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와 그의 시대④ - 激流의 한 가운데로(1960.1∼9월)

한 근대화 혁명가의 비장(悲壯)한 생애
혁명을 향한 골똘한 사색과 끈질긴 권력의지의 축적 끝에 朴正熙 소장은 드디어 웅크린 맹수의 자세를 풀고 목표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한다. 4·19학생 의거는 1차 거사계획을 중단케 하였으나 朴正熙는 송요찬(宋堯讚) 참모총장에게 도전장을 던지면서 격류의 한 가운데로 뛰어든다. 『이래 갖고 나라가 되겠소?』하고 불평을 되풀이하면서 나라를 뒤엎을 생각을 굳혀가던 朴正熙의 나상(裸像) - 그가 책갈피 속에서 되살아난다!

<1993년 3월 월간조선>

프롤로그·민족주의자, 그리고 근대화 혁명가

30년만에 다시 읽는 「국가와 혁명과 나」

「1963년7월 하순. 폭우가 쏟아지고 야반 영시. 그때 나는 서재의 일우(一隅)에 앉아 戮?멈추고, 멍하니 비에 젖어 가는 밤의 가로를 내다보고 있었다. 문득 저 거리로 뛰어나가 내 재주로 저 비를 막거나 아니면 저 비 때문에 수없이 울고 있을 동포와 더불어, 이 밤을 지새워 보고 싶은 격정을 느꼈다. 5천년을 하루같이 시달려온 이 피곤한 민족이 모처럼 일어서려는 비장한 마당에 다시금 하늘은 시련을 내리다니…」 책머리에 이렇게 시작되는 朴正熙저 「국가(國家)와 혁명(革命)과 나」를, 이 책이 발간된 지 꼭 30년만에, 즉 한 세대가 바뀌고 朴正熙는 흙으로 돌아갔으며 한국은 천지개벽 이래 최대의 변화를 겪었고 이제 그 朴正熙가 중단시켰던 문민 통치가 다시 그 맥을 잇는 시점에서, 밑줄을 그으며 읽어나가는 감회는 새롭다.

이 책은 근대화혁명가 朴正熙가 한국근대화의 출발선에 서서 자신의 비전과 포부와 울분까지도 쏟아 부어 놓은 매우 뜨겁고 거친 표현의 내용물을 지니고 있다. 이 책의 실제 필자는 박상길(朴相吉)씨(68·서울 반포 거주)다. 그는 제4대 국회의원(자유당), 朴正熙대통령 대변? 총무처차관, 수협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그는 「나와 제3,4공화국」(1982년 한진출판사)이란 책에서 朴正熙(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생각을 대필해간 과정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이즈음 의장의 일상은 보기에도 민망하리만큼 망살(忙殺)하였지만 저술의 핵심을 잡기 위해서는 상당한 담론이 필요치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같은 담론은 성질상 단 두 사람만의 시간이 필요하였으며 그같은 기회는 미리 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무시로 대개의 경우 자정을 전후한 야반에 장충단 의장공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내가 메모한 예정된 내용이나 때로 그분이 말하는 자유로운 의견들을 중심으로 대충 골간을 잡아 당초 세운 논술 구성방향에 따라 글을 써 내려갔다. 50장에서 1백장 정도의 원고가 되면 의장공관으로 직행하여 읽어보고 의견을 말하곤 하였는데 바로 이 전후가 격동의 절정기였는지라 좀체로 차분하게 담론할 수가 없었다. 가다가는 돌발적인 사태, 정치적인 난제 등이 주제로 등장하여 혹은 진지, 혹은 흥분, 혹은 격정적이 되는 등 의외의 경우가 많았다.

이 같은 일들은 한 민족국가의 운명을 거머쥔 한 영도자의 스스럼없는 나상(裸像)을 보는 데서 역사의 엄숙, 민족의 비애, 국가의 어려움을 가슴에 느낄 수 있었고, 이 절대한 파도와 맞선 한 운명적 인간의 순정, 정열, 비장, 결심 등을 그대로 읽을 수가 있었다. 이런 중에서 어느 사이 내 스스로도 그분의 일부 의논상대가 되어버리기는 하였으나 무엇보다도 그분의 책을 저술함에 있어 최대한 정확을 기하는 데에 기본적인 도움이 되었었다. 나는 영원히 확신하고 있다. 이 이후 이분의 이름으로 몇 권의 책이 나온 바 있지만 이분의 철학·사상·정치·경제·문화·외교·사회관은 물론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인생관에 이르기까지 이만큼 정확한 바는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

