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기대

7월에 들어서면서 전쟁이 점점 치열해져 감을 느낄 수 있었다. 후송되어 오는 인민군 부상병들이 늘고 있었다. 어디론가 끌려가는 미군 포로들도 목격되었다. 하늘에선 美 공군기의 공습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B-29 폭격기는 高空(고공)에서 철교나 군 시설물을 폭격하고 무스탕 전투기와 그라망 전투기는 低空(저공)으로 비행하면서 기차역과 달리는 기차, 자동차에 기총소사를 퍼부으며 혼을 쏙 빼놓고 있었다.

헬리콥터와 세이버 제트기도 번질나게 나타나 공습에 가세하였다. 헬리콥터는 이착륙하는 모습이며 생김새가 잠자리를 닮았다고 잠자리 비행기라 불렀고, 제트기는 ‘쌕~’ 하는 폭음과 함께 나타났는가 싶어 하늘을 쳐다보면 어느새 ‘쌕~’ 하는 폭음만 남기고 저 멀리 날아가는 속도가 하도 빨라 ‘쌕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쌕쌕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처가인 호주에서 온 것이라고 엉뚱한 말을 사람들은 하였는데 그것은 ‘오스트리아’를 ‘오스트레일리아’로 잘못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노인은 잠자리 비행기가 흥남비료공장의 높은 굴뚝 꼭대기에 앉아서 쉬다가 날아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고 너스레를 떠는가 하면, 추녀 끝에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날아가는 그라망 전투기의 미군 조종사가 집안에 있는 자기를 보고 미소 짓고 손을 흔들었다고 능청스럽게 말하는 등 터무니없는 우스갯소리가 떠돌았었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졸이는 마음으로 戰況(전황)이 반전되었다는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던 차에 그토록 기다리던 반가운 소식을 9월 15일날 접하게 됐다. 감격하여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날 친구를 만나러 거리에 나갔다가 공습 경보가 울리자 방공호를 향하여 필사적으로 뛰었는데, 느낌이 이상하였다. 비행기에서 폭탄이 투하되면 폭탄에 장착된 안전핀이 풀리게 되어 있다. 안전핀은 바람개비가 달린 장치였다. 바람개비가 돌면서 ‘앵~’ 하는 소리가 난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다. 하루에도 수없이 공습을 당하다 보니 터득하게 된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안전핀이 풀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게 웬일인가? 폭탄이 아니라 전단지가 바람에 날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골목에 숨어서 전단지가 떨어지기를 숨죽이고 기다렸다. 한 장 주워 펼쳐보고는 눈을 의심하였다. 그토록 바라던 일이 드디어 일어났으니 가슴이 벌렁거리며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알리는 전단지였다.

전단지에는 한반도 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미군이 지도의 한가운데를 가위로 자르는 그림이었다. 전단지 상단에는 ‘9월 15일 유엔군 인천상륙잔적 성공’이라고 쓰여 있었다.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였으니 이제 전세는 反轉(반전)될 것이고 전후방을 차단당한 인민군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아니겠는가? 전쟁은 곧 끝날 것이고 통일도 멀지 않았다는 벅찬 감격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군의관 입대 後 친구 따라 탈영

시간이 흘러 우리의 병원 실습이 끝나는 9월 30일이 되었다 실습을 끝마친 우리는 학교에 집결하였다. 그 날 오후 군의관인 대위 한 명이 학교에 왔다. 함흥과 북청에 서른이 넘는 장년들을 소집하여 경비연대를 창설하는데 군의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면접을 통하여 각 연대에 11명씩 22명이 선발되었다. 나는 북청연대에 배정되었다. 1950년 9월 30일 밤 11시, 우리 11명은 군 트럭으로 북청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북청까지는 200여 리, 서너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건만, 차가 老朽(노후)하여 도중에 고장으로 지체되는 바람에 북청 부대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아침 해 뜰 무렵이었다.

