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딛고 이상을 향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인권 속에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리들이 많다. 민주주의의 범(汎)지구적인 보편적 설득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민주주의는 현실적인 인간관에 기초하고 있다. 유교가 성선설(性善說)에 입각하고 있는 데 비해서 민주주의의 인간관은 성악설에 더 가깝다. 인간은 제도적으로 통제되지 않으면 선래적(先來的) 이기성 때문에 나쁜 짓을 할 가능성이 높으니 여러 가지 견제장치를 가져야 한다. 위대한 지도자도 인간인 이상 그런 견제가 없으면 타락하고 만다.

이런 인식에 기초하여 이 세상에서 지옥을 피하려고 애쓰다가 보니 천당과 비슷한 환경을 만든 것이 민주주의라면 성선설에 기초한 정치, 즉 공산주의나 주자학은 이승에서 천국을 구현하려다가 지옥을 만들고 만 경우이다. 위악(僞惡)은 천국을, 위선(僞善)은 지옥을 만든다?

민주주의가 인간 본성에 대한 실용적 인식에만 머물렀다면 민주주의의 전파력은 그다지 세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에만 집착하면 속물이 되고 이상에만 매달리면 몽상가가 된다. 민주주의는 현실을 딛고 이상을 지향하기 때문에 힘이 있는 것이다. 이기심을 가진 인간이란 전제 하에서 개인주의가 생기고 이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시민윤리, 애국심, 정의구현, 인권 같은 집단적 열정이 동원된다.

기자는 야구를 좋아해서 미국 메이저 리그 보스턴 레드삭스 팀의 구장(球場)인 펜웨이 파크에 자주 구경을 갔다. 경기만큼 재미있었던 것은 경기 시작 전의 국가 부르기였다. 소년에서부터 할아버지까지, 소방수에서 오페라 가수까지, 무명시민에서 정치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나와서 마이크를 잡고 독창을 하는 모습, 그 노래를 경청하는 관객들의 경건한 표정, 특히 이 국가의 마지막 대목인 「용자(勇者)의 땅이여, 자유인의 보금자리여」에 와서 터지는 함성에서 기자는 허수룩하게만 보이던 미국인들의 내면에 자리잡은 조국에 대한 사랑과 자랑을 느낄 수가 있었다. 국기, 국가, 군대와 같은 국가 구성요소들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있다.

하버드 스퀘어 근방을 밤에 걷다가 보면 환하게 조명을 받은 성조기가 밤하늘 속에서 나부끼고 있는 건물들을 볼 수가 있다. 하버드 야드라고 불리는 중앙 캠퍼스의 한복판에는 1, 2차 세계대전 때 전사한 하버드 출신자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만든 기념교회가 서 있고 여기서는 매일 기도회가 열린다. 하버드 법과대학원으로 가는 큰 길 가에는 동판과 지도를 곁들인 기념물이 있다. 「윌리엄 도스의 행로(行路)」라는 제목 아래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1775년 4월18일∼19일 밤에 포병중대원 윌리엄 도스는 이 앞길을 말로 달려 지나간 바 렉싱턴과 콘코드에 있던 독립군 민병대에게 영국군이 그쪽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열정과 이상은 국가, 사회, 군대 장애자와 같은 집단을 대상으로 하여 자발적 참여와 자원봉사의 형태로 표현된다. 개인의 사생활은 보호하고 즐기는 영역이지만 사회 국가 군대와 같은 공공의 영역은 참여하고 헌신하면서 이상을 구현하는 공간이란 생각 때문에 개인주의와 애국심, 실용과 이상, 이기심과 이타심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강점은 바로 이 양면성이다. 모든 고급종교나 위대한 인물, 그리고 강대한 제국은 양면성을 갖고 있다. 관용과 엄격, 실리(實利)와 열정, 文과 武. 이 양면성이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조화되고 이용될 때 국가나 인간은 생동하는 모습을 갖게 된다. 朝鮮朝를 지배한 주자학의 문제는 그 본래의 명분성과 균형을 이룰 만한 실용성을 안에서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단선적이고 일면적인 주자학의 명분성은 우리가 받아들인 민주주의에 이전되어 주자학적 민주주의로 되었다. 권리와 의무 중에서 권리,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중에서 개인주의, 이상과 현실 중에서 이상만 강조하는 반쪽 민주주의가 생긴 것이다.

