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金載圭)와 차지철(車智澈)의 암투

한국을 뒤흔든 격동의 10일간 1편 - 부마사태(釜馬事態)를 중심으로 한 두 권력자(權力者)의 파워게임.

청와대 영빈관에서 유신 선포 기념일 만찬회가 무르익어 갈 때 부산에선 파출소와 경찰차가 화염에 휩싸이고 있었다. 3시간 뒤 내려진 비상계엄령은 유신정권 붕괴의 서막이었다. 격동의 정국, 그 뒷무대에선 김재규와 차지철의 파워 게임이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었다.

<1985년 5월 월간조선>

그때 그 사람이 「만약에…」

1979년 10월 26일밤 8시 15분께 김치열(金致烈)법무장권은 청와대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김계원(金桂元)비서실장이었다. 즉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말투는 다급했다. 金致烈장관은 「정보부장 임명통보」라고 짐작했다. 청와대로 가는 차 중에서 金장관은 골똘히 생각했다. 강경일변도인 車智澈 경호실장과의 마찰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맡은 일은 철두철미하게 파악하고 수행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성격상 고질적인 불면증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金장관은 『남아답지 못하다』는 핀잔을 듣지 않고 정보부장 자리를 고사하는 길이 없을까 하고 고민했다.

그 나흘 전인 10월 22일 金장관은 朴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에 들어갔다. 단 둘이서 장시간 부마사태 등 시국문제를 이야기했다. 며칠 두에 두번째의 단독 면담을 했다. 두 차례의 면담에서 金장관은 난국을 타개하는 근본적인 대책으로서 유신헌법의 개정을 건의했다. 개헌의 골자는 유정희 제도를 없애고 통대에 의한 대통령 간선제를 바꾸자는 것이었다. 朴대통령은 『나도 같은 의견이다』는 태도를 보였다. 金장관은 『개헌문제를 연구해보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첫날 면담 도중 朴대통령은 『정보부에서 몇년 근무했지』하고 물었다. 金장관은 1970∼73년 사이 金桂元·李厚洛부장 아래에서 차장으?일한 적이 있었다. 朴대통령의 물음에서 金장관은 대통령의 보다 깊은 의중을 읽었던 것 같다.

朴대통령과 金장관의 면담직후 권력층 주변에선 「후임 정보부장에 金致烈」이란 얘기가 돌았다. 金致烈장관은 朴대통령에게 직언을 설득력 있게 잘하고 대통령의 신임 또한 두터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신민당이 득표율에서 공화당을 1.1% 앞섰던 78년 12월12일의 총선은 「역사상 가장 깨끗했던 국회의원 선거」로 평가되기도 한다.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金致烈은 『정치 민주화는 조국선진화의 요체이며, 이를 위해선 관권선거의 전통을 이 기회에 끊어야 한다』고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정보부에서도 『유정희가 있는데 굳이 부정선거를 할 필요가 없다』고 건의, 이 총선에서 행정기관은 공화당 의원들이 매정하게 생각할 정도로 중립을 지켰다.

金장관은 신민당 金泳三총재 제명직적엔 「강경책이 백약지장(百藥之長)이라면 팔게비나 소모사의 말로가 왜 그렇게 되었겠읍니까」라는 일종의 「상소문」을 개인적으로 朴대통령에게 올린 적도 있었다. 그는 열흘 전의 임시 국무회의에선 부산지역에 대한 비상계엄령선포에도 반대했었다. 이러한 金장관에게 朴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맡기기로 결심했다면 그것은 정국의 근본적인 전환뿐만 아니라 유신체제의 진로에 대한 재검토를 뜻하는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金致烈장관이 8시40분께 청와대에 도착했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소식은 정보부장 발령이 아니라 「대통령의 죽음」이었다.

유신붕괴의 현장검증

金致烈장관이 청와대에 도착하기 약 1시간 전, 궁정동 정보부장 관사 나동의 「대행사」만찬자리에서 오갔던 대화들은, 당시 생존자들(金載圭·金桂元·두 여인)의 법정증언을 종합할 때, 대강 이러했다.

