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정에 도전한 원수(元首)를 참수

口자 모양의 이 장대한 요새같은 건물 속에 내부정원이 있다. 거기서 2층으로 통하는 넓은 계단 위. 여기서 서기 1355년 국가 원수 마리노 파리엘은 금빛 나는 원수모를 벗기우고 백발의 머리를 잘렸다. 10인 위원회의 한 위원이 창 끝으로 머리를 찍어 이 건물의 발코니로 나가 청중들에게 『나라를 배신한 자에게 정의를 구현했다』고 소리쳤다. 원수 이외에 11명의 음모자들은 참수형보다 한 등급 낮은 교수형을 당했다. 이 사건은 파리엘 원수가 민중봉기를 선동, 공화정을 뒤엎으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된 쿠데타 미수였다. 비록 미수사건이라 해도 베니스 지배층은 그들의 국헌(國憲)과 헌정(憲政)에 대한 도전에 가차 없는 응징을 한 것이다. 국가원수라 해도 용서가 없었다.

베니스 사람들은 1천1백년 동안 독립과 자유를 지켜온 찬란한 역사를 가졌으면서도 그들이 쓴 글 속에서는 독립, 자유같은 말들이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베니스人들은 구호와 선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철저한 현실주의자들인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국가의 독립과 개인의 자유를 추구했던 것이다. 그런 實利추구를 멋진 단어로써 미화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공화정을 피로써 사수(死守)한 것도 베니스人의 삶의 양식을 지탱하는 제도로서의 공화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이 사회주의를 거부하는 것도 사회주의가 한국인의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상당수의 국민들이 통일한국의 정치제도로는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절충형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절충형은 있을 수도 없지만 아직도 체제의 중요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國體변경을 간판 바꿔달기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는 데 문제가 있다. 한국에서 애국심은 바로 체제에 대한 충성이며, 陋痼?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사유재산 제도·언론자유·사법의 독립·인권의 보장―을 보존하자는 정신에 다름 아니다. 남산 외인아파트를 폭파한 뒤 일부 언론에선 하얏트 호텔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것은 우리체제의 가장 중요한 원칙인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는 베니스식으로 얘기하면 국헌 문란의 행위에 준한다.

베니스 전쟁사

베니스 역사의 연표(年表)에서 주요 전쟁 기록만 모아 본다.
·서기 1204년 : 제4차 십자군 원정, 콘스탄티노플 정복
·1258년 : 제1차 對제노바 전쟁
·1294년 : 제2차 제노바 전쟁
·1350년 : 제3차 제노바 전쟁
·1378년 : 제4차 제노바 전쟁
·1470년 : 제1차 對오스만 터키 전쟁
·1499년 : 제2차 오스만 터키 전쟁
·1508년 : 칸브레 전투
·1538년 : 제3차 터키戰
·1571년 : 제4차 터키戰―레판토 해전
·1645년 : 제5차 터키전
·1684년 : 제6차 터키전
·1714년 : 제7차 터키전

동방무역의 숙적이었던 해양강국 제노바와의 네 차례 전쟁에서 베니스가 결국 승리한 이유는 국내 정치안정과 이에 따른 국가 동원능력의 우세였다. 제노바는 내부 권력투쟁으로 여러 차례의 호기를 놓쳤다. 베니스와 오스만 터키 사이의 일곱 차례 결전은 육군 강국 對 해군 강국의 대결이었다. 1645년부터 25년간 계속된 크레타 공방전은 강소국(强小國) 베니스의 해군이, 터키 육군에 의하여 코너로 몰린 크레타섬의 칸디아요새에 25년간이나 병력·병참 지원을 계속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장기간 지속되었다.

1667년 한 해의 칸디아 전투에서만도 베니스는 4백명의 지휘관을 포함한 3천6백명의 전사자를 냈고 터키는 2만 이상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유럽은 30년 전쟁이 끝난 직후라 어느 나라도 베니스를 원조해주지 않았다. 터키 진영에선 『이것은 인간이 싸우는 전쟁이 아니다.