인민학교 校舍(교사)를 징발하여 막사로 쓰고 있었다. 운동장에선 삼사십 된 장정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인사담당 장교가 앞으로의 일정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신병 훈련이 끝나면 대대로 편성하는데 그때에 우리의 부대 배치도 결정되니 그때까지 장교 식당에서 숙식하며 대기하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우리 11명은 군복도 보급받지 못하고 학생복 차림으로 신병훈련이 끝날 때까지 별다른 제약 없이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

북청부대에 끌려온 지 일주일 되던 날 아침, 친구 범은이가 어렵게 나에게 도피계획을 털어 놓았다. 그는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로서 해방되던 해에 서울의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함흥의대에 들어온 다재다능한 수재였다. 그가 탈영하겠다고 하니 과연 그다운 결심이라고 생각하였었다. 이곳에서 도피하여 집에 가서 숨겠다는 그의 결심은 단호하였다. 이제 곧 유엔군이 들어올 터이니 그때까지만 무사히 넘기면 될 것이니 집으로 도망가겠다면서 나도 자기 집에 같이 가서 숨자고 했다. 그의 고향 이원까지는 北으로 100리밖에 안 되니 능히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둘은 몰래 부대를 빠져나와 북으로의 걸음을 재촉하였다. 도중 농가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인 10월 8일 집 근처의 고갯마루에 이르렀다. 밤이 되기를 기다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몰래 집에 숨어들었다. 이렇게 우리의 도피 생활이 시작되었다. 절대 집밖에 나가서는 안 됐다. 이웃사람들의 눈에 띄어 아무개가 집에 왔다는 소문이 퍼지는 날엔 말짱 도루묵이고 도로 아미타불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열성분자들은 다 도망가고…

숨어 지낸 지 15일 만에 드디어 그 날이 왔다. 10월 24일 유엔군과 국군이 이원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군 입대를 피해 산 속에 움을 파고 숨어 지내던 젊은이들도 거리로 몰려 나왔다. 몇 달씩 햇빛을 보지 못하여 창백해진 얼굴의 젊은이들이 해방되었다고 자유를 찾았다고 서로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부른다. 흥분의 도가니였다. 마을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앞날에 대한 부푼 기대로 한껏 흥분한 마을 사람들은 격앙된 감정을 주체 못하고 구름 위를 걷는 듯 들뜬 기분에 젖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흥분이 점차 가라앉았다. 사람들도 日常(일상)으로 돌아갔다. 자치위원회가 조직되고 치안대가 편성되었다. 대한청년단도 창단되었다. 공산정권에 빌붙어 완장차고 거들먹거리던 부역자를 단죄한다고 날을 세운다. 당한 만큼 갚아주겠다며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단죄되어야 할 극성스럽게 날뛰던 열성분자들은 모두 도망가고 없었다. “나야 괜찮겠지” 하고 남아 있던 자들이 잡혀와 조사를 받으니 “이게 옳은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힘없는 백성이 가장으로서 가정을 지키며 편히 살아가겠다고 시키는 대로 따랐을 뿐인 그들에게 思想(사상)의 굴레를 씌워 단죄하는 것이 옳을까? 과연 그들에게 사상이나 이념 같은 것이 있었을까. 국군이 들어오면 ‘빨갱이’를, 인민군이 들어오면 ‘반동분자’를 처단한다고 법석을 떨며 이렇게 죽이고 저렇게 죽였다. 이보다 더한 비극이 또 있을까?

배를 구해 월남하기로 결심

11월에 들어서도 국군과 유엔군의 北進(북진)은 계속되고 있었다. 신문도 없고, 방송도 듣지 못하니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11월이면 이미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참전하여 장진호 전투에서 인해전술로 유엔군과 국군을 괴롭히고 있었을 텐데 우리는 그런 사실도 까맣게 모르고 통일 소식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12월 6일 청천 벽력같은 소식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중공군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국군과 유엔군이 밤새도록 南으로 철수하였다는 것이다. 자치 위원회도 치안대도 남으로 떠났고 미처 피난 못한 주민들이 우왕좌왕 허둥대고 있었다. 우리도 피난 가야 한다, 또다시 공산 치하에 남아 있을 수는 없다.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갈 것인가? 기차도 자동차도 없다. 걸어서 가기에는 너무 멀고 위험하다. 그래서 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배뿐이니 차호로 가서 배를 마련하기로 하였다. 차호까지는 30리. 서둘러 차비를 갖추고 길을 나섰다. 길에 나서니 차호로 가는 피난민이 줄을 잇고 있었다.

차호에 사는 친구 범은이의 숙부께서 배를 소유하고 있어 그 배로 가기로 하였다. 배라고 해봐야 고기잡이 범선으로 40여명 탈 수 있는 작은 배였다. 배가 마련되었으니 이제 배를 몰고 갈 선장과 선원 두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가겠다는 사람이 없다. 설득해봤자 요지부동이었다.