미국 민주주의의 무서운 얼굴

건전한 집단주의에 의한 시민윤리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는 곳에 들어온 민주주의는 행패와 무능과 부패와 위선을 위장하고 이를 정당화하면서 부추기는 도구로 악용되기 쉽다. 기자가 체험한 미국의 민주주의는 무서운 얼굴을 갖고 있었다. 미국에서 강간범은 초범일 경우 징역 10년을 각오해야 한다. 재범 이상이 되면 종신형, 주에 따라서는 사형도 가능하다. 최근에 남부의 한 주에서 징역 20년의 형기를 다 살고 나온 상습추행범을 감호소로 보냈는데 감호기간은 무기한. 영원히 사회와 격리하겠다는 뜻이다. 이 사람의 변호인이 미국 대법원에다가 위헌성 여부를 물었다. 지난 6월 미국 대법원은 그런 무기한의 감호를 규정한 주법(州法)은 합헌이라고 판결했다.

메사추세츠의 음주연령은 만 21세 이상이다. 대부분의 대학생과 군인들이 술을 마실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술집의 종업원은 손님에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여 나이를 확인한 다음에 술잔을 가져온다. 최근 보스턴에서 젊은이 둘이서 장난삼아 도로의 「공사중」팻말을 치워버렸다. 밤에 한 승용차 운전자가 이 길을 달리다가 낭떠러지로 추락하여 3명이 죽었다. 판사는 이 두 장난꾸러기 청년에게 징역 15년씩을 선고했다. 이런 미국에서 한총련 학생들이 시민을 고문하여 죽였다면 사형이 선고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에서도 만약 폭력배가 한총련과 같은 난동을 부렸다면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질서를 잡아야 한다는 여론까지 일어났을 것이다. 학생들이기 때문에, 민주와 통일을 외치기 때문에 이들의 난동에 대한 언론, 검찰, 법원의 대응은 온정적이 아니라 방임적이었다.

통일과 민주라는 명분에 약해지는 것이 한국의 공권력이요 언론이다. 한국에서는 좋은 명분과 동기를 내건 이들에 의한 행패에 대해서는 엄격한 대응이 매우 어렵다. 이 약점을 잘만 이용하면 무능하고 부패한 사람들은 법망을 무디게 한 다음 성실한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 수가 있다. 선진국의 공통점은 이런 사기꾼과 악당을 판별하고 제거해낼 수 있는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명의 충돌」에서 헌팅턴 교수가 동아시아의 유교문화권은 서양문명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도전자로 등장할 것이라고 경고한 것은 미국 파워 엘리트 집단이 공유하고 있는 위기감을 반영하고 있다. 기자는 지난 해 가을 학기에 「국가 이익의 추구」라는 과목의 강의를 하버드의 정치 행정 대학원인 케네디 스쿨에서 들었다.

강사는 로버트 블렉윌씨로서 부시 행정부 시절에 백악관의 국가안보회의 차석비서관이었던 사람이다. 독일 통일에 미국측 실무책임자의 한 사람으로서 관계했던 그는 미국의 국가 이익을 9단계 분석표에 따라서 객관적으로 측정하여 대처하는 공식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의 국가 이익을 결정하는 제1의 대전제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적대적인 패권국가가 등장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러시아가 혼란에 빠져 미국에 도전하는 패권국가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지금 중국만이 도전자로서 남아 있다. 이 중국은 전통적으로 세계적인 패권국가가 될 수 없는 조건을 갖고 있다. 군사력을 원거리에 전개하려면 옛날에는 기마군단과 해군력이 있어야 했고 지금은 전략공군과 항공모함, 그리고 장거리 미사일 부대가 있어야 한다. 중국은 몽골이 가졌던 기마군단도 영국이 가졌던 대양 해군도 가진 적이 없어 유럽원정을 한번도 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천산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진출하기는 했으나 항구적인 정복을 하지 못했다.