25년간 죽은 베니스 병사들의 유령들이 싸우는 전쟁이다』고 말할 정도의 끈질긴 전쟁이었다. 25년간 베니스 해군총사령관 10명중 5명이 전사했다. 1669년 베니스는 이 전쟁을 더 계속하면 국력의 소진을 가져올 것이라고 판단하여 터키와 명예로운 강화를 한 뒤 수비병력과 무기, 국기까지 온전하게 철수시키면서 크레타에서 손을 뗐다. 베니스는 보통 시민출신 전사자와 그 유족에겐 연금을 주었으나 귀족출신인 경우엔 일체 주지 않았다. 전쟁에 나가 죽는 것은, 특권을 가진 엘리트층의 당연한 의무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란 책을 쓴 부르크할트는 「먼 나라에 사는 自國民에 대하여 베니스처럼 강력한 도덕적 힘을 미친 나라는 달리 없다」고 지적했다. 국가와 국민의 그런 일체감은 공동 이익을 피로써 지킨 집단적 경험이 누적된 결과였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주면 국민들은 안심하고 해외로 나간다. 대여행가 마르코폴로 父子는 20여년에 걸쳐 두 차례 元의 북경까지 와서 쿠빌라이 칸의 궁중에서 해외취업을 하기도 했었는데 그가 바로 베니스상인이었다. 그의 여행기는 제노바 軍에게 포로가 돼 옥중에서 구술한 것이다.

4. 한국의 과제―對美自主에의 길

우리는 무엇에서 해방되었나

영웅이 없는 (실은 국민 모두가 영웅임) 영웅적 强小國 베니스와 신라, 그리고 오늘의 한국은 유사점이 많다. 강대국 사이에서 독립과 자유를 보존해야 한다는 숙명적 과제가 그것이다. 실용정신·해양정신·상무정신도 공통점이다. 金庚信이 對唐결전의지로써 한민족의 독립을 보존한 것도 따지고 보면 고매한 이상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기보다는 그렇게 하는 것이 민중의 이득이 되기 때문이었다. 金庚信의 통일대업은, 백제·고구려의 협공을 받아 벼랑에 몰린 신라를 살리자는 데서 출발했다. 통일이 되어야만 평화가 가능하고 민중을 구제할 수 있다는 절박한 필요성에서 통일을 해 놓았더니 唐이 백제·고구려 유민을 부추겨 다시 분열작전을 썼고 여기에 저항한 것이 신라였다. 金日成의 自主는 민중의 實利에 기초하지 않는 광신적 선동에 불과하였다. 신라·베니스와 같은 「열린 자주」가 아니라 자폐증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自主는 지금 어떤 단계에 와 있는가. 기자는 오늘을 사는 한국지식인의 역할은, 해방 50년간의 한국 발전을 분석하고 그 발전의 일반원칙을 뽑아 내어 우리의 자산과 우리의 방식으로 삼도록 도우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미래를 향한 발걸음의 전조등 역할을 맡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해방 50년의 원점으로 돌아가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부터 해방되었던가를 물어야 할 때이다.

[1] 朴正熙의 「국가와 혁명과 나」에는 「言으로는 首를 가고 行으로는 末을 차지하면서, 거기다가 시비와 패거리라면 창자를 움켜 쥐고 달려 들었던이 악유전(惡遺傳)」으로서의 李朝的 양반정치 문화를 규탄하는 대목이 자주 나온다. 朴正熙가 30년 전에 제시한 근대화의 비전은 이 봉건적 양반정치문화의 타파에서 출발하는 청사진이었다. 19세기말 한국을 여행한 뒤 「한국과 그 이웃 나라窈뮌繭?명저(名著)를 남긴 영국의 이사벨라 비숍여사는 러시아 원동(遠東)지역에 이주해 사는 한국인들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보고는 크게 놀랐다고 한다.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게으르고 불결한데 조국을 떠난 한국인들은 열심히 일하고 자치능력이 뛰어나고 깨끗하더란 것이다. 비숍여사는 한국인들이 조선조적인 시스팀을 벗어나면 위대해질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썼다.