이 책의 2백70쪽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땀을 흘려라!
돌아가는 기계 소리를
노래로 듣고
……
2등 객차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
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

우리는 일을 하여야 한다. 고운 손으로는 살 수 없다. 고운 손아 너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만큼 못살게 되었고, 빼앗기고 살아왔다. 소녀의 손이 고운 것은 미울 리 없겠지만 전체 국민의 1% 내외의 저 특권지배층의 손을 보았는가. 고운 손은 우리의 적이다. 보드라운 손결이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할퀴고, 살을 앗아간 것인가? 우리는 이제 그러한 정객에 대하여 증오의 탄환을 발사하여 주자>

사로맹(社勞盟) 소속 박노해 시인의 작품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의 저항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시가 국가원수의 저서에 실리게 된 사정은 朴相吉씨의 기억에 의하면 이러하다. 『그날도 장충동 공관에서 박의장과 담론을 나눈 끝 무렵이었습니다. 화제는 아마도 박의장이 겪었던 가난이었을 겁니다. 그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박의장이 다른 방에 갔다 오더니 좀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이런 것 하나 있는데 넣을 데 있겠습니까」하고 메모지를 건네주는 거예요. 받아보니 친필로 쓰고 고친 흔적도 있었습니다. 읽어보니 그런 내용이었는데, 그분의 특권층에 대한 증오에 가까운 반발심이 절실하게 표현돼 있어 거의 조판이 다 돼 있던 책에 무리를 해서 끼워 넣었습니다. 다른 시인의 작품을 옮겨 적은 것인지, 그분 자신의 창작인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아마도 창작일 겁니다. 지방 출장 때의 체험에 근거한 시작(詩作)이 아닌가 합니다』

가난은 나의 은인이자 스승

『국가와 혁명과 나』를 30년만에 읽으면서 밑줄을 그어 본 귀절은 이런 것들이었다.
「해방후 19년간의 총결산-그것은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더 많은 반면에, 단 하나의 소득이 있다면 덮어 놓고 흉내낸 식의 절름발이 직수입 민주주의 강제 이식이 있었을 뿐이다」
「피곤한 5천년의 역사-절름발이의 왜곡된 민주주의-텅빈 폐허의 바탕위에 서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그러므로 이 혁명은 한국 근대사 전환의 기점이며 해방 전후 다음가는 제3의 출발이자 민족중흥 창업의 마지막 기회인 것이다. 그런 고로, 이 혁명은 정신적으로 주체의식의 확립 혁명이며 사회적으로 근대화 혁명이요,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인 동시에, 민족의 중흥 혁명이며 국가의 재건 혁명이자, 인간개조 즉 국민개혁 혁명인 것이다… 이 혁명은 민족의 영구혁명이다」
「1961년 한국 예산중 미 대충자금(美 對充資金)의 총규모는 3천1백69억원으로 이는 국내 자원 2천9백19억원에 대하여 52%의 비율이다. 달리 말을 바꾸어 본다면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발언권은 52%를 차지하고 우리는 그만큼 의존되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도 된다」
「자주! 그것은 오직 자주경제 이외에 잡을 그물이 없는 것이다」
「미국 원조가 우리가 요망하는 공업 생산시설에 대하여 얼마나 인색하고 되레 원하지도 않는 소비재 분야에만 적극적潔駭募?것을 알 수 있다」
「마치 불 난, 도둑 맞은 폐가를 인수하였구나! 이는 본인이 구정권을 인수하였을 때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분단의 한 책임은 미국