칼로 위협해 선장을 끌고 오다

자기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처지니 가족 때문에 절대 갈 수 없단다. 더군다나 노동자 농민이 주인이 되는 지상낙원을 건설한다고 떠벌리고 있으니, 이들이 과연 피난 갈 필요성을 느꼈겠는가. 가족 때문에 못 간다는 그들에게 “지금의 유엔군 퇴각은 작전상의 후퇴이니 맥아더 장군은 틀림없이 반격하여 올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피난 갔다가 곧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니 넉넉잡고 석 달이면 고향에 돌아올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설득하였다 그러면서 배로 갈 사람 한 사람당 쌀 한 가마씩 40여 가마를 모아 주기로 하고야 겨우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이제 피난갈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졌다. 모두의 얼굴에 비로소 화색이 돌았다. 차호 항에는 150여 척의 작은 어선들이 남한으로 떠날 준비를 갖추고 정박하고 있었다. 12월 8일 18시에 일제히 떠나기로 결정했다. 치안대 경비선이 항구 내를 계속 순찰하고 있었다. 유엔군이 북한에 진주하자 쫓겨 도망갔던 공산 분자들의 기습이 염려됐기 때문이다. 멀리서 들려오는 총성에 모두가 긴장하고 있었다.

12월 8일 저녁 무렵 모두가 배에 올라 선원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되자 배들은 한 척, 두 척 항구를 빠져 나가는데 우리는 선원이 오지 않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못가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모두는 말이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선원 둘이 나타났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선장이 오지 않으니 떠날 수가 없었다. 항구에 정박해 있던 그 많은 배들은 다 빠져 나가고 우리 배만 덩그러니 홀로 남아 있지 않은가?

멀리서 들리던 총성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들 공포에 질려 얼굴이 창백하다.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 곳 사정에 밝은 청년 셋이 부엌칼을 몸에 품고는 선장을 찾아 나섰다. 선장은 마침 집에 있었다. 죽어도 못 간다는 그를 칼로 위협하고 힘으로 제압하여 강제로 끌고 왔다. 어렵게 고비를 넘기고 드디어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벗으라면 벗을 것이지 피난민 주제에…”

바로 그 때였다. 부둣가 광장에서 만세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쫓겨 도망갔던 공산분자들이 돌아왔다. 만세소리에 모두는 질겁했다. 큰일이 아닌가? 우리 배는 아직도 항구를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큰일이다. 그들에게 들키는 날엔 모든 게 끝이 아닌가? 모두 死色(사색)이 되어 떨고 있었다. 

그런데 요행일까 그들은 미처 거기까지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무사히 항구를 벗어나 동해바다에 나와 돛을 올리니 이제 살았구나 하고 모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바다날씨가 심상치 않다. 눈발이 날리더니 진눈깨비로 변했다. 뱃머리에 부딪히는 파도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배가 파도에 출렁일 때마다 속이 뒤집혀 구역질을 하며 토했다. 밤새도록 파도에 시달리며 토하다 보니 다들 파김치가 되어 축 늘어졌다.

날씨가 이러니 과연 부산까지 예정대로 일주일 안에 갈 수 있을까들 걱정이었다. 날씨가 이래서는 20일도 더 걸릴 것이라고 한다. 1주일분 식량만 준비하였으니 그걸로 20일을 버텨야 하니 배고픔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월남하려고 차호에 모여든 피난민들 중에는 배편을 마련하지 못하여 안달복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더 태워야 한다고 식량을 최소한으로 줄여 1주일분만 배에 실었다. 그러니 양식이 달릴 수밖에 없었다.

출항 첫째 날에는 풍랑에 시달리며 밤새도록 토했다. 구토를 계속하다 보니 나중에는 쓴 열물까지 토했다. 둘째 날에도 멀미는 여전하여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하루 종일 굶었었다. 셋째 날이 되자 멀미가 다소 가라앉았다. 그제야 비로소 배가 고파왔다. 배불리 먹어야 하는데 양식이 달린다고 배식 양을 줄이니 배가 고파 참을 수가 없다. 정승도 사흘을 굶으면 도둑질 생각을 한다더니 사흘을 굶었더니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다. 자나 깨나 먹는 생각 뿐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 아무 짓이라도 할 것 같은 마음이었다. 사람이 겪는 고통 중 배고픔보다 더한 고통이 없음을 절실히 느꼈다.