양반정치 문화 타파·실학정신 계승으로 국가근대화 혁명

비숍여사의 예언은 적중했다. 해방과 전쟁, 그리고 현대사의 두 巨人 李承晩·朴正熙에 의해 양반정치문화로 대표되는 주자학적인 공리공론의 분위기와 착취구조, 그리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도가 약화되었다. 한국인의 실용정신과 야성을 틀어막고 있던 콜크마개가 뽑혀 버렸다. 그리하여 신라이후 처음으로 민족에너지의 대폭발이 일어났던 것이다. 양반정치문화의 특징은
① 공리공론 집착
② 현재와 미래의 문제보다는 과거사와 뿌리 논쟁치중
③ 군사·경제·과학·예술의 경시
④ 민중에 대한 착취이다.

이것은 유교에 의하여 제도화되어 통일 신라 이후 근 1천년간 한국인의 에너지를 고갈시켜 왔었다. 조선조 말기에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는 실학파가 등장하여 상업과 기술의 중요성을 제기하였다. 그들의 꿈은 개화파에 넘겨졌으나 이미 복원력을 상실한 국내의 조건들에 의해 수포로 돌아갔다. 해방후 李承晩·朴正熙가 추진한 국가근대화의 정신은 실사구시의 실용정신이었다. 좌절된 실학파의 꿈은 두 지도자에 의해 우리 사회에 구현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척陸ㅍ탔?해방후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신라의 상무·해양 정신에서 실학파의 실용주의로 이어지는, 민족사에 잠재됐던 거대한 흐름인 것이다.

[2] 한반도의 정치적 분단은 남한을 사실상의 섬으로 만들었다. 베니스와 신라의 공통점은 그들의 시선이 늘 주변국가와 해외를 지향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국의 분단은 1천년 가까운 민족사의 내륙화 흐름을 처음으로 해양화로 돌려놓았다. 미국·일본 등 해양세력과의 우호관계, 소련·중국 등 대륙세력과의 적대관계 속에서 우리는 서구 자유민주주의를 너무나 쉽게 국시(國是)로 받아들였다. 한국인의 해외진출은 베니스가 「바다의 고속도로」라는 통상루트에서 나라의 活路를 찾았듯이 무역과 공업의 비중을 높여 국가를 개조했고 강병(强兵)할 수 있는 부국(富國)의 기초를 놓았다. 북방정책으로 한국의 생활권이 다시 대륙과 연결되고 있는 지금 한국은 대륙적인 것과 해양적인 것의 균형·조정·조화를 이룰 수 있느냐의 여부에 의하여 그 운명이 많이 바뀔 것이다.

구경꾼의 논리를 거부한 朴正熙

[3] 한국전쟁은 국가와 체제를 피로써 지키는 일에 대한 중요성을 가르쳐 주었다. 尙武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었고 그 상무(尙武)는 상공업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한국전쟁은 또 능률의 극대화, 국력의 조직화란 유신시대의 구호로 대표되는 군사문화를 우리 사회에 확산시켰다. 베니스나 신라처럼 동원능력이 강한 조직화된 나라가 된 것이다.

[4] 건국 대통령 李承晩은 학문과 경륜에서 동서양의 최고수준에 달했던 巨大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동양의 정신을 主로 했고 서양적 기술과 제도를 수단으로 삼았다. 이른바 동도서기(東道西器)의 방식이었다. 공산주의의 본질을 미국 지도층보다도 먼저 꿰뚫고 있었던 그의 세계사 인식은 공산당과 美군정을 좌우로 누르면서 서양식(시장경제＋자유민주주의) 나라를 세우도록 했다. 李承晩의 정치적 관점은 민중에 뿌리박고 있었다. 이화장의 유물이 증언하는 그의 사생활과 주치의가 증언한 모택동(毛澤東)의 사생활을 비교하면 李承晩은 차라리 「권력을 가진 聖者」였다.

그가 6·25직전 地主세력인 한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행한 농지개혁은 이 나라의 틀을 바꿔 놓았다. 소작농이 자작농으로 변해 농지의 주인의식을 갖게 됨으로써 인민군점령 지역에서도 공산주의가 먹혀들지 않았으며 전쟁기간중에도 곡물소출량은 거의 평년 수준을 유지하였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정신을 살린「유상 개혁」에 의하여 토지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었다. 일부 학자들은「무상몰수」를 하지 않았다고 농지 개혁을 비판한다. 무상몰수는 남한이 사회주의를 채택했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1950년대부터 불붙기 시작한 교육열도 소작농민의 소작료가 교육비로 전환된 것과 관계가 있다는 분석도 있다.

