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의 애증(愛憎)관계

朴正熙에게 있어서 미국은 운명적 존재였다. 그가 5·16쿠데타를 결심하도록 촉발한 것도 미군이었다. 매그루더 당시 주한 미군사령관은 朴正熙의 사상적 전과(前過)를 문제삼아 당시 민주당 정부에 대해 그를 예편시키도록 심한 압력을 가했다. 朴正熙는 총구란 탈권의 수단을 곧 잃게 될 것이란 강박감 속에서 쿠데타를 향해 일로매진한 면이 발견된다. 朴正熙가 잠시 남로당에 조직원으로 포섭되었던 것도 미국에 대한 반항심과 연관이 있다.

朴正熙의 성격상 특징은 약한 사람에 대해선 겸손하고 강자에 대해선 머리를 꼿꼿하게 치켜드는 경향이다. 교사 시절 잦았던 일본인 교사들과의 충돌, 해방 뒤 국방경비대 장교 시절 미군 장교들에 대한 노골적 반감 표시는 그의 체질이 된, 강자·압제자·외세에 대한 저항감을 반영한 것이다. 6·25전까지 그는 미국을 한반도에서 일본을 대신한 외세 정도로 보았다. 쿠데타 성공 뒤에 혁명정부의 실체를 인정받는 과정에서 그는 미국과 타협하게 되었고 이것은 본격적인 愛憎관계의 시작이었다.

쿠데타 주체세력의 일부는 민족자본을 동원하여 수입대체방식·자력갱생식의 폐쇄적 경제개발을 시도하려고 하였다. 이런 방식이 미국에 대한 경제적 종속을 피하는 데는 유리하였고 그런 점에서 朴正熙의 취향에도 맞았다. 그러나 민족자본 축적의 취약성과 미국의 개입은 곧 朴正熙의 자세를 외자유치―수출입국에 의한 대외적 경제발전 전략으로 돌려놓았다.

CIA를 간사로 하는 미국 정보기관 합동회의도 5·16 한 달 뒤에 이미「앞으로 한국에 대한 영향력 행사는, 새 집권세력이 매우 민족주의적인 데 유의하여 종래의 군사적 방법보다는 경제적 방법, 즉 한국의 경제개발 계획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기본 방침을 정한 바 있었다. 朴正熙가 1962년에 쓴 「우리 민족의 나아?길」이란 책의 머리말에도 그의 경제발전 철학이 피력되어 있다.

<자유사회의 존립을 위해서는 국민의 생존권을 옹호할 수 있는 경제자립 없이는 불가능하다. 「최대한의 자유, 최소한의 계획」을 원칙으로 경제개혁을 완수하여 「한강변의 기적」을 이룩해 놓는 것이 바로 승공(勝共)의 길이다. 북한 집단은 무리한 경제발전을 강요하여 천리마 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나 이는 국민의 자유권을 침해하여 민주주의를 말살하려는 악독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진정한 경제발전이 민주주의적인 자유와 창발성 가운데서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거부가 아닌 보류

朴正熙도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는 뗄 수 없는 표리관계이며, 시장경제의 원칙을 수용함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깐 선택임을 인정하고 있다. 朴正熙는 1년 뒤인 1963년에 쓴, 그의 비전을 담은 중요한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는 「미국은 서구식 민족주의가 우리의 시장엔 알맞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여야 한다」고 못박는다.

「우리 현실에 그 제도의 실현을 기대한다는 것은 마치 연륜(年輪)을 무시하고 아기가 하루아침에 老人이 되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어버이의 심리와 같다」

朴正熙는 민주주의의 대원칙을 인정하되 아직 한국은 미국식 민주주의 제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단계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부정이 아닌 일시적 보류를 주장하면서 지금 더 급한 것은 「한국 고유의 주체성, 확고한 자아의식, 그 위에 자율적인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그래야만 「미국의 희망은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미국과 朴正熙 사이의 논쟁은 체제의 선택을 둘러싼 본질적 갈등이 아니었다.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당장 실시할 것을 요구하는 미국과 『지금은 경제발전에 치중할 때이지 자유의 확대는 그 다음이다』라고 맞서는 朴正熙 사이엔 전략적 견해 차이가 아니라 전술적 방법론상의 차이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美國에서 한국의 안보를 중시하는 공화당 정권이 나타나면 한미관계는 대체로 평탄했고 인권을 중시하는 카터 정권 때 갈등이 악화되었던 것이다.