「미국이 한국을 위하여 싸워주고 도와주는 것은 백 번 고맙지만, 이러한 결과(미국이 원조하지 않을 수 없는)를 한국이 면치 못하게 됨으로써 입는 우리의 고난은 세계사에서도 찾아 보기 힘들만큼 심대하다는 것이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국토분단이다. 이것은 물론, 미국의 단독 행위가 아닌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적어도 그 일단의 책임이 그 사람들에게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북은 소련과 중공과 손을 잡고 날뛰고 있으며 이남은 이남대로 미국과 친하고 있기는 하다. 또한 6·25동란이 단순히 한국의 방위만을 주목적으로 치러졌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곧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평화와 태평양지구 방위정책에 직결된다는 것을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다」 「모든 혁명들은 실로 피와 살과 뼈를 도리는 유혈의 투쟁이었으며 몇 번의 반복, 몇 차례의 진퇴를 통한 적에의 무자비한 탄압, 섬멸적 투쟁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혁명들을 결실시킨 것이 아닌가. 단 일명의 사망, 단 일명의 부상도 없이, 혁명의 전 적대세력을 대등한 위치에 개방하고 순리와 자유경쟁의 원칙에서 혁명의 결실을 시도한 예가 세계 혁명사의 그 어느 대목에 있는가」

「국가와 혁명과 나」는 이렇게 끝맺음되고 있다.
<20여년간의 군대 생활 그리고 소년시절에도 본인은 사립에 가까운 생활을 배워왔다. 그만큼 가난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인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환경이 본인으로 하여금 깨우쳐 준 바 많았고, 결의를 굳게 하여 주기도 하였다. 이같이 가난은 본인의 스승이자 은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의 24시간은 이 스승 이 은인과 연관 있는 일에서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 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 독립된 한국의 창건-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다. 동시에 이것은 본인의 생리인 것이다. 본인이 특권계층, 파벌적 계보를 부정하고 군림사회를 증오하는 요인도 여기에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본인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인정 속에서 生이 끝나기를 염원한다> 朴相吉씨는 『특히 이 마지막 문장은 그 분의 육성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으로 봐도 된다』고 했다.

진정한 민족주의자란?

이 책에서 그가 주장했던 것, 희망했던 것, 그려 보였던 것, 약속했던 것과 그의 집권18년 동안에 그가 실체화시켰던 것을 한 덩어리로 아울러 朴正熙란 이름 앞에 갖다 놓으면 두개의 단어가 자연스럽게 자리잡는다. 근대화 혁명가, 민족주의자.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정서의 문제이다.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는 차갑고 관념적이며 추상적이지만 정서로서의 민족주의는 뜨겁고 구체적이며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민족주의는 글자 그대로 민족이 잘 되고 잘 사는 것을 최대의 가치로 여기는 생각이다. 개인주의가 개인의 가치를, 가족주의가 가족 단위의 안녕을 중시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민족주의의 바탕은 민족을 나처럼 사랑하는 민족애이다. 그런데 이게 쉬운 일인가. 자식을 나처럼 사랑하기도 힘든데 민족이란 거대한 단위를 어찌 나의 운명과 동일시하며 애환을 함께 할 것인가. 민족애는 명상이나 연구작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체험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되 그 체험도 한 인간이 민족사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거대한 그리고 처절한 정면 승부여야 한다. 李承晩과 金九같은 사람은 독립투쟁과 가혹한 옥살이를 통해서 민족애를 품게 된 민족주의자들이다. 朴正熙는 식민지시대의 가난과 울분, 해방후의 공산당가입과 사형집행 일보직전까지 갔던 극한 체험, 6·25전쟁, 미군과의 갈등, 군부의 부패, 개혁을 위한 권력의지의 추구 따위를 통해서 민족애를 체질화하게 되었던 것으로 필자는 본다.