朴正熙 : 신민당 공작은 어떻소?
金載圭 : 공화당이 발표한 때문에 다 틀렸읍니다. 사표(편집자주 : 당직자 사표)를 내겠다고 한 친구들도 다 강경으로 돌아섰읍니다. 암만해도 당분간 鄭대행 출범이 어렵겠읍니다. 주류들이 강경해져서 다소 시끄럽겠읍니다.
朴正熙 : (공화당 간부들이 못마땅하다는 말을 함).
車智澈 : 새끼들 까불면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간에 전차로 싹 깔아 뭉개버리겠읍니다.
金載圭 : (속으로 『자식 여전히 지랄이구나』고 생각).
朴正熙 : 부산사태는 신민당이 개입해서 하는 일인데 괜히들 놀라가지고 야단이야. 오는 삼고천 행사에 가 보았더니 대다수 국민들은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부산 데모만 하더라도 식당 보이나 똘만들이 많지 않아. 그놈들이 어떻게 국회의원의 사표를 선별 수리하느니 뭐니 알겠는가. 신민당이 계획한 일인데도 괜히 개각이니, 뭐니, 국회의장을 사퇴시켜야 한다느니 하면서… 중앙정보부는 수고는 많이 하는 줄 알지만 더 정확한 정보를 수집해야겠어.

(金載圭가 이처럼 몰리는 분위기가 계속되다가 7시30분부터 동석한 沈모 여가수의 노랙 시작돼 분위기가 풀어졌다. 가수는 「그때 그 사람」「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른 뒤 車智澈을 지명했다. 車는 「도라지」와 「나그네 설움」을 불렀다. 이어서 패션 모델인 申모 양이 기타 반주에 맞춰 「사랑해 당신을」을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도중 金載圭는 바깥에 나갔다가 금방 돌아왔다. 金이 앉자 이야기는 다시 정치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朴正熙 : 미국의 브라운 장관이 오기전에 金泳三이를 구속, 기소하라고 했는데 유혁인(柳赫仁)이가 말려서 취소했더니 역시 좋지 않아. 국방장관 회의고 뭐고 몰것 없이 법대로 하는데 뭐가 잘못이란 말이야. 미국×은 범법해도 처벌 안 하나.
金載圭 : 金泳三은 사법조치는 아니지만 이미 국회에서 제명이 된 걸로 국민들이 처벌했다고 봅니다. 같은 것으로 두번 처벌하는 인상을 줍니다.
朴正熙 : 중앙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 당신네는(신민당 의원) 비행조사서만 움켜쥐고 있으면 무엇 하나. 딱딱 입건해야지.
金載圭 : 알겠읍니다. 정치는 대국적으로 상대방에게도 구실을 주고 국회에 나오라고 해야지 그러지 않고서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車智澈 : 신민당 놈들 그만두고 싶은 놈은 한 놈도 없읍니다. 언론을 타고 반정부적인 놈들과 선동에서 그러는 거지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그 자식들, 신민당이고 뭐고 나오면 전차로 싹 깔아뭉개겠어요.
金載圭 : (오른쪽에 앉아 있던 金桂元을 오른손으로 툭 치면서) 각하를 똑 바로 모십시오. (車실장을 쳐다보며) 각하, 이 따위 버러지 같은 자식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읍니까(탕, 권총 한 발 발사).
車智澈 : 金부장, 왜이래, 왜이래.
金桂元 : 무슨 짓들이야!
金載圭 : (朴대통령 향해서 또 한발 발사).