최근에 윌리엄 오버홀트라는 카터 진영 선거참모 출신의 금융전문가가 쓴 「중국의 부상(浮上)」(The Rise of China)은 카터의 對朴正熙 인권 압력을 솔직히 반성하고 있다. 오버홀트는 카터가 당시의 한국에 미국식 인권을 강요한 것은 실수였다면서 「미국이 하라는 대로 했다가 실패한 나라가 필리핀, 미국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가 흥한 나라가 한국」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朴正熙가 민주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닦은 점을 인정하면서 「독재자에 의한 민주화」란 표현을 쓰기도 했다.

오만한 미국인을 혼내준 朴正熙

미국과 한국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는 친미도 반미도 아닌 愛憎관계일 수밖에 없음을 맨 처음 깨달은 사람은 李承晩이었다. 미국외교의 본질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李承晩은 미국이 항상 두 얼굴을 갖고 있으며 천사의 속성을 이용하고 악마의 속성을 견제해야만 한국의 활로(活路)를 확보할 수 있음은 물론 궁극적으로 미국에도 도움이 된다고 확신하였다.

1941년 6월호 「교회경영」(Church Management)이란 잡지에 기고한 글 (「Subversive pacifism」이란 제목)에서 李承晩은 조선이 미국과 수교한 것은 일본으로부터의 간섭에 대해 미국의 보호를 받기 위함이었는데 미국은 이 약속을 깨고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화를 양해했으며 일부 기독교인들은 일본의 행위를 지지했다고 통렬히 비난하면서, 미국은 한국에 대해 빚을 지고 있다고 공박하고 있다.

李承晩은 늘 이런 식으로 미국의 급소와 약점을 때리면서 당당히 한국에 대한 미국의 갖가지 군사적, 외교적, 경제적 지원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李承晩이 미국을 자주적으로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은 동양과 서양의 최고급 교양과 학문을 두루 섭취하여 그들에 대하여 우월감마저 갖고 있었던 그 자신의 거대한 인격 덕분이었다. 이에 대해서 朴正熙는 다소 감정적인 對美자세를 취하였으나 항상 실용적으로 타협하였다. 그는 미국의 정치적 압력에 대해서 저항하면서도 주한미군의 철수를 막으려고 애타게 노력했던 것이다.

박상길(朴相吉) 전 청와대 대변인이 그의 회고록 (「나와 제3, 4공화국」)에서 묘사한 한 장면은 朴正熙가 가졌던 응어리의 일단을 보여준다.

<(주한 미국 대리대사 시절에 5·16 쿠데타를 반대했던 그린씨가 윤보선(尹潽善)씨를 먼저 만나고 청와대로 온데 대해서 불만이 컸던) 朴대통령은, 다리를 포개고 버릇없이 담배를 피워대는 상대방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통역관에게 엄명하는 것이었다.
『이 자에게 내가 하는 말을 한 마디도 빼지 말고 그대로 통역토록 하시오』
『그래 윤보선씨가 뭐라고 하던가』
『당신은 지금도 내가 물러가야 된다는 소신에 변함이 없는가』
대통령의 불을 뿜는 눈은 상대를 바위가 뚫어져라 쏘아보고 있었다. 이 손님은 대통령?원색에 가까운 표현쯤의 한국말은 알아들을 처지로 여겨졌다. 정말 옆에서 보기에도 식은 땀이 흘렀다.

이 손님은 대통령의 말씀이 몇 마디 진행되자 겹친 무릎을 풀고 자세가 장군 앞에 선 병졸 모양으로 초긴장되면서, 교장선생에게 꾸중듣는 학생 모양으로 담배는 커녕 손끝까지 떨리는 듯하였다. 그리곤 정확한 발음으로, 『예―써 엑설런시(Yes, Sir Excellency)』소리만 연거푸 하다가 다리를 후들거리며 정신없이 나갔다. 나는 이때 크든 작든 한 나라의 국가원수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로구나 하고 느꼈고, 한 독립국가의 주권에 대하여 뼈로부터 우러나오는 긍지를 통감하였다>

미국의 포위망 뚫으려고

1965년 朴대통령이 존슨 美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 케이프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로켓발사 장면을 참관했을 때의 이야기 한 토막. 당시에 동양통신 워싱턴 특파원이던 김성진(金聖鎭)씨(뒤에 문공부장관 역임)가 취재기자단을 대표하여 朴대통령에게 『감상이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朴대통령은 대뜸 『우리가 쏘아 올린 것도 아닌데 감상은 무슨 감상이야』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당황한 金기자에게 朴대통령은 다시 한번 『저기 날아가는 저게 미국 로켓인데 왜 내가 감상을 말해야 하는가』라고 화가 난 듯 이야기했다. 미국에 대한 질투심이 섞여 있는 말투였다.