그런데 민족주의자라도 구별이 있다. 민족주의 이론가와 민족주의 실천가의 구별이 있어야 하며 실천가 중에서도 등급이 매겨질 수 있다. 민족주의가 기본적으로 민족 전체를 한 단위로 하는 만큼 최고수준의 민족주의자는 그 민족의 지도자 중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권력이 없으면 민족주의를 실천할 수 없고 최고의 권력만이 최선의 민족주의를 구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최선의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사랑에 뿌리 박지 않은 믿음은 광신으로, 사랑이 없는 소망은 「휴거」로 전락하기 쉬운 것처럼 인간존엄성에 기초하지 못한 민족주의는 국수주의나 장기집권의 수단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朴正熙의 민족주의는 인본주의에 근거하였던가. 앞에 인용한 글에서 그는 「단 일명의 사망, 단 일명의 부상도 없이, 혁명의 全 적대 세력을 대등한 위치에 개방하고 순리와 자유경쟁의 원칙에서 혁명의 결실을 시도한 예가 세계 혁명사의 그 어느 釉澍?있는가」라고 외쳤다. 최선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朴正熙가 최소한의 희생으로써 근대화 혁명을 수행하였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朴正熙의 유교적 인본주의에 그 공을 돌릴 것이다. 반대로 무자비한 희생을 딛고 경제건설을 이룩했다는 시각도 있다. 히 존재한다. 이런 견해차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이 연재 기사가 상당한 판단자료를 제공해 줄 것이다. 다만, 朴正熙가 5·16쿠데타를 무혈로 만들려고 고심했다는 증언이 많다.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5·16주체세력의 지휘소 역할을 했던 제6관구사령부의 방첩대장이었던 정명환(鄭名煥)씨(육군소장 예편·육사8기 3반)는 그때의 생생한 기억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박정희 소장이 6관구 사령부에 나타나더니 장교들을 강당에 모았습니다. 그러고는 이런 말을 했어요. 「모든 혁명은 유혈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나는 무혈혁명을 하겠다」 그때는 쿠데타 계획이 누설돼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이고 주모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여유가 없을 때에는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혁명을 성공시키겠다」고 악을 쓸텐데 꼭 선생님같은 말씀을 하고 있더군요」 유교적 인본주의, 일본무사의 철저한 대결 정신, 민족주의의 열정… 이런 것들이 근대화혁명가 朴正熙의 인격체계에서 뼈대를 이루었다.

그런 朴正熙의 생애에서 범인(凡人)이 흉내낼 수 없다고 생각되는 점이 둘 있다.
첫째는 어찌하여 그는 자신의 한 몸이나 가족의 영달이 아니라 한 민족 전체의 애환을 자기 것으로 끌어 안을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둘째는 남로당에 가입한 죄로 해서 저승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그가 엎드려 죽어지내지 않고 겁도 없이 권력과 미국으로 상징되는 외세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대어들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첫째 의문은 체험적 민족애란 말로써 설명이 되지만 둘째 의문에 대해선 타고난 충동이나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기질 때문이란 비과학적인 설명만 가능할 뿐이다. 그는 결국 근대화 혁명가가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났다고 해야겠다. 근대화 혁명가로서는 봉건적 잔재와 싸워야 했고, 민족주의자로서는 미국과 끊임없이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그는 金載圭의 총탄에 죽은 게 아니라 봉건적 잔재, 그리고 미국과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앞으로 연재할 朴正熙의 일대기는 기자가 1987년에 월간조선에 세차례 연재하였던 「朴正熙와 그의 시대」 후속기사이기도 하다. 군사쿠데타가 구체적으로 준비되던 1960년 직전에서 멈추었던 6년 전의 연재기사를 다시 이어가기로 한 것은 그 동안 발굴된 자료, 특히 5·16쿠데타에 관한 故 이낙선(李洛善)비록과 비밀분류가 해제된 미국정부문서가 용기와 의욕을 북돋우어 주었고 朴正熙에 관하여 꼭 증언해주어야 할 분들의 부고기사가 신문에 너무 자주 나고 있기 때문이다.

1장·웅크린 맹수의 기지개

고목나무 같은 걸 가지고…

1959년7월1일 육군제1군사령부 참모장 朴正熙소장은 6관구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6관구사령부는 서울지구를 작전관할지역으로 삼고 있는 주요 부대였다. 그해 초 1군사령관으로 있다가 육군참모총장으로 승진한 송요찬(宋堯讚)중장의 배려가 있었던 인사였다. 그해 10월5일부터 일주일간 朴소장은 여러 장군들과 함께 대만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미국유학 이후 최초의 해외여행이었다. 훗날 朴장군은 부산일보 사회부 김종신(金鍾信)기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다른 장성들과 함께 대만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서대문의 이기붕 집으로 데려가 인사를 시키는 거야.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만 신고하면 그만인데. 그때 보니 이기붕이는 옆에다 요강을 놓아 두고 제대로 일어나지를 못하더군. 그런 꼬라지를 보니까 한심하데. 메마른 땅에는 싱싱한 나무를 심어도 자랄까말까 한데 고목나무 같은 걸 가지고 뭘 하겠다는 건지…』 11월2일부터 14일까지는 육군병기학교의 지휘관 반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다. 해가 바뀌어 1960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연초부터 나라가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1월29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趙炳玉)이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떠난다. 기록상 朴正熙장군이 「혁명」이란 단어를 처음으로 입에 올린 것은 이 무렵으로 돼 있다.