우경 기회주의와 좌경맹동주의를 배제한 주류(主流)의 등장

[5] 朴正熙는 32년 전 「국가와 혁명과 나」의 끝머리에서 이렇게 썼다.

〈가난은 本人의 스승이자 은인이다. 본인의 24시간은 이 은인과 관련 있는 일에서 떠날 수 없다. 소박, 근면, 정직,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 독립된 한국의 창건, 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다. 동시에 이것은 본인의 생리인 것이다. 본인이 특권 계층, 파벌적 계보를 부정하고 군림 사회를 증오하는 소이(所以)도 여기에 있다〉

이 책엔 이런 시도 실려 있다.
〈땀을 흘려라!/돌아가는 기계소리를 노래로 듣고…/2등객차에/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나는 고운/네/손이 밉더라〉

朴正熙는 민중적 삶에 뿌리박은 실용주의로써 양반정치문화의 잔영(殘影)과 대결하였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초가지붕개량운동이 벌어졌을 때 식자층에선 「한국인의 정서가 깃든 초가를 없애는 것은 전통유산과 관광자원의 파괴이다」라는 비판이 강했다. 朴正熙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십만 명이 물이 스며드는 방바닥에서 잔다. 불란서의 글쟁이들은 북경거리의 농민출신 거지들을 보고 감탄하면서 문학 작품을 썼다. 나는 우리 국민들을 그런 관광거리로 만들 수는 없다』

朴正熙는 민중의 삶을 구경과 논평의 대상으로 보는 일부지식인층을 경멸했다. 정작 농민들은 농가개량으로 신바람이 나 있는데 서울에선 걱정을 만들어서 하는 「고운 손」이 많았고 그들이 여론을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10·26사건 직후 한 日本人은 「朴대통령은 李朝的 봉건잔재와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평을 했다. 朴正熙는 자신뿐 아니라 아내, 그리고 자녀들까지도 이 전투에 바친 것이 아닐까?

[6] 해방 50년의 한국역사엔 두 개의 채찍이 있었다. 권력자의 전횡을 견제한 국민의 채찍은 金泳三·金大中으로 대표되는 민주화세력이었다. 북한의 남침 위험이란 또 다른 채찍은 반정부세력이 일정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일종의 강제된 균형과 중용이 작동한 속에서 畸므?경제발전과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실용주의로 무장한 국민들은 극단주의를 제어할 힘과 분별력을 키워갔다. 좌익적 용어를 빈다면 우경기회주의자(권력남용·아부세력)와 좌경맹동주의(김일성주의)를 배제한 중간세력이 한국현대사의 主流로 성장했다. 이 主流의 성장은 GNP성장률보다도 빨라 그 속도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지식인·정치인들은 낙오하고 있다. 李承晩·朴正熙 두 사람도 그랬고, 지금은 좌익 지식인들이 그러하다.

지난해를 고비로 하여 10여년간 한국지식인 사회의 주도권을 잡았던 좌익성향은 급격히 퇴조하고 있다. 이제 한반도에 남은 가장 큰 양반정치 세력은 북한노동당 집단일 것이다. 관념의 유희, 독선과 위선, 민중의 수탈, 노동의 기피 등등 모든 점에서 북한지배층은 조선조의 양반 지배층을 닮고 있다. 李朝는 북녘땅에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북한의 개혁·개방은 이런 봉건잔재를 청소하는 근대화혁명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7] 세계최빈국을 50년만에 세계12위의 경제대국으로 끌어올렸고, 21세기엔 GNP총량 면에선 G7에 들 것이란 예상까지 나오게 하고 있는 한국·한국인의 위대한 성취는 그 심리적 동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50, 60년대의 동기―생존을 위한 투지는 타인·동료와의 경쟁에서 지지 않아야겠다는 오기로 승화되었다가 앞으로는 우아한 문화적인 삶과 가치를 추구하는 쪽으로 바뀔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한국의 발전동력은 경쟁심리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그 질투심은 모함이 아니라 「나도 더 일해서 논뿐 아니라 집도 사야겠다」는 식의 생산적인 자극제로 전환되고 있다. 국가발전단계별로는 생존·경쟁시대는 근대화·공업화 시대, 삶의 질을 추구하는 시대는 정보화·선진화에 대응된다. 한국의 목표는 세계화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선진복지국가의 건설이다.

