생들은 길 양쪽 점포로 뛰어들었다. 엎치락 뒤치락 진열장이 부서지고 걸어둔 옷들이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그러나 상인들은 학생들을 모두 받아주었다. 그리곤 셔터를 내려버렸다. 경찰은 벽으로 변한 상가 앞에서 계면쩍게 서 있다가 돌아갔다. 고신대 교육학과 학생 일곱 명은 데모대를 쫓아다니다가 배가 고파왔다. 남포동의 어느 식당에 들어가 우동 한 그릇씩을 먹고 돈을 내니 주인이 한사코 받질 않았다. 한 손님은 담배 한 갑씩을 사 가지고 와 나눠주기도 했다. 시민들이 청량음료와 맥주를 상자째 사주는 것은 흔한 장면이 됐다. 한 여대생은 약방에 드링크류를 사먹으러 갔다가 땀 투성이가 된 전투복 차림의 경찰관과 맞닥뜨렸다. 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자네도 수고하네』 그때까지만 해도 경찰과 학생들 사이엔 큰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학생들도 돌이나 병을 던지질 않았고 경찰관들도 도가 지나치는 구타는 하지 않고 있었다.

「감동의 전율」로 부른 애국가

어둑해지고 있을 무렵 부영극장 앞에서 국기하강식의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학생들은 잠시 데모를 멈추고 목이 터져라 애국가를 불렀다. 모두가 일찌기 불러 본 적이 없는 그런 애국가를 불렀다. 절로 눈물을 흘리는 학생들도 많았다 애국가는 부영극장에서 시작하여 남포동으로, 광복동으로 퍼져갔다. 지나가던 시민들도 멈춰서 이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으려 했다. 애국가 뒤엔 부산대학교가를 불렀다. 학생들에게 이 노래는 애국가보다도 더한 감동을 주었다. 특히 『…학문의 자유, 이것이 우리들의 부산대학교』란 대목에선 온몸이 찌릿하게 울리더란 학생들이 많았다. 부산대학을 졸업한 시민들도 귀에 익은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기도 했다. 한 목소리로 부른 애국가와 교가는 그때까지 사방으로 흩어져 뛰었던 데모대의 의지를 재확인하고 그 열기를 한곳에 모으는 기능을 했다. 노래로 서로를 점호한 셈이었다. 애국가와 교가를 부름으로써 동지의식을 확인한 학생들은 모두가 친구처럼 되었다.

고신대 여학생은 부산대학 남학생과 손잡고 뛰었다. 쉴 때는 경찰의 눈을 속이기 위해 데이트하는 것처럼 팔짱을 기고 노점에서 「또뽑기」를 사먹기도 했다. 이걸 「데모미팅」이라 이름붙였다. 학교, 고향, 안면, 성별의 차이가 주는 어색함과 머뭇거림이 사라지고 있었다. 낯선 젊은이들은 한데 어울려 뛰었고 함께 두들겨 맞았으며 눈물을 흘렸고 재채기를 했다. 고신대의 여학생은 이름도 모르는 부산대학교 남학생들이 경찰에 끌려가는 것을 보고 대로변에서 엉엉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들은 심각하지 않았고 유쾌해 보였다. 한덩어리였기에 모두가 평소 혼자서는 상상도 못했던 용기를 보여주었다. 집단 히로이즘의 현장이었다. 젊은이들의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풀린 듯했다. 많은 취재기자들은 뒤에 그때의 분위기를 「축제」라고 표현했다.

불타는 작전차

밤이 되자 데모는 유리병과 돌멩이, 몽둥이와 각목이 난비하는 거친 분위기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젠 학생들만의 데모가 아니었다. 부산대 이외의 다른 대학생, 재수생, 고등학생, 식당종업원, 무직자들도 끼여들었다. 일반 시민들도 대거 합세했다. 경찰도 가혹하게 대응하기 시작했다. 머리 수와 여론에 몰린 그들은 진압책보다는 자위책에 급급했다. 공사장의 자갈과 각목은 데모대의 무기로 활용됐다. 일부 데모대는 가로수의 버팀목을 뽑아 경찰의 몽둥이에 대항했다. 학생들을 잡아가는 경찰관들에게 고층 건물에서 연탄재를 집어 던지기도 했다. 8시40분쯤 부산진 경찰서 병력은 중앙동에 있다가 부영극장 앞으로 옮기라는 명령을 받았다. 서장 安연세총경의 지휘로 1백명쯤 되는 병력은 기동순찰차, 작전차 두 대, 서장차를 앞세우고 남포동 지하도 쪽으로 간선도를 따라 나아갔다. 그때는 남포동 지하도 근방의 데모대가 남포파출소 습격을 끝낸 바로 뒤였다. 5백 가량의 군중은 유리병과 벽돌과 돌멩이를 20평짜리 파출소에 퍼부어 박살을 냈었다.

이 군중들은 남포동 골목으로 일단 후퇴해 있었다. 이때 맨 앞에 선 기동순찰차(포니)와 작전차가 교통체증을 일으킨 일반 차량들 사이에 끼여버려 오도가도 못하게 됐다. 작전차에 탔던 경찰관들은 뛰어내려 차를 둘러싸고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군중들은 이 기회를 놓칠쎄라 돌멩이와 유리병으로 집중포격을 가한 뒤 각목을 휘두르며 경찰을 향해 우루루 몰려왔다. 서장차가 맨 먼저 달아났다. 기동순찰자 운전사는 미처 탈출하지 못한 상태에서 습격을 받았다. 데모대는 유리창을 박살내고 각목을 쑤셔 넣어 운전사를 마구 찔러댔다. 다른 무리는 순찰차를 뒤엎으려고 꽁무니를 덜썩덜썩 들었다가 놓았다가 했다. 운전사는 차가 기우뚱할 때 튀어나와 남포파출소 쪽으로 달아났다. 길을 건너 뒤돌아보니 군중이 순찰차를 모로 세우는 게 보였다. 이 모롤 세워진 순찰차 기름통에서 휘발유가 새나왔다. 데모군중 속의 누군가가 성냥불을 당겼다. 「펑!」폭음과 함께 부산1가 1163호 포니는 불길에 휩싸였다.