중국 두드리기

지금도 핵 장거리 미사일은 갖고 있으나 쓸모가 더 많은 재래식 무기에서는 지역적 패권국가에 지나지 않고 이 자리도 일본에 의해서 견제당하고 있다. 이런 사정인데도 하버드에서는 중국의 위협이 가장 뜨거운 주제가 되고 있고 인권문제를 앞세워 중국을 비판하는 것이 지식인들의 습관성 행태가 되었다. 소련의 붕괴가 미국에 대해서 저지른 가장 큰 죄악은 미국으로부터 적수를 없애버린 일이라는 농담도 있다. 적수가 없어지면 국내의 통합에도 문제가 생기고 군비도 줄여야 한다. 적수가 없으면 만들어내야 하는데 지금 미국의 지도층은 중국의 위협을 과장하여 하나의 허상을 만들고 그 허깨비를 상대로 하여 국력을 조직화하고 동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질 때가 많았다.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소련의 경제력을 3∼4배로 과대평가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과도한 군사비 지출을 계속하도록 유도했다는 것은 소련의 붕괴 이후 비로소 확인되었다.

문명사적으로 보면 동아시아는 英美계통 국가와는 가장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본격적으로 서로 알고 지내기 시작한 것도 아편전쟁 이후 겨우 백년 남짓하다.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서로 싸우기 시작한 것은 7세기부터로 근 1천3백년이나 된다. 싸우다가 보니 서로를 알게 되었는데 동아시아 유교문화권과의 본격적 접촉은 19세기부터일 뿐이어서 서로간의 오해에 기인한 갈등도 크다. 그래서 기자는 하버드 대학의 세미나場에서는 중국을 변호하는 단골이 되어버렸다. 기자는 한국의 외교는 미국과 일본에 7, 중국에 3의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미국을 신뢰하지만 인권을 무기로 한 미국 언론, 학계, 정계의 중국 두드리기에는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국 언론인과 학자들은 고정된 틀로써 중국의 인권문제를 보고 있다. 현재의 서구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인권 상황은 일단 나쁘다는 식이다. 기자는 「인류 역사상 이렇게 짧은 시기에 이렇게 많은 인구가 인권향상의 혜택을 본 것은 처음이다. 소수의 반체제 인사들이 겪는 인권탄압을 가지고 전체를 해석하는 것은 착오이다. 인권향상으로 꾸준히 가고 있는 중국의 경향이 현상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논리를 폈다. 1970년대까지 계속된 문혁(文革)의 참화 때 중국의 인권문제를 제대로 보도한 미국 기자들은 없었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조성한 1차적 책임은 미국이 사주한 쿠데타에 의해 시아누크 왕이 축출된 사건에 있다. 1979년에 월남이 캄보디아로 쳐들어가서 폴 포트 정권을 정글로 내쫓았을 때(그리하여 수많은 캄보디아 사람들을 구했을 때) 미국은 중국과 함께 이 침략을 규탄했다.

미국의 자기 고백

1994년 봄에 르완다에서 석 달 사이에 50만 명의 소수민족이 도륙당하는 사건이 났을 때 유엔의 파병 제의를 거부한 것은 클린턴 정부였다. 이런 점들만 보면 미국은 한국이나 중국의 인권문제를 거론할 자격이 없다. 인종말살의 현장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 제기가 미국 정부에서 나온 적이 있는가. 그러면서도 우리의 국내법인 국가보안법의 철폐를 지지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은 지나간 과오를 인정하는 데 있어서 천재성을 발휘한다. 르완다에서 50만 명이 죽어나간 뒤 이제 와서는 그때의 클린턴 정부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말들이 많이 나온다. 국립문서보관소는 1963년 가을에 있었던 월남 대통령 고딘 디엠의 암살과 관련된 미국 정부기관의 역할에 대해서도 관련문서들을 모두 공개하였다. 이런 식의 자기 고백을 국가정책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다. 미국 정부가 순차적으로 간행하고 있는 「미국의 국제관계」란 책은 대강 30년 전의 외교 안보 관련문서를 비밀해제하여 공개하는 것이다. 국립문서보관소는 미국의 약점을 많이 갖고 있는 창고인데 일종의 국가적 고해성사를 제도화한 곳이기도 하다. 이런 자기 고백과 과오의 인정은 미국 정부로 하여금 「자 우리는 이렇게 반성하였으니 이제는 당신네 국가의 인권문제를 따져볼 자격이 생겼다」고 하면서 압박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과오에 대한 반성으로써 죽은 생명들을 살릴 수는 없지만 자기 비판으로 미국의 對外 입장을 강화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외국에 대하여 요구하는 민주화나 인권개선은 본질적으로 위선적 구조를 갖고 있다.