고 이낙선(李洛善)씨(상공부장관·국세청장 역임)의 집에서 기자가 찾아낸 5·16혁명주체세력 인터뷰파일(이하 「인터뷰파일」로 약칭한다)이 여기에 있다. 2백 여장의 두터운 종이 위에 연필로 깨알같이 기록한 이 파일은 5·16헉명사를 쓰기 위해 주체세력 인사 연 2백 여명을 일일이 인터뷰한 자료다. 朴正熙, 金鍾泌 등 주요인사들의 증언 중에는 정치적 고려에 의해 공식 혁명사엔 빠진 부분도 있어 가공되지 않은 1차 자료로서의 가치는 상당하다고 하겠다. 이 파일의 맨 첫 장 맨 첫 대목은 당시 해병 상륙사단장(포항 주둔) 김동하(金東河)소장의 증언이었다.

·金東河소장 증언

㉠장소…1960년 1월, 서울 朴장군 집
㉡인원…朴장군, 金東河소장
㉢내용…급진하는 민심의 동향과 군부에 의한 수습책을 논의하고 이를 추진키로 합의함.
㉣다음 날
㉤장소…金東河소장 집
㉥인원…朴장군, 金東河소장
㉦내용…해군 해병대는 金東河소장, 육군은 朴正熙장군이 각각 맡아 조직을 갖추기로 합의함.

이런 시기에 군부의 청년 장교들을 자극한 한 보고서가 1960년 1월호 「사상계」에 실렸다. 미국의 상원 외교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콜론연구소(Colon Associates Institution)가 제출한 보고서 「미국의 대(對)아시아 정책」에는 한국에 관련된 부분이 있었고 이것이 소개된 것이었다. 여기에는 이런 대목이 들어 있었다. <넓은 의미에서 한국도 다른 나라의 예대로 군사 지배가 정당을 대체하는 그런 사태가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적절한 것이다. 그 가능성은 그러나 당분간 희박하다. 현재 한국군에는 정치적 신망이나 조직력을 가진 군인이 없다. 육군에는 야심가는 많이 있으나 지금까지 육군은 정부의 주인이 아니라 그 도구에 불과하였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자유당 정부 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군부 조종의 기술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5·16쿠데타 때 김포의 해병여단장으로서 한강 다리를 맨 처음 건넌 부대의 지휘관이 되었던 김윤근(金潤根) 당시 준장은 이 보고서의 피장을 「해병대와 5·16」에서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이 기사는 젊은 장교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고, 한국군 장교를 우습게 보고 있다고 분개하게까지 되었다. 1960년 4월초 어느 날, 당시는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학생과 고등학생의 데모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연일 계속되고 있어 시국이 매우 어수선한 때였다. 진해 해병교육단장으로 근무중이던 나의 사무실로 친구의 아우 모 해병 중위가 찾아왔다. 용건이 끝나자 그는 나에게 「사상계」 1월호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보았다고 했더니 그는 「콜론 보고서」가 한국군 장교들은 기개가 없다고 비웃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

보기에 따라서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고 대답하고, 미국 사람이 한국군을 어떻게 보건 특별히 신경쓸 것 없지 않느냐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화제를 바꾸어서 나라가 이렇게 어수선하고 어지러운데 군부가 가만히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없지 않느냐고 했다. 군부가 구국을 위해 궐기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했다. 평소 같으면 상관 앞에서 감히 입밖에 낼 수 없는 말이었지만 3·15 부정선거 규탄 데모가 연일 계속되고 있어 자유당 정부가 이 난국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두셋만 모이면 나라 걱정하던 때라 그리 당돌한 말은 아니었다>