차호 항을 떠난 지 10여 일 만에 식수를 보충하기 위하여 속초에 들렀다. 흙을 밟으니 살 것 같았다. 장형, 범은이, 나. 이렇게 셋은 시내 구경을 한다고 거리로 나왔다. 국군 상사가 소대를 인솔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그 상사가 우리 앞으로 다가와 서더니 장형더러 다짜고짜 신고 있는 신을 벗으라는 것이다. 장형이 새 부츠를 신고 있었기 때문이다. 못 벗겠다고 버티는 장형을 윽박지르면서 “벗으라면 벗을 것이지 피난민 주제에…” 하고 눈을 부라린다. 북한에서 온 것이 죄라도 되는 듯 주눅이 들었다. 빨갱이로 몰리지나 않을까 겁에 질려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장형이 엉겁결에 구두를 벗었고, 그 상사는 다 떨어진 농구화를 벗어놓고는 그 구두를 신고 가버렸다.

국군의 만행

눈감으면 코 베어가는 곳이 서울이라는 말은 들었어도 눈 뜬 사람의 구두를 빼앗으니 이보다 더 황당한 일이 또 있을까? 장형은 분이 풀리지 않는 듯 배에 돌아와서도 투덜대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배에서의 불편한 생활로 환자가 생겨났다. 소화불량으로 고생하는 사람, 감기에 걸려 심한 기침을 하는 사람들로 응급약이 필요하여 구급약을 사기 위하여 강릉에 들렀다.

배가 부두에 닿자 군복차림의 청년이 올라탔다. 계급장도 부대 표식도 없는 것으로 보아 정보원 끄나풀 같았다. 검문한다고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는 딱딱거리더니 젊은 여자 앞에 가서는 겁주며 몰아세운다. 이것저것 따져 묻더니 사무실에 가서 더 조사해야 한다며 내리란다. 내리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여럿이 거들고 나섰다. 배가 곧 떠나야 하니 제발 사정 좀 봐달라고 애걸하였다. 그러나 그게 통할 리 없었다. 내리라면 내릴 것이지 “빨갱이 같은 놈들.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까분다”고 호통을 치며 눈을 부라리니 기가 꺾여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타 그는 여자를 데리고 내려 버렸다.

배가 떠나야 하는데 그 여자가 오지 않았다. 한 시간 가량 기다렸을까 그 여자가 힘없는 걸음으로 나타났다. 배에 올라 자기 자리에 가서 앉더니 얼굴을 가슴에 묻고 울고 있다. 그 놈이 그 여자를 데리고 가 무슨 짓을 하였는지 짐작이 갔다. 자유를 찾아 떠나온 피난길, 부모 형제도 다니던 직장이나 학업까지도 미련 없이 내던지고 떠나온 피난길에서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다니.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울분을 참아야만 하는 피난민은 이방인이란 말인가. 울화가 치밀고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배는 삼척군 정라진 앞 바다를 지나고 있었다. 모처럼의 화사한 날씨였다, 따사로운 햇살이 거울 같이 잔잔한 바다 위를 비추니 봄날 같이 포근했다. 불현듯 고향 생각에 가슴이 저려온다. 자식의 생사조차 알지 못하여 눈물과 한숨으로 잠 못 이루시고 노심초사 하실 부모님 생각에 목이 멘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배가 돌기 시작한다. 앞으로 나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기만 한다. 잽싸게 선원이 돛을 내렸다. 그래도 배는 계속 돌고 있다. 선장의 말에 의하면 배의 밑바닥에 배의 평형을 잡아주는 ‘따리’라는 장치가 있는데, 그것을 고정하는 나사가 풀려 배의 균형을 잡아주지 못하기 때문에 배가 돌고 있다는 것이다. 바람이 없고 파도가 잔잔하니 망정이지 바람이 세거나 파도가 높아지면 배는 바로 뒤집힌다니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도움을 청할 어선 한 척 없는 고립무원의 절망의 처지다. 모두는 사색이 되어 사시나무 떨 듯 떨고만 있다. 체념한 듯 초점을 잃은 눈빛이 공허하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