그래서 기자는 하버드의 언론관계 세미나에서 인권문제가 제기되면 「미국 기자들은 왜 미군과 외교관만 따라다니는가. 미군이 파견되고 외교관들이 가리키는 곳으로만 몰려가서 보도를 하다가 보니 결국은 미국의 국가이익 추구에 있어서 도구로 이용되고 있지 않은가. 개선되고 있는 중국의 인권을 그렇게 비판하는 언론이 왜 그보다 훨씬 악독한 사우디 아라비아와 북한의 인권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가」라고 따졌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한결같이 「접근이 안되는데 어떻게 취재를 할 수 있나」라는 것이었다.

한국식 양비론(兩非論)을 적용하면 「더 나쁜 인권유린을 보도하지 못할 바에야 그보다 덜한 것에 대한 보도는 정의감각에 위배된다」는 것이 된다. 이런 분별심을 미국 기자가 외국문제에 대하여 가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사치라는 사실을 기자는 깨달았다. 우선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부터 쓰고 보는 것이 언론의 생리이고 그러다가 보니 폐쇄정책에서 탈피하여 개방으로 나가는 단계에 있는 지금의 중국과 1970년대의 한국 같은 나라가 완벽한 폐쇄국가(사우디 아라비아나 북한)보다도 더 심하게 두드려 맞게 되는 것이다.

평가부터 하면 진실이 죽는다

하버드 대학에서 미국인들과 섞여 살면서 기자는 동아시아 사람들과 미국 사람들의 사고방식 차이를 화법(話法)에서 느낄 수가 있었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할 때 논리적으로 정리하기를 좋아한다. 평가하기도 좋아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읽어보지도 않고 「사대주의적 시각으로 쓴 책」이란 평을 하도록 교육받아 왔다. 한번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과감하게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또는 우리 편, 저쪽 편 식으로 평가한다. 결론을 서둘러 내리는 화법이다. 미국인들은 평가보다는 사례와 상황의 설명을 많이 한다.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설명적이다. 굳이 결론을 내리고 평가하면서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英美사상의 주류인 경험철학은 인간이 다양한 사례, 경험, 시행착오, 검증을 거친 뒤에야 저절로 진실과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깔고 있다.

그런 사상이 생활철학으로 정착되면 실용주의가 된다. 거기에 바탕을 둔 미국식 역사교육이라면 삼국사기를 평하기 전에 우선 읽게 할 것이다. 그런 다음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읽게 하여 대비하도록 한다. 중국의 사기(史記)도 읽게 하여 비교하도록 한다. 그런 다음 삼국사기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 긍정적 평가를 같이 소개해준다. 이쯤 되면 누구나 삼국사기에 대한 나름대로의 시각을 갖게 된다. 이런 식의 교육은 시간이야 많이 걸리겠지만 많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준다. 「삼국사기는 사대주의적인 책」이란 평가를 내려버리면 더 이상 읽고 싶은 마음이 없어져버린다. 그래서 기자는 나이 50이 넘도록 한국의 가장 중요한 이 책을 읽지 않았다. 삼국사기가 없으면 삼국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거의 공백으로 남게 된다. 삼국시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부가 이 책 한 권에 의존하고 있다. 신채호(申采浩)류의 난폭한 평가는 한국역사의 자기 부정이다.