엘리트의 自主정신 결여

[8] 이 선진화의 조건으로 자주정신이 부각되는 것이다. 세계화는 선진화에 이르는 수단이다. 이 세계화는 주체적인 것이라야 한다. 국제화된 국가였던 신라·베니스가 가장 자주적이기도 했었다는 데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非자주적인 관점에서 제주도를 국제화한다면 마카오식이 되겠지만 주체적 관점에서 한다면 스위스식 관광개발이 된다. 自主의 문제는 그 사회 엘리트층의 과제이다. 민중은 삶의 현장에 있어 항상 活力을 유지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한 국가의 자존을 세우고 사회 분위기를 잡아가는 일은 엘리트의 임무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엘리트집단은 지금 자주화·선진화 시대가 요구하는 고뇌를 하고 있는가. 중앙부처 과장들이 생각한 대로 정치인·언론인·교수들이 실력에 비해 가장 과대평가받는 집단이라면, 한국은 지금 엘리트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으며 이것이 국가 발전의 한계와 선진화의 장애물로 작용할 것이다.

경제제도 등 사회적 생산양식의 변화를 인간의 의식은 늘 뒤따라가는 법인 데다가 한국에선 생산양식의 변화가 3∼5배나 빠른 관계로 현실과 의식의 간격도 그만큼 크다. 생산양식, 즉 경제현장에 가까이 있는 집단의 순서대로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의식의 선진화는 기업인·관료·지식인 차례가 된다. 문제는 아직도 양반 정치 문화가 남아있는 탓으로 언론·정치·사법 등의 권력을 가장 낙후된 이 지식인 집단이 쥐고 있다는 데 있다.

이 지식인 집단이 자신의 무능을 위선적 명분론으로 은폐하기 시작하면 국가는 인질이 돼버리고 강력한 역(逆)추진력이 작용하게 된다. 지금 우리의 눈앞에서 바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신라와 베니스의 예에서 보듯이 가장 실용적인 것이 가장 자주적이다. 베니스는 통상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자유와 독립을 추구했던 것이지 막연한 단어 「민족정기」를 위해서 自由를 외치지는 않았다. 신라도 민족의 생존권을 확보하였고 對唐결전을 결심했던 것이지 자신들의 호기를 만족시키려고 그런 일을 벌이지는 않았다(신라는 唐과 전쟁하면서도 외교경로를 통해서는 화친을 청하는 실리적인 양면 작전을 썼다).

양반정치는 선동정치

[9]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옛총독부 건물엔 죄가 없다. 경부선에 죄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더구나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은 옛 중앙청 건물이며 이 건물은 건국과 전쟁과 근대화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의 영욕, 그 한 가운데 있었던 건물이다. 얼마나 많은 역사적인 사건의 사진속에 이 건물이 등장하는가. 이 건물의 파괴는 따라서 한국 현대사의 파괴가 된다. 백번 양보해서 철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교양있는 방식으로 해야한다. 국민의 공론에 붙여 온 국민의 결단으로써 이 건물을 부술 때만이 민족정기를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지도자의 결심에 의한 철거로는 그런 교육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새 박물관을 짓기도 전에 이 멋지고 아름다운 건물을 부순 뒤 우리 민족의 예술혼이 집중돼 있는 문화재들을 7년 이상 임시건물에 전시한다는 것은 세계화를 부르짖는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다. 그것도 약 1조원이 드는 공사.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국가보조가 年5백억원 규모인데…. 건물을 부수어 민족정기를 고양한다는 발상은 그 근본에서 미신과 통한다. 돼지머리를 바치고 안전을 비는 고사는 차라리 애교라도 있다. 민족정기란 국가가 힘이 있고 국민이 자주정신을 갖출 때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파괴의 쾌감은 일순간이다.