10·16과 10·26을 이은 金載圭

어떤 사건의 범인이나 사고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선 현장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다 「수사의 보고」라는 현장에는 물증, 암시, 실마리가 숨어있는 법이다. 「유신정권의 붕괴」라는 역사적 대사건의 현장은 궁정동의 술자리였다. 여기 모인 네 사람은 그 정권의 핵이었다. 정당이나 행정 및 치안기관은 이 네 사람의 도구에 불과했다. 그래서인지 대화에는 「공작」「전차」등 군사용어가 더러 나온다. 그들이 정치를 타협이나 대화가 아니라 공작으로 생각하고 있음도 잘 드러나 있다. 부마사태, 金泳三 제명, 신민당 당직사퇴공작, 선별수리 등등 유신정권을 괴롭혀 그 종말을 재촉하던 10월의 고민거리들도 모두 거론되고 있다. 부마사태의 원인에 대해 朴대통령이 「신민당의 조종」이란 잘못된 정보를 믿고 있었다는 사실도 나타나고 있다. 유신정권의 두 수문장, 金載圭와 車智澈의 갈등, 강경과 온건의 대립도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대통령이 무심코 내뱉은 「미국×」이란 말에서는 그의 뿌리깊은 반감이 엿보인다. 「공작」「잡아넣는다」「깔아뭉갱다」「버러지같은 놈」등등 살벌한 낱말에서는 도덕성의 위기를 본다.

유신정권의 권력구조, 그 핵심부의 논리와 윤리 및 취약점이 종말의 현장에서 하나의 축도로 집약돼 있는 것이다. 정치의 화산맥은 78년 12월 총선에서의 신민당 1.1% 승리에서 비롯되어 79년에 접어들면 백두진(白斗鎭)파동,金泳三총재 당선-YH사건-金총재 직무정지가처분 사건으로 이어지고, 10월에 들어서면 金총재 제명-신민당의원 총사퇴서 제출-선별수리론으로 줄달음치다가 부마사태란 1차 폭발을 거쳐 10·26이란 대폭발을 터뜨리고 말았다. 10·16의 부산 사태에서 열흘 뒤의 궁정동 사건까지는 유신정권과 朴대통령의 마지막 10일간이었다. 10·16과 10·26을 잇는 직선 상에는 金載圭란 수수께끼의 인물이 있다. 그에 대한 연구는 부마사태와 10·26사건 사이의 인과론뿐만 아니라 유신시대의 몰락과정에 어떤 해답과 교훈을 줄 터이다.

실패한 불장난

= 15일 오전 부산대학

갠 날의 천둥처럼 닥친 유신정권의 최후는 그 11일 전에 일어난 어린아이 장난처럼 보이던 작은 소동에서부터 시작됐다. 10월15일 아침 9시40분께 부산시 동래구 장전동 금정산 기슭 부산대학교 도서관앞. 공대 기계과 3학년 이진걸(당시 20세)은 시간계산을 했다. 앞으로 20분 동안 선언문을 뿌린다. 그러면 선언문을 읽은 학생들이 10시까지는 도서관 앞에 모여들 것이다. 李군은 본관, 그의 친구 南성철군은 도서관을 맡기로 했다. 이진걸은 본관3층 강의실로 뛰어올라갔다. 강의시간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 앞으로 뛰어가 강의 탁자 위에 한 뭉터기씩의 선언문을 놓고 나왔다. 李군은 본관 및 상대 강의실, 바깥 벤치, 휴게실, 운동장 스탠드를 바삐 뛰면서 선언문을 뿌렸다. 李군이 임무를 다하고 도서관으로 돌아와 보니 그곳은 냉랭했다. 당황한 그는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南군은 그제야 가방을 열고 선언문을 꺼내고 있었다. 李군은 선언문 한 뭉치을 빼앗다시피 건네 받아 1층 열람실 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李군은 선언문이 떨어지자 다시 2층으로 뛰어올라가 행동이 느린 南군으로부터 선언문을 받아 내려왔다.

『이제 무슨 반응이 있겠지』하고 두 학생이 도서관 앞 잔디밭으로 나섰을 때는 오전 10시20분께였다. 10시30분까지 기다려도 데모할 학생들은 모여주지 않았다. 李, 南군은 터벅터벅 걸어 내려 와 옛 정문 바깥에 있는 가게술집에 들어갔다. 소주 한 병을 까놓고 둘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南군은 이 술집 변소에다가 남은 선언문 뭉치를 처박아 넣었다. 이날 오후 부산대학 주변의 술집엔 유달리 많은 학생들이 붐볐다. 『어느 놈이 선언문만 돌려놓고 달아났다. 속았다, 속았어!』 이렇게 분통을 떠뜨리는 학생들이 많았다. 개중엔 선언문을 읽고 도서관 앞으로 데모하러 나가 리더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허탕을 친 학생들도 있었다. 李, 南군은 너무 빨리 포기, 학생들을 실망시켰지만, 아쉬움과 함께 『내일에는 무슨 일이…』하는 기대감을 남겼다.