평가를 앞세우는 한국식 사고방식은 그 본질이 권위적이다. 결론을 위에서 내려씌우는 강압식, 주입식이다. 도덕적 판단을 상황이나 사실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고방식이다. 여기서 명분론적 가치관이 등장한다. 사물을 나쁜 것, 좋은 것으로 갈라서 보아야 속이 시원하고 자신이 하는 일은 善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의욕과 보람을 느낀다. 그러자니 惡이 있어야 한다. 세상을 善惡으로 양분하려는 가파른 사고방식 속에서 민주주의가 자라기는 어렵다.

생활인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논리를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현실을 호흡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실제적이고 실용적이다. 문제는 지도층이고 지식인들이다. 주자학(朱子學)이 동아시아에서 지배적인 정치이데올로기로 확립된 15세기부터 19세기말까지 약 4백년간 중국 조선 일본 월남은 중세적인 암흑과 쇠퇴를 경험하였다. 이 기간에 동양은 과학 기술 정치의 각 분야에서 서양에 역전되어 버리고 결국은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식민지 경영대상으로 전락한다. 일본만이 自力으로 근대화에 성공하여 식민지 신세를 면하고 서구 열강과 대결하게 된다. 서양의 중세는 기독교에 의한 위선적 도덕론이 지배하던 시대이고 동양의 중세는 주자학에 의한 위선적 명분론이 지배하던 시대이다. 도덕이 실용을 누르던 시대라는 것이 中世의 본질적 성격이다. 주자학적 명분론이 어떻게 실용정신과 과학정신을 파괴해갔는가를 잘 보여주는 책이 한 권 있다. 미국의 저술가 루이스 리바시즈가 쓴 「중국이 바다를 지배할 때」.

鄭和의 항해와 콜럼버스의 항해

이 책은 15세기 明나라 영락제(永樂帝) 시절 환관 출신인 이슬람교도 정화(鄭和)의 대원정을 소재로 하고 있다.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일곱 차례 정화가 지휘한 대함대는 말래카 해협-벵골만-페르시아만-홍해-인도양을 항해하면서 동남아시아, 인도, 세일론, 中東, 아프리카 동안(東岸)을 탐험했다. 세일론에선 현지의 왕을 포로로 잡아오는 등 조공무역을 강요하고 작은 나라는 정벌하는 식의 군사적 성격이 강한 항해였다. 제1차 원정 때 함대의 규모는 3백17척에 2만7천 명이었다. 길이가 1백20m, 너비가 50m나 되는 세계 조선(造船)사상 최대의 목선이 주력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컸던 배는 길이가 40m도 안되는 2백t 남짓한 목선이었다. 이 차이가 상징하듯 당시 중국의 국력은 유럽보다 훨씬 강대하였다.

그러나 영락제와 정화(鄭和)가 죽은 뒤 명(明)은 무역과 원양항해를 금지하는 폐쇄정책을 채택한다. 당시 명에서는 환관세력과 주자학 선비들 사이에서 권력투쟁이 일어나 유자(儒者)들이 승리했다. 환관들은 무역업자들의 후견인으로서 돈을 많이 만졌다. 이 정치자금원을 끊는다고 무역금지령을 내리니 큰 배를 만들 필요가 없어졌다. 세계 최선진을 자랑하던 조선기술도 쇠퇴해 버렸다. 1477년에는 병부(兵部)에서 정화의 항해기록을 다 태워버렸다. 대항해를 다시는 하지 못하도록 참고문서를 없애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인류의 자산으로 남아야 할 귀중한 지리적 자료가 사라져 버렸다. 한때 3천5백 척의 함선을 보유했던 세계 최대의 明해군도 연안해군으로 전락하더니 왜구의 침략도 못 막는 신세가 되고 만다. 鄭和가 확보한 인도양의 제해권도 잃고 말았다.