이후락(李厚洛) 비서실장이 적당히 만들어서 「朴대통령의 감상」을 발표하긴 했지만. 노신영(盧信永) 전 총리는 인도 주재 대사시절이던 1973년 朴대통령의 특별지시를 받고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과 접촉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지난 10월 월간조선(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서 털어놓았다. 朴대통령은 또 공산 중국과의 비밀접촉도 시도했다. 朴대통령은 1977년엔 전 남로당 간부 박갑동(朴甲東)씨를 청와대로 초청, 소련과의 비밀접촉을 부탁한 적도 있다.

朴씨는 『그때 대통령을 만나고 나오니 가슴이 쓰라렸다』고 했다. 『미국에 의해 포위 당한 대통령의 고독감, 고립감, 그리고 한이 나에게도 전염되는 듯했다』는 것이다. 朴대통령은 『미국이 우리한테 군사원조를 해주는 것 같지만 원조액의 몇 배나 되는 무기를 우리가 사주어야 한다』고 불평도 했다는 것이다. 미국 원조에 대해서 朴正熙는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도 거칠게 비판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무렵의 미국원조가 우리가 요망하는 공업생산 시설에 대하여 얼마나 인색하고 되레 원하지도 않은 원자재 분야에만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주(自主)! 그것은 자주경제 이외에 잡을 그물이 없는 것이다.〉

미국식 민주주의 편으로 넘어가 버린 한국인과 고립된 朴正熙

朴正熙는 1970년대에 어느 정도 자주경제의 기틀을 잡게 되자 그것을 바탕으로 自主국방 정책을 펴나간다. 중화학공업 정책도 처음에는 방위산업의 기반을 조성한다는 국방적인 시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朴正熙는 외국 군대의 도움을 받아서 나라를 지키는 국가는 진정한 독립국가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핵무기개발 시도, 미사일 개발 등 미국의 독점적 영역에 대한 朴正熙의 도전에 대해 미국은 인권(人權)이란 무기로써 맞섰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자주경제와 자주국방이 가능하려면 자주적인 정치의식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미국은 한국인의 이 취약 부분을 人權이란 고성능 무기로써 강타하는데 성공했다는 얘기가 된다.

당시 학생·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운동 세력엔 순수한 민주화세력 이외에도 민주세력으로 위장한 좌익세력·수구적 양반정치세력·친미사대주의 세력이 합세하고 있었다. 이 연합세력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가치판단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삼아 한국적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朴정권을 「사이비 민주주의자」로 규정하는 데 성공하였다. 朴정권은 자유민주주의란 당위론으로 결속된 미국과 국내 민주화세력의 협공을 받았다.

1979년엔 전통적으로 朴正熙 지지세력이던 중산·서민층마저 제2차 석유파동에 따른 경제난의 영향을 받아 反朴正熙로 돌아섰다. 10월 중순의 부마(釜馬) 사태는 학생·지식인층에 중산층이 합세했다는 점에서 朴정권의 심장부를 강타한 사건이었다. 한국에선 민심(民心)의 구현자인 서민층의 동요는 큰 정변을 부르게 된다. 그것은 金載圭의 손가락을 통해서 왔다.

10·26 사건, 그 피의 현장에 짙게 드리워진 미국의 그림자를 바라보면 朴正熙가 남긴 말―『미국놈은 범법해도 처벌 안하나』하는 불평은 自主를 향한 약소국 지도자의 마지막 절규처럼 들리기도 한다. 『우리가 우리 법대로 하는데 뭐가 잘못이란 말이야』하는 朴正熙의 말은 지금도 달라진 의미로써 유효하다. 미국 국무성과 뉴욕 타임스가 국가보안법의 철폐를 주장할 때 많은 한국인들이 느낀 울분이 바로 『미국놈들은 화염병 던져도 처벌 안하나. 우리 법대로 하는데 뭐가 잘못이란 말이냐』였기 때문이다.