이것은 학생들의 가슴속에 쌓여가던 인화물질을 바싹 건조시키는 역할을 했다. 문제는 여기에 누가 성냥불을 그어댈 것 인가였다. 10월26일 밤의 궁정동 술자리에 앉아 있었던 네 사람만큼이나 유신정권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부산대학교경제과2학년 정광민(鄭光敏.당시20세)이었다. 역사의 큰 손은 그에게 과분한 역할을 맡겼다. 재치나 예술적 재능과는 거리가 먼 학생, 말수는 적었고, 드물게 말을 할 땐 내뱉듯 짧게, 폭발적으로 했다. 검붉은 얼굴, 장발로 뒤덮인 머리에서 부라리는 두 눈이 인상적이었다. 건강한 몸집을 가졌지만 운동에는 관심도 없었다. 검게 물들인 군용작업복과 까만 고무신이 그의 주된 패션이었다. 사진 찍히기를 싫어해 그가 구속됐을 때 기자들이 집을 뒤져 찾아낸 것은 대학입시원서에 붙이고 남은 증명사진 뿐이었다.

그의 생모는 鄭光敏이 젖먹이 때 이혼, 집을 나갔다. 마음씨 좋은 계모 밑에서 자랐다. 60세를 넘긴 아버지는 회사 경비원 직에서 퇴직, 용달차 운전사로 일하고 있어 가정살림은 어려운 편이었다. 77년에 그는 대학시험에 낙방, 1년 재수한 뒤 부산대학 경제과에 들어갔다. 鄭光敏의 생각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동급생 76명의 분위기였다. 반 이상이 학비감면대상기준에 들 만큼 가난한 학생들이 많았다. 79년에 들어서서 이 학급에는 스터디 그룹이 생겼다. 주로 종속이 이론의 경제학 원들을 교재로 썼다. 경제과2학년생들은 79년5월엔 「한국농촌경제의 문제점」이란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9월의 학급회의에선 「여학생과의 미팅」제안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그런 착상을 하는 사람은 학원가의 범법자다』는 성토에 직면, 부결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우직한 鄭군은 사회의 여러 모순에 대한 격정을 가슴에 쌓아가고 있었다. 鄭光敏은 79년9월 동래경찰서에 불려갔다. 그의 친구인 부산ㄷ공업전문대학생 ㅅ군이 데모를 계획, 격문을 찍었다가 구속돼 鄭光敏의 이름을 댔던 것이다. 鄭군은 ㅅ군의 협조요청을 거절했었기 때문에 조사만 받고 풀려났으나 친구에 대한 죄책감을 안게 됐다.

D데이H아워는 79·10·16·10

鄭군은 15일 정오께 학교에 갔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선언문이 뿌려졌고, 선언문을 읽은 학생들이 도서관 앞으로 모여들었으나 「지도자」는 나타나지 않아 흩어지고 있을 때였다. 鄭光敏은 「욱!」했다. 그날 그는 친구 집들을 돌아다니며 줄판, 등사기, 등사잉크를 빌어 집으로 돌아왔다. 다락방에서 두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선언문을 등사하기 시작했다. 부모는 관광여행으로 집을 비우고 있었다. 선언문 초안은 엿새 전에 써 둔 것이었다. 鄭군은 밤새워 2백 장을 밀었다. 롤러를 서툴게 밀어 대부분의 선언문 글자는 알아볼 수 없었다.