金東河 증언

김포 해병여단을 이른바 혁명군의 주력으로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金東河씨는 만주군관학교 1년 후배인 朴正熙와는 해방 뒤에도 줄곧 어울리면서 개혁적인 시국관을 나누어 가졌다고 했다. 朴正熙보다 세 살이 아래인 金씨(74세)는 서울 잠실 지구에 살고 있어 그를 만나 보았다. 『6·25전쟁 중이나 직후에 만난 박정희는 일본의 청년장교들이 일으켰던 2·26쿠데타 기도사건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 청년장교들이 불렀던 군가를 좋아했어요. 그때는 정치가 썩으니 군대도 썩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와 있었습니다. 1960년에 들어서면서 이승만 정권의 종말이 가까왔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여러가지 사건들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박장군과의 혁명모의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던 것이죠. 박장군은 육군을, 나는 해병대, 해군, 공군을 맡기로 했어요. 나는 포항 상륙사단의 연대장, 대대장들과 자주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군이 나서야 한다」는 쪽으로 분위기를 조성해 가는 데 힘썼지요. 물론 구체적인 계획을 털어놓은 것은 아니었고 마음을 떠 보는 정도였어요. 일단 유사시에 불을 당기면 이들 실병 지휘관이 나를 따를 수 있도록 분위기를 잡아 놓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대구로 장도영(張都暎) 2군사령관을 찾아가서도 우국충정의 시국담을 나누었는데 張장군도 대체로 동의하였어요. 박정희와의 모의는 어느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오랜 교류와 대화를 통해서 서로 믿고 의기투합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낙선(李洛善) 「인터뷰파일」의 金鍾泌(당시 중앙정보부장) 증언기록카드에도 1960년1월에 朴正熙장군이 金중령에게 혁명을 함께 하자고 제의, 金중령이 즉각 동의한 사실이 적혀 있어 朴장군이 이즈음 시국이 어수선하던 기회를 포착, 쿠데타 결의를 굳히고 있었음을 암시해준다. 1월21일 朴소장은 신설된 군수기지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임명돼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그때 육군군수참모부장은 나중에 5·16쿠데타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던 김웅수(金雄洙)장군이었다. 『박장군을 잘 몰랐지만 정직하고 열심이란 평을 받고 있어 군수물자를 감독하는 책임자로 추천하여 두었고 송요찬(宋堯讚)참모총장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부산의 사령관 취임식에 가서 식이 끝나고 호텔에 돌아와 있으니까 그가 내게 「각하, 이거 혁명이라도 해야지, 이거 되겠습니까」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족청(族靑)계라고 주목받고 있다니까 떠 보는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나는 「혁명을 한다고 해서 나라가 잘 된다는 보장이 있습니까」하고 말을 돌려버리고 말았습니다』(신동아 1986년 5월호).

정각 9시의 감동

朴正熙의 군수기지사령관 시절에 대해서는 당시 부산일보 사회부기자로서 군을 맡고 있었던 김종신(金鍾信)씨(뒤에 대통령 공보비서관, 부산문화방송 사장 역임)가 「0시의 횃불」이란 책에서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연병장 동쪽, 회의실에서 웅성거리고 있기를 얼마쯤, 연락장교가 들어서며 『각하께서 들어오십니다』라고 전했다. 조금 후에 좌우에 참모들을 대동하고, 사령관실 계단을 내려오는-첫눈에 몹시도 키가 작아 보이던-朴正熙장군의 모습이 맞은편 창을 통해 보였다. 기자들이 우르르 창으로 몰려갔다.

『걷는 발 밖엔 안 보이잖아?』
『야, 무지하게 폼을 재며 걷는구나』
느리게 걷는 것도 아닌데 마치 그 딱딱한 시멘트바닥에 움푹 발자국이라도 낼 듯이 힘차게 한발 한발을 옮기며 걸어왔다. 기자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팔뚝시계를 보았다. 몇 신가 알고 싶었다기 보다는 「요번 사령관께서는 또 얼마나 늦으셨누」하는, 그런 장난스런 심경에서였다. 시계 바늘은 정확하게 90도, 일분이 틀리지 않는, 아홉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朴正熙장군은 회의실로 들어서며, 무뚝뚝한 표정으로 좌중을 한바퀴 훑어보는 듯하더니 털썩 중앙의 의자에 기대앉았다. 기자들은 우르르 질서 없이 그 근방의 의자에 앉으며, 먼저 부산문화방송국 전응덕(全應德)보도과장이 마이크를 들이댔다.