2. 신라(新羅)의 대당(對唐)자주는 왜 성공했나

김유신(金庾信)의 對唐 자주

한국 현대사에서 대미자주(對美自主)란 문제를 부둥켜 안고 처절하게 고민했던 정치인은 李承晩·朴正熙 두 사람밖에 없었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가장 反美的인 발언을 많이 남긴 정치인을 꼽으라면 바로 이 두 사람이 선택된다. 생각나는 대로 말할 수 없는 대통령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두 사람은 드러내놓고 미국과 맞섰다. 이 두 사람의 진정한 고독은 그들 자신의 측근들을 비롯해서 대다수 국민들이 미국식 논리에 넘어가버린 상황에서 외롭게 미국을 상대해야 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 두 사람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이가 등소평(鄧小平)과 이광요(李光耀)인데, 미국측 공세의 강도(强度)면에선 李承晩, 朴正熙시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리 역사에서 李·朴 두 대통령과 비교될 수 있는 인물은 對唐자주를 쟁취, 민족국가의 막을 올린 金庾信일 것이다.

金庾信은 唐의 힘을 빌어 삼국통일을 이루었지만 唐이 백제 멸망 뒤 신라지배의 야욕을 보이자 『우리를 도와준 唐과 차마 어떻게 싸우느냐』는 태종무열왕의 태도에 맞서 주전론(主戰論)을 폈다(삼국사기(三國史記).

『개는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다리를 밟으면 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했는데 어찌 스스로 구하지 않겠습니까』

李承晩·朴正熙, 그리고 金庾信이 추구한 자주는 결코 미국이나 唐과 같은 세계제국에 정면도전하려는 발상이 아니었다. 큰 나라들과 사이 좋게 지내되 우리의 생존은 꼭 지켜야겠다는 극히 분수에 맞는 「열린 자주」였던 것이다. 金庾信이 對唐자주에 성공한 것은 신라 국민들과 지배층 사이의 단결 덕분이었다. 백제를 멸망시킨 唐의 장수 소정방(蘇定方)은 본국으로 돌아가 고종에게 보고했다. 고종은 『왜 내친 김에 신라까지 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蘇定方이 말하기를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며, 그 신하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고, 아랫사람은 윗 사람 섬기기를 부형(父兄) 섬기듯 하니 비록 나라가 작지만 도모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했다(三國史記). 對美자주에 실패한 朴正熙와 對唐자주에 성공한 金庾信의 차이는 바로 신라 국민과 대한민국 국민의 차이란 얘기가 된다. 신라사람들은 지도자 및 엘리트층과 화목·단합하여 외세와 맞섰고 한국에선 그런 단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세 때 영국과 베니스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두 나라의 교회가 자국(自國)의 정권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외세 앞에서 국론이 갈리면 自主는 어렵다.

朴正熙가 던진 화두(話頭)

잘되는 집안에선 늘 아들이 아버지를 극복하여 선대(先代)보다 더 나은 후대(後代)를 만든다. 대한민국 50년史가 그런 식이었다. 李承晩·朴正熙란 세기적 巨人은 성경의 선지자처럼 고향에선 핍박받았다. 기념관은커녕 있던 동상도 부수어버리고 정으로 쪼아 명문(銘文)까지 없애버렸다.

우리 국민들은 위대한 지도자들을 실컷 부려먹고 그들이 절정기를 지나 피로한 기색을 보일라치면 가차없이 머슴 바꾸듯 교체해버렸다. 역사적 시각으로 봤을 때 한국에선 국민들이 늘 주인이었고 북한에선 노예였다. 흔히 李承晩·朴正熙를 자기 성공의 희생자라고 한다. 李承晩은 자유당시대에 자유민주주의의 교육을 받고 자란 학생들에 의해, 朴正熙는 경제개발이 만들어낸 중산층의 욕구분출에 의해 권좌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朴正熙도 李承晩을, 全斗煥도 朴正熙를, 盧泰愚도 全斗煥을, 金永三도 盧泰愚를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 않고 늘 전임 대통령을 능가하는 치적을 펼쳐야겠다는 경쟁심리에 사로잡혔다는 점이다. 역대 대통령의 이런 경쟁 마인드야말로 국민 중 최고의 애국자는 늘 현직 대통령이란 공식을 만들어냈다. 李承晩·朴正熙를 격하·비판·부정하는 국민이나 정치인들은 자동적으로 두 지도자보다 더 잘해야 하는 빚을 지게 되었다.

이 죄책감은 한국의 위대한 발전 동력으로 전환되었다. 朴正熙를 「民主」란 이름으로 처단한 것은 金載圭가 아니라 학생·지식인·국민들이었고 시대정신이었다. 朴正熙는 그러나 그 죽음의 자리에서도 自主의 숙제를 가해자들을 향해 던졌다. 민주화세력은 朴正熙가 민주화의 제단에 바쳐진 희생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국권(國權)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보면 對美 자주란 화두를 껴안고 몸부림치다가 거대한 강대국의 벽에 부딪쳐 순사한 것으로 해석할 소지가 있다.