흥분된 표현의 선언문은 경제과 학생답게 YH사건 등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었다. 金泳三제명등 정치문제엔 언급을 하지 않았다. 선언문 끝에는 「폐정개혁안」7개조항이 붙어 있었다. 유신헌법철폐, 공평한 소득분배, 학원사찰 중지, 학도호국단 폐지, 언론자유 보장, 반윤리적 기업 엄단, 국민에 대한 정치보복 중지가 7개항이었다. 「정권타도」란 말은 없었다. 민주국가라면 국민의 합법적 소견표명에 들 수 있는 그런 내용이었다. 등사가 끝난 것은 새벽 네시쯤. 두 친구를 집으로 보낸 鄭군은 손을 씻고 누워 잠을 청했으나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선언문 맨 끝에는 「모든 효원인이여, 오늘이 왔네, 79·10·16·10시 도서관으로!」라고 써 놓았으니 D데이H아워는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선별수리론의 내막

= 15일 오후 공화당사

鄭光敏이 등사판을 찾아다니고 있던 그날 오후 서울 남산에 있는 공화당사 의장실에선 매주 한번씩 있는 공화·유정 합동조정회의가 열렸다. 당시 유정회 대변인으로 이 회의에 참석했던 정재호(鄭在虎)는 지금 이렇게 증언 한다. 『朴浚圭공화당의장서리가 사회를 보았는데 : 상기된 표정으로 개구일성 「오늘은 야당의원들의 사퇴서 처리문제(편집자 주 :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은 金泳三총재의 제명에 항의, 10월13일에 사퇴서를 국회에 냈었다)로 의제를 압축해서 이야기하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발언을 하자」고 했다.

마주 보고 앉은 순서에 따라 발언이 진행됐다. 구태회(具泰會.공화당 정책위의장)→한태연(韓泰淵.유정회 정책위의장)→김용태(金龍泰.정무장관)→高재필(정무장관)→최영희(崔榮喜.유정회 총무)→申형식(공화당 사무총장)→鄭在虎→김용호(金龍鎬.공화당 부총무)→오유방(吳有邦.공화당 대변인) 등등의 차례로 발언이 이어졌다. 탁구 공 치듯이 발언이 오가면서 내용도 강경으로 치달았다. 거의 전부가 사퇴서의 선별수리를 주장했다. 「가지 몇 개만 자르면 된다」는 얘기도 나왔다. 나에게 발언 차례가 왔다. 지금도 생생하게 그때의 말들을 기억한다. 「지금 우리가 현미경으로 신민당을 들여다보듯 주류, 비주류를 식별하려고 하는데 대세의 흐름을 놓치고 있다. 국민이 선택한 사름을 우리가 선별한다는 것은 넌센스다. 나는 반대다」

朴浚圭의자서리는 놀란 듯 「鄭대변인은 조선일보 가십에 난 것이 진심인가, 지금이 진심인가」라고 했고, 나는 「반대」를 거듭 확인했다. 金龍鎬부총무도 약간 애매한 말투였지만 반대론을 폈다. 朴의장서리는 토의결과를 공화, 유정 두 대변인이 문안을 통일하여 발표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선별수리를 주장하는 강경론이 압도적이었다는 발표를 기자들에게 했다. 나는 기자들에게 12대1·5라는 표현을 썼다. 강경론 12명에 온건론은 나와 金부총무 두 명이란 것을 그런 식으로 암시했는데, 金부총무의 소신이 애매하여 0·5로 매긴 것이었다. 당시 나는 대변인이란 직책 때문에 악역을 맡아야 했고, 뒤에는 선별수리론이 부산 마산시민들을 격앙시켰다하여 욕을 많이 먹었는데 실상은 그렇게 됐었다.』

金載圭, 崔炯佑에 사퇴종용

= 15일 오후 신라호텔

이 무렵 정계는 신민당 金泳三총재 제명의 후유증을 크게 앓고 있었다. 신민당 의원전원이 항의 사퇴서를 내어 단결된 모습을 보이기는 했으나 속사정은 복잡했다. 법원으로부터 총재직무정지 가처분을 당한 金총재를 대신, 권한대행자로 지명된 정운갑(鄭雲甲)은 자신의 체제를 출범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鄭대행체제의 출범을 위해선 金총재가 임명한 원내총무, 사무총장 등 당직자들이 물러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金載圭는 이 신민당 당직자 사퇴공작을 지휘하게 됐다. 궁정동 사건 뒤에 밝혀진 일이지만 金載圭는 朴대통령에게 10월26일까지 이 공작을 매듭짓겠다고 약속해 놓고 있었다. 金총재를 미는 주류의 행동대장 격이었던 당기위원장 최형우(崔炯右)의원이 신라호텔에서 金載圭를 만난 것도 15일 오후였다.