『정말 살려주시겠읍니까!』

경비과장 李무영 경정은 이 불길이 바로 뒤에 붙은 작전차 두 대에 옮겨붙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간부후보생출신인 35세의 젊은 경정은 부하 30명을 돌아보며 『나를 따르라!』고 외친 뒤 작전차를 향해 뛰어갔다. 한 사람도 그를 따르지 않았다. 李경정은 작전차 운전석으로 올라갔다. 손잡이가 뜨끈뜨끈했다. 차를 뒤로 빼려 했으나 고장이 났는지 말을 듣지 않았다. 이때 군중이 작전차로 몰려 차위로 기어올라왔다. 李무영은 운전석에 갇혀버렸다. 데모대는 차 위에서 쿵쿵 발을 굴러댔다. 각목으로 운전석 뒷유리창을 깨고 李경정을 겨냥하여 들쑤셔댔다. 李경정은 운전석 양쪽 문을 걸어 잠그고 뒤통수를 감싸고 쪼그려 앉았다. 그는 이제 죽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죽다니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러면서 자기를 뒤따르지 않았던 부하들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경찰관으로서 국가재산을 보호하다가 죽는 것이니 부끄럽지는 않다는 자부심이 들기도 했다. 데모군중은 작전차를 뒤집어 엎을 모양이었다. 꽁무니를 들었다가 놓았다가 했다. 이때 누군가가 운전석 옆창문을 두드렸다. 한 마흔살 된 것 같은 사람이 외치고 있었다.
『내가 책임질 테니 나오시오!』
『정말 나를 살려주시겠읍니따?』
『안심하고 빨리 나와요! 차가 넘어갑니다』
李경정은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그 40대 남자는 李경정을 품으로 안다시피하여 골목 구석으로 끌고 갔다. 그러면서 모자와 웃옷을 벗겼다. 러닝셔츠 바람이 된 李경정은 고맙다는 말만 남기고 길 건너편으로 뛰었다. 「펑!」작전차에서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을 어깨너머로 쳐다보몀 그는 아찔했다.

『정지하면 당한다』

부산진경찰서 소속 부산7가 1335호 작전차에서 불길이 치솟았을 때 본 기자는 그곳에서 1백미터쯤 떨어진 부영극장 앞 육교 밑에 있었다. 폭음과 함께 치솟은 불길은 30m쯤 올라갔다. 사방이 환해졌다. 이어서 MPG최루탄의 폭음이 빵 빵 울려왔다. 「우―」데모군중이 몰려가는 소리,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 비명, 폭음, 불길이 한데 어울려 한 폭 기록화와 같은 장면이 기기에 그려지고 있었다. 암흑의 도심거리에서 치솟은 불길은 극적인 효과를 몰고 왔다. 그것은 불과 몇 시간 전에만 해도 도저히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됐던 사태였다. 캠퍼스 안에서 도심지로, 낮에서 밤으로, 시민의 합세, 투석, 방화… 모두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사태진전이었다. 4·19를 취재한 경험이 있는 한 고참기자는 옆에서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하다. 적어도 내일은 위수령이다』고 말했다. 소방차가 오기까지 작전차는 시커먼 연기와 불꽃을 내뿜으며 한 30분을 탔다. 이 불길이 데모대에 끼친 심리적 횸과는 큰 것이었다. 사람들은 두려움을 잊게 됐다. 조금은 신들린 듯한 기분에 휩싸였고 난폭해졌다.

데모대는 공격해오는 경찰과 맞붙으려고 하지 않았다. 페퍼포그와 최루탄과 곤봉세례를 이길 수 있는 무기를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경찰이 공격하면 그들은 거의 틀림없이 달아났다. 앞장선 대열이 되돌아서서 도망쳐오면 뒷 대열은 경찰을 보지도 않고 함께 달아났다. 시위군중 편에 서 있으면 경찰이 군중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진다. 경찰은 그러나 시위군중의 엄청난 숫자에 질려버렸다. 시위군중이 가장 겁낸 것은 가스 짚차였다. 이 차의 운전사 朴모 순경은 말했다.

『유리병과 각목을 휘두르는 군중을 향해 나갈 때는 내 정신이 아니었읍니다. 다리가 덜덜 떨리고 속옷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더군요 시위군중이 몰려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가스를 확 뿜습니다. 시야를 가린 흰 연기가 걷힐 때 앞을 보면 군중이 몰려오던 그 자리가 갑자기 훤하게 트인 것을 발견합니다. 무엇이 싹 쓸어간 자리 같이 말입니다. 그래도 또 그 빈 자리를 메우며 그들이 몰려올 땐 정말 겁이 납니다』 데모군중의 밥은 멈춰 있는 것들이었다. 파출소, 세무서, 신문사, 다른 차들 사이에 꼭 끼여 오도가도 못하는 경찰차, 포진한 부대, 대열에서 처진 경찰관들이 군중의 공격 표적이 됐다. 경찰이 당하지 않으려면 계속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데모대와의 술래잡기라는 끝없는 수렁에 빠지는 것을 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