한편 같은 시기에 유럽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계기로 무역과 조선, 그리고 해군을 강화하여 세계로 뻗어간다. 그 종착점은 19세기 열강에 의한 중국 침략이었고 1백년에 걸친 내전과 혁명이었다. 기자는 지난 6월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여행했다. 프랑스에 가면 나폴레옹과 관계된 기념물이 많듯이 스페인에는 카를로스 5세와 필립 2세에 관련된 궁전, 성당, 성 따위의 기념물들이 많다. 이 두 왕은 16세기에 세계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1492년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뒤 1백년간 스페인의 국력이 대폭발하여 그야말로 세계경영에 나서게 되었다. 北美에서는 샌프란시스코, 콜로라도까지, 南美에서는 브라질을 제외한 전부, 그리고 필리핀까지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왜 鄭和의 대항해는 明과 동아시아의 사회변화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는데 콜럼버스의 항해는 유럽 사회의 일대변화와 발전으로 확대되었는가. 왜 똑같은 시기의 두 항해가 한쪽은 쇠퇴의 계기로 되고 다른 쪽에선 융성의 발판이 되었던가. 두 사회의 지배층이 가졌던 근대적(近代的) 실용정신과 전근대적(前近代的) 명분론의 차이가 결정적이었다는 느낌을 가질 수가 있었다. 스페인의 지도층은 실용적인 사람들이었다. 스페인은 1492년에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보루였던 남쪽 도시 그라나다를 점령하여 그들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낼 때까지 약 7백년 동안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고토(故土)를 탈환해가는 이른바 성전(聖戰)을 벌였다. 전쟁과 평화를 되풀이하면서 이슬람교도들과 공존하는 사이에 선진(先進) 이슬람의 과학 기술을 배우게 되었고 이것이 르네상스의 한 요인이 되었다.

스페인의 고도(古都) 코르도바에 가면 이슬람의 거대한 모스크(교회당)를 부수지 않고 일부를 성당으로 개조하여 두 얼굴을 가지게 된 건물이 있다. 이런 개조를 허락했던 카를로스 5세는 나중에 현지를 시찰하고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고 한다. 그는 공사책임자에게 「자네는 세계에서 둘도 없는 문화재를 부수고 그 자리에 평범한 것을 짓고 있구먼」이라고 비꼬았다는 것이다. 모스크와 성당의 두 가지 특성을 다 가진 이 건물은 스페인 지도층의 실용성과 관용을 상징한다. 이 카를로스 5세는 그라나다에 있는 이슬람 세력의 최후 사령부 알함브라 궁전도 부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였다. 문학작품과 유행가에도 등장하는 이 기막히게 아름다운 궁전은 우리의 중앙청처럼 파괴되지 않고, 고스란히 보존되어 지금 후손들에게 많은 관광수입을 선물하고 있다.

21세기를 목전에 둔 한국에서는 한국 현대사의 영욕을 상징하는 옛 중앙청 건물에 사형을 선고하여 부수어버렸는데 스페인의 왕들은 15∼16세기에 벌써 「건물이 무슨 죄가 있나」라는 상식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을 한 것은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기 위함이었고 그 최종 목적은 돈벌이였다. 스페인 왕실에서 이탈리아 제노아 사람인 그를 후원한 것도 무역을 통한 재정수입으로 군비를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상무(商武)에 기초한 실용적인 이해관계가 이 신대륙의 발견을 대항해 시대를 활짝 여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鄭和의 원정은 明정권의 권위를 만방에 떨치게 한다는 명분적인 의미가 강했던 데 비해서 콜럼버스의 항해는 돈벌이라는 이기심을 깔고 있었다. 명분은 왕과 학자들의 전유물이지만 돈벌이는 민중의 공유물이다. 돈벌이는 인간 본성에 호소하는 힘과 엄청난 대중 동원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모험심과 물욕(物欲)이 강한 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신대륙으로 아시아로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했고 이것이 유럽의 세계적 패권을 가능하게 한 주요 계기가 되었다. 실용정신은 역사를 전진시키지만 명분론은 후퇴시킨다. 실용정신은 선진(先進)이고 명분론은 수구(守舊)요 후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