崔의원의 증언― 『金은 보좌관을 시켜 내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호텔 방으로 갔더니 그는 혼자였다. 金부장은 위협과 회유의 냉온탕식으로 당기위원장 사퇴를 권유했다. 金총재가 별볼일 없게 됐으니 당직 사표를 쓰면 뒤에 사무총장이 되도록 주선하겠다는 거였다. 나는 「당신 말대로 金총재가 지금 별볼일 없게 돼 있기 때문에 더더욱 배신을 못하겠다」고 했다. 약 40분간 이야기했는데 그는 지친 표정이었고 설득을 형식적으로 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이 시점에서 金載圭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오가고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었는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부마사태 직전의 金載圭를 아는 것은 사태 뒤의 그를 알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작업이다.

金載圭는 왜 金大中을 풀었나

金大中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는 최근 본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시 나는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다. 어떤 때는 집을 나서도 막지 않는 경우가 있긴 했다. 신민당 총재 선거기간중에는 연금이 강화돼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나는 金泳三씨를 밀기로 하고 총재 경선에 나선 조윤형(趙尹衡)씨 등 3명을 사퇴시켰다. 그런데 그날 저녁엔 이상하게도 집을 나서는데 경찰이 막지 않았다』 그는 그 길로 중국 음식점 아서원에 갔다. 신민당총재후보 金泳三을 지지하는 대의원들 8백여 명이 모여 있었다. 같은 시각에 이철승(李哲承)후보측 대의원들은 한일관에서 단합대회를 열고 있었다. 金大中은 약 한 시간 동안의 연설을 통해 『이번 전당대회는 당내의 친유신파와 반유신파의 대결이다』고 규정하고 金泳三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호소했다.

金大中의 이 열변은 대의원들 사이에 「바람」을 일으켰다. 그 다음날, 즉 1979년 5월30일 전당대회에서 金泳三이 역전승을 거두는 데 이 「바람」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10·26에서 피크를 이룬 1979년의 대 파란은 金泳三의 총제복귀를 시발점으로 한 것이며, 金大中의 「바람」을 가능케 한 것은 金大中에 대한 「1일 연금해제」 한 나라의 운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이 「해제」를 누가 했는가. 그것은 金載圭였다. 10·26사건 뒤의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사실이다. 당시 金의 참모들은 金大中이 아서원에 참석하려 한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 강권으로 그의 외출을 막아야 한다고 국내정치담당인 김정섭(金正燮)차장보를 통해 金부장에게 건의했으나 거부당했다. 왜 金載圭가 그랬는지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다. 일반의 예상대로 李哲承쪽의 승산이 확실하니까 구태여 金大中의 외출을 막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으리라는 추측이 그 하나다. 이게 사실이라면 정보책임자로서 金載圭는 오판을 했다는 얘기다.

金載圭가 金泳三을 당선시키려고 「고의로」그랬다는 설도 있다. 김녕(金寧)金씨인 金載圭와 동본인 당시의 정부고관 金모씨는 10·26사건 1주일 전에 개인 일로 金부장을 만났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金載圭는 이렇게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내가 공작을 해보니 나라를 위해서는 金泳三씨를 밀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金大中씨의 연금을 그날 하루만 풀어준 것이야. 풀어준다는 사실도 어떤 방법으로 金泳三씨 측에 알려주었지』 그날 金載圭는 그의 집을 나서는 金모씨의 등뒤에다가 이런 말까지 던졌다고 한다. 『누군가가 후세에 이 사실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아 말해두는 거야』

10·26 뒤 金모씨는 金載圭의 마지막 말을 곱씹어 봤다는 것이다. 金모씨의 말대로라면 金載圭가 朴正熙대통령의 뜻을 거슬리는 사보타지를 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金載圭의 말에는(특히 10·26사건 뒤의 법정증언에서는) 자신의 행동을 견강부회 식으로 합리화하려는 구석이 더러 보이기 때문에 「고의설」을 그냥 믿을 수도 없다. 정세오판에 의한 자신의 무능까지도 민주화를 위한 행동으로 미화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