그제서야 朴正熙장군은 『우리 뭐, 이런 딱딱한 분위기는 치워버리고 얘기나 합시다. 그제서야 빙긋 웃으며 마이크를 밀어붙였다. 그리고 나서
『나는 경상도 사람이라 부산에 오니까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습니다』하고 소탈하게 입을 떼더니 『뭐, 물을 것 있거든 물으시오』하며 좌중을 훑어보았다. 나는 무르팍에 수첩을 펼쳐 놓고 朴正熙장군을 쳐다보았다.
『부산에 있는 부대들은 말썽이 많다는 것을 알고 오셨을텐데, 앞으로의 부대 운영은 어떻게 해 나갈 작정이십니까?』
朴正熙장군은 눈을 껌벅거리고 아랫입술을 비쭉 내밀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그는 한참만에 천천히 입을 떼며
『잘 해 나갈 작정입니다』하고 너무나도 차분히 그리고 담담히 내뱉었다. 우리들은 그의 체면도 아랑곳없이 와그르르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러나 그는 웃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엄숙한-어쩌면 우리들을 비웃는 것 같은-그런 위엄이 서려 있었다. 朴장군은 신임 군수기지사령관에 취임한 후 바로 참모진을 갈아 치웠다. 소위 거물급의 등에 업혀 공공연히 부정을 일삼던 영관들이 하루 아침에 속속 전방으로 전출되어 나갔다>

『X같은 …』

2월15일 신병 치료차 미국에 갔던 민주당대통령후보 조병옥(趙炳玉)이 사망, 李承晩의 당선은 확정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자유당정권은 대통령이 유고일 때 승계권이 있는 부통령에 이기붕(李起鵬)을 당선시키려고 발악적인 부정선거공작에 착수하여 스스로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2월28일 대구의 경북고교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최초의 시위를 벌였다. 金鍾信의 저서에는 이런 광경이 소개돼 있다. <李承晩정권의 종막을 초래케 한 3·15부정선거가 있기 꼭 닷새 전의 일이다. 宋堯讚육군참모총장이 갑작스레 전용기 편으로 부산으로 내려왔다. 宋堯讚참모총장이 하부(下釜)한 그날 저녁, 朴사령관은 시내 중앙동 로터리 근처의 왜식집에 자리를 마련하고 오래간만에 기자들을 초대했다. 宋참모총장이 시찰자 하부했다는 명목은 한갖 핑계일 뿐, 실은 곧 다가올 정·부통령 선거에 李承晩 박사의 당선을 독려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기자들은 농담 삼아 어쩌면 은근한 고자질을 곁들여 宋참모총장에게 그(박정희)가 근래 전혀 기자들과 접촉이 없다는 걸 일러 바쳤다.(중략)
취흥은 도도해져 갔다.
宋참모총장은 웃음을 띤 채 다시 기자들을 향해서 말을 이었다.
『거, 잘 봐 주시오. 그러니 오늘 이렇게 모인 게 아니겠소. 앞으로 중대사도 있는데…어디 朴장군도 바빠서 그렇지 기자 선생들을 싫어해서 그랬겠소?』
중대사란, 직접 내비치지는 않았지만, 정·부통령선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때였다. 여태껏 한마디도 없던 朴正熙장군이 불쑥 한마디 혼잣말처럼 내 뱉는 말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X같은…』>
이 대목과 관련하여 후일담이 하나 있다.

1966년 金鍾信기자(당시 부산일보 청와대 출입기자)가 5·16전후의 朴正熙관찰기인 「0시의 횃불」을 책으로 펴내 朴대통령에게 드렸을 때였다. 다 읽은 대통령이 金기자를 불러 치하를 해주었다. 金기자는 대통령에게 『혹시 잘못된 부분이 없었습니까. 2판을 찍을 때 고치겠습니다』라고 했다. 朴대통령은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 말이야, 내가 송요찬장군한테 「X같은…」이라고 욕한 걸로 나오는데 난 그런 기억이 없어요』라고 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朴장군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군지렁 군지렁했을 뿐이었다. 더구나 朴장군은 어떠한 경우에도 놈자 이상의 욕을 못하는 사람이었다. 金기자는 『사실은 제가 실감을 주기 위해 좀 과장을 했습니다』라고 했다. 대통령은 『그 말 지우면 책이 안 팔리나』라고 말했다. 金기자가 『역시 그런 대목이 있어야 박력이 풍기고 판매에도 도움이 됩니다』라고 하자 朴대통령은 『그렇다면 할 수 없지』라면서 양보하더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