조선조의 양반정치 문화는 선동의 정치였다. 선동의 본질은 사소한 것을 과장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며 죄 없는 건물에 죄를 씌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세계화를 지향한다는 정부의 손에 의하여 이런 非문명적이고 낭비적인 축제가 벌어질 때 과연 그 세계화의 진심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文化와 교양이 없는 文民정부란 양반정부이다. 文民이란 말은 일본에서 만든 단어라고 한다. 「글을 아는 민간인」, 즉 양반, 또는 지식인 중심의 정부란 뜻이 되고 군인은 자동적으로 배제되며 글 모르는 서민대중은 안중에도 없다는 뜻이 돼버린다.

金泳三정부는 한걸음 더 나아가 문민민주주의라고 한다. 양반계급위주의 민주주의란 뜻이 된다. 프로레타리아계급의 독재를 공산국가에선 민주주의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문민정부는 민간정부로 고쳐부르는 게 정확하다. 문민정부출범 뒤 옛 중앙청 철거, 과거사 시비 같은 양반정치적 행태가 나타나고 있는 것을 경계할 때이다. 신라, 베니스, 朴正熙의 예에서 보듯이 상인과 군인이 정권을 잡았을 때 실용주의와 자주정신이 일어났고 고려·조선조에서 학자·양반층이 집권했을 때 위선과 사대의 분위기로 흘렀다는 역사적 경험을 눈여겨 볼때이다.

[10] 한국인의 自主는 이제 우리가 거의 무조건 추종해 왔던 서구적 자유민주주의를 인정하면서도 비판적으로 검증해보는 과정에서 확립될 것이다. 이미 한국은 서구식 가치관과 동양적 가치관을 융합시켜 더 나은 그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 해양 세력과 대륙세력의 접점, 기독교와 유·불교의 병존, 사회주의와 자유 민주주의의 대결, 人治와 法治의 갈등 등등. 이제는 동양적인 것의 장점들을 발굴하며 이를 서구적인 제도의 단점과 맞바꾸어 넣는 식의 연구가 진행될 때인 것 같다. 이광요(李光耀)가 주장하는 가장(家長) 2표제 같은 가부장적 선거제도는 서구민주주의에는 맞지 않겠지만 가족이 국가와 공권력의 상당부분을 대신해주는 동양에선 적당할지도 모른다.

산업화와 서구식 개인주의 사조로부터 우리 가정의 단합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하는 과제도 있다. 서구적 法治가 현대사회의 대원칙이긴 하지만 한국인의 활달한 심성에 맞는 보완장치는 반드시 마련되어야 사회의 경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힘센 미국의 입장에선 오늘날의 세계는 탈(脫)냉전시대이다. 그러나 한국의 입장에선 아직도 냉전시대이다. 미국이 탈냉전이라 하면 덩달아서 우리도 탈냉전이란 식의 패션 추종적, 지적 종속성은 주체적인 시각의 부재(不在)에 기인하며, 그것은 한국역사와 그 인물들에 대한 무지와 그에 따른 무관심과 부정에서 비롯된다. 신라통일의 위업을 미숙한 민족주의 잣대로써 격하시키고 한국 現代史의 성취를 좌익적 관점에서 깔아뭉개는 과정에서 우리는 自主할 수 있는 역사의 입각점을 무너뜨려 버렸던 것이다. 올바른 역사관의 정립이 자주의 출발점이다.

신라가 自主할 수 있었던 것은 『唐이 뭔데?』라는 배짱 덕분이었다. 베니스의 자주는 중세유럽이 다 굴복했던 교황의 권위를 거부한 배짱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의 自主도 서구식 민주주의엔 『아니오』가 있을 수 없다는 우리사회의 금기를 부수고 『노』라고 말해야 할 때는 할 수 있을 때 이 땅에 세울 수 있는 깃발일 것이다.

로마의 시저 사당 앞에서

리비아에서 출발하여 朴正熙와 베니스와 신라를 넘나든 상념의 역사 기행(紀行)은 로마에서 끝이 났다. 베니스에서의 2박3일 뒤 기자는 로마로 날아와 로만 포럼으로 불리는 도심의 유적지를 찾았다. 콜로세움(원형경기장)에서 캐피털(로마시청이 있는 언덕)까지 퍼져 있는 이 유적지의 한 가운데는 줄리우스 시저의 사당이 있다. 건물은 다 부서져 없어지고 흔적만 남아 있었다.