新羅의 對唐 자주는 왜 성공했나

한국 역사상 자주를 유지한 유일한 왕조는 신라였다. 月刊朝鮮의 지난 1월호에 실린 「金庾信의 재발견」기사는 그 자주의 비결을 일부 설명해 주고 있다.

첫째, 신라 지배층의 「의무 있는 명예심」(noblesse oblige)이 삼국통일과 對唐자주란 두 가지 토끼를 잡게 했다. 통일과 자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일이 명예로운 것이라는 사회 분위기가 충천해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데는 종교(불교)의 뒷받침이 컸다. 불교승려(원광법사(原鑛法師))가 만든 세속5계는 요사이도 가감없이 써먹을 수 있는 엘리트집단의 행동지침이다. 특히 「살생유택(殺生有擇)」이란 말에서 화랑도가 도달한 높은 수준의 가치관을 읽을 수 있다.

둘째, 국제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주체적으로 이용하였다. 외세를 한반도로 끌어들여 이용한 다음 내쫓아버리는 데는 對唐결전 의지뿐 아니라 유연성 있는 외교력의 역할이 컸다.

셋째, 지배층과 백성 사이의 단합이 이루어졌다. 식민지가 되지 않은 나라들의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내부 단결이다. 권력층이 분열되지 않고 계층간의 갈등이 적으면 그 나라가 아무리 약해도 한 주권국가를 집어삼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넷째, 민족의식은 강대국과의 투쟁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당시의 唐은 최전성기에 있었던 세계 최대 강국이었다. 한반도의 작은 나라가 이를 상대로 겨레와 나라의 운명을 건 결전을 결심했다는 것이 바로 한민족과 민족국가 성립의 출발점이 되었다. 唐에 순종하는 것이 희생도 덜하고 편하게 사는 방법이었겠지만 金庾信과 신라는 그런 종속적 삶을 거부하고 머리를 꼿꼿이 치켜들고 대제국에 대항하였다.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이 이때 신라 사람들과 손잡고 唐에 대항하면서 비로소 민족 의식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對唐항전을 포기했다면 한반도는 중국화되고 한민족은 생겨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다섯째, 세계제국을 향해서 自主를 천명할 정도의 주체적 힘·오기·의지·결단·사상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이것은 우리가 신라의 통일대업에서 분석해내서 다가오는 남북통일과 그 이후에 대비하기 위해 깊이 연구검토해야 할 부분이다.

① 호국불교와 원효(元曉)사상으로 대표되는 자주적 사상의 뿌리. 신라는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지만 그 자세는 일방적 추종·모방이 아니라 주체적인 소화와 발전이었다. 元曉가 당시의 미국이 唐으로 유학 가는 것을 포기하고 이 땅에서 동아시아의 여러 갈래 불교사상을 통합하는 화정(和淨)사상 체계를 만들어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런 주체적 사고방식이 신라인, 특히 지배층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으니 唐에의 복속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② 화랑도로 대표되는 엘리트 무사집단이 있었다. 화랑도는 전쟁기술만 배우는 싸움 전문가들이 아니었다. 일부 민속학자들이 놀이 집단으로 부를 만큼 화랑도는 풍류와 예술·문화적 교양도 즐겼다고 한다. 문무(文武), 규율과 문화, 야성과 지성, 이성과 감성을 균형있게 조화시킨 활달한 집단이었던 것 같다. 이런 균형과 조화야말로 한 인격의 원숙이며 위대한 민족과 국가의 공통된 특징이다. 고구려는 너무 야성만 강한 무단국가였고 조선조는 지성을 편애한 문약국가였다. 오직 신라만이 그 전성기에는 야성과 지성을 겸비하여 질서가 있으면서도 자유롭고 무력이 강하면서도 예술 또한 발달했으며, 대륙과 해양을 다 통제하고 오기가 세면서도 관용스러운 절묘한 조화와 균형에 도달했던 것이다.

③ 신라인들은 그들의 자존심을 지켜줄 수 있는 물리적 수단을 갖고 있었다. 군사력과 경제력이 그것이다. 특히 철 생산지인 가야 지역을 통합한 신라의 군사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한국 역사상 최장기 왕조이다. 기록상으로 천년이요, 국가체제의 형태를 갖춘 기간으로만 쳐도 7백년이나 된다. 천년 왕국엔 무슨 비결이 있을 것이다. 동서양을 통틀어 천년간 계속된 국가는 로마, 그리고 베니스 정도일 것이다. 신라, 베니스, 로마의 공통점은 단순히 장수(長壽)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