서기 전 29년 시저가 브루터스 일파에게 암살된 다음날 그의 시체는 여기에서 화장되었다. 시저의 뼈가 재로 변해 흩 날렸을 사당 앞 쓰러진 돌기둥 위에 앉았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우스 시저」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시저의 시체를 앞에 두고 브루터스가 아주 격조 높은 추도사를 통해서 시저암살의 불가피성(공화정을 무너뜨리고 王政을 세우려 했다는…)을 역설한 뒤 시저의 친구 안토니우스가 연단에 올라 아주 감상적인 연설을 하는 장면이다.

『나는 시저를 묻으러 온 것이지 그를 칭송하러 온 것은 아닙니다. 악행(惡行)은 죽은 뒤에도 따라다니지만 선행(善行)은 뼈와 함께 묻히는 법입니다. 고귀한 브루터스는 시저가 야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것은 크나큰 과오입니다. 브루터스는 고귀한 분이니까요. 가난한 사람들이 울부짖을 때 시저는 흐느꼈습니다. 그러나 브루터스는 그가 야심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브루터스는 고귀한 분입니다. 여러분도 목격했다시피 내가 시저에게 세번이나 왕관을 바쳤을 때 그는 세번 다 거절했습니다. 이것이 야심입니까? 그러나 브루터스는 그가 야심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겠죠, 브루터스는 고귀한 인간이니까요…』

브루터스를 추켜세우는 척하면서 시저를 변호해 가다가 클라이맥스에 가서는 브루터스 일파를 반역자로 단죄하는 안토니우스의 웅변에 의해 군중은 흥분하여 폭도로 변한다. 하루 전에는 암살자 브루터스를 의인(義人)이라 찬양하던 로마 시민들은 그를 향해 달려든다. 브루터스는 로마를 야반도주하고 시저는 죽어서도 그 추정세력을 통해 브루터스 일파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부루터스는 로마史에서 가장 고매한 인격을 가졌던 인물이고, 시저는 청탁을 같이 들이마신 영웅이었다. 브루터스는 기득권의 수호자가 되어 공화정을 지키려 했고 시저는 민중의 편에 서서 전제 왕정(王政)을 꿈꾸었다. 승자와 패자를 가리기는 쉬워도 선악을 가리기는 힘들다.

역사를 굴리는 「위대한 개인」

야콥 부르크할트는 「세계사에 대한 제고찰(諸考察)」이란 저서에서 이렇게 썼다.

〈역사는 때로는 한 인물 속에 자신을 응축시키고, 세계는 그 후 이 인물이 가르키는 방향으로 지향하도록 하는 것을 즐긴다. 이들 「위대한 개인」에 있어서는 보편과 특수, 정지한 것과 움직이는 것이 그 한 사람의 인격 속에 집약된다. 그들은 국가·종교·문화·사회·위기를 구현하는 존재이다. 위기에 있어서는 기성과 새로운 것이 서로 충돌하여 하나 되고 위대한 개인의 속에서 정점(頂点)에 달한다. 이들 위인들의 존재는 세계사의 수수께끼이다〉

로마의 「위대한 개인」은 시저였다. 그는 공화정을 파괴하고 전제황제시대를 여는 길목에 서 있었다. 한국 역사에서 시저와 비견되는 「위대한 개인」은 누구인가. 그 자신이 한 시대의 나이테이자 역사정신의 구현자이며 신구(新舊)를 합쳐서 새로운 질서를 내어놓고 역사를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굴러가게 만든 인물.

기자가 아는 범위 안에선 金庚信, 李承晩·朴正熙이다. 朴正熙가 남긴 마지막 말 『난 괜찮아』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일체화(一體化)시킨 한 위대한 인간이 덥쳐 오는 역사의 물결에 몸을 내맡기면서 스스로를 위로한 말이 아니었을까? 기자는 시저와 朴正熙를 생각하면서 로만 포럼을 떠나 캐피털 힐로 걸어 올라갔다. 도중에 기자는 한 20대 한국처녀를 만났다. 이 여자는 따분한 직장을 그만두고 한 달째 유럽을 혼자서 돌아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녀가 오늘 이 자리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것도 비명(非命)에 간 朴正熙라는 한 남자의 생애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인정(人情)속에서 生이 끝나기를 염원했던」(「국가와 혁명과 나」) 한 사나이가 우리역사에도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