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찬 바다에 뛰어들다

아무리 궁리를 거듭하여 보아도 살아날 길은 보이지 않았다. 자유를 동경하여 떠나온 피난길에서 꼼짝없이 水葬(수장)될 처지에 놓였으니 두려움과 허탈한 마음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었겠는가? 겁에 질려 굳은 표정으로 체념한 듯 얼빠진 듯 넋두리를 늘어놓는 사람,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며 대성통곡하는 사람, 간절한 심정으로 기도하는 사람 등 죽음의 문턱에선 사람들의 절박한 심정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선원이 옷을 훌훌 벗더니 12월의 차디찬 바다에 뛰어들었다. 풀린 나사를 펜치로 조이겠다고 배 밑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이윽고 배가 멈췄다. 선원이 물 위로 솟구쳐 올라 배에 탔다. 그가 그렇게 고맙고 위대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생명을 구해주었으니 우리 모두는 새 생명을 얻어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조심조심 노를 저어 정라진 港(항)에 들어가 배를 수리하고서야 항해를 계속할 수 있었다.

차호港을 떠난 지 20일 가까이 지났다. 좁은 배에서의 새우잠, 심한 배 멀미, 부실한 식사에 모두는 몸도 마음도 지쳤다.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이제 38선을 넘었으니 여기는 대한민국. 차라리 배에서 내려 부산으로 걸어가는 것이 낫겠다고 범은이와 나는 뜻을 모았다. 12월 28일 점심 무렵 배가 구룡포에 들렀다. 배에 탄 일행에게 작별을 고하고 내리려는데, 마른 오징어 다섯 축을 준다. 가다가 팔아서 점심이나 한 끼 사먹으란다. 북한 돈이야 있어봤자 남한에서야 휴지조각이니 있으나 마나였으니, 오징어 다섯 축, 그게 나와 범은이의 全재산이었다. 배에서 내린 후 범은이와 나는 줄곧 행동을 같이 하여 왔다. 지금까지도 그와 나는 변함없는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50代 중반 여인의 厚意

배에서 내려 한 사십 리쯤 걸었을까. 당도한 곳이 경북 영일군 지행면이었다. 해는 서산에 기울고 집집마다의 굴뚝에선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룻밤 묵을 집을 찾아야 하는데 용기가 나지 않는다. 문전걸식을 해야 하다니 처지가 너무나 비참하다. 산기슭의 큰 기와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랑채가 달린 규모가 큰 농가였다. 그 집에 가서 사정하기로 하였다. 대문 앞에 서서 주인을 찾았다. 후덕한 모습의 50 중반의 부인이 나왔다.

“북한에서 오는 피난민인데 하룻밤 묵어 갈 수 없을까요?”

목소리가 기어 들어간다. 부인은 말없이 우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우리의 몰골이 측은하게 보였을까. 온정의 빛이 눈에 어린다. 사실 우리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입은 채로 배에서 20일을 뒹굴었으니 옷은 형편없이 더러워졌고 목욕은 고사하고 세수도 제대로 못하였으니 머리는 부스스하고 수염은 덥수룩했다. 그런 모습으로 매서운 바닷바람에 떨고 서있는 모습에 아마도 母性愛(모성애)가 동했을 것이다. 우리보고 들어오란다. 그리하여 우리는 문간방에 들어갔다. 빈 방에 들어간 둘은 말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말할 기분도 말할 기운도 없었다.

한 서른쯤 된 젊은이가 들어왔다. 큰아들이었다. 문간방에 피난민이라는 젊은이를 들였는데 혹시 피난민을 가장한 간첩이나 공비는 아닌지 신원을 확인하여 보려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나자 따져 묻기 시작한다.

“어디서 오는가?”
“함흥에서 옵니다.”
“북한에선 무엇을 하였는가?”
“학생이었습니다”
“무슨 학교에 다녔는가?”
“함흥의과대학에 다녔습니다.”

그는 더 이상은 묻지 않고 나가버렸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우리가 의대생이라는 말에 “옳지 잘 걸렸다. 너희가 의대생인지 아닌지는 내 아우가 의대생이니 금방 밝혀질 것이다. 만약 거짓으로 밝혀지면 학생을 가장한 공비나 간첩이 틀림없을 것이니 바로 경찰서에 신고할 것이다”고 하였단다.

둘째 아들이 확인하러 들어왔다. 그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4학년에 재학하는 정심적 씨로, 1951년 2월에 졸업이 예정돼 있었다. 우리는 북한과 남한의 실정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그는 소련 과학 아카데미 회원인 오파린 박사의 코아세르베이션(coacervation) 이론에 관심이 많았다. 그날 밤은 그 집에서 오랜만에 편한 잠을 잘 수 있었다.

50여 채 집마다 ‘방이 없어 재워줄 수 없다’고 거절

길은 다시 계속되었다. 몸은 천근만근 체력의 한계를 느낀다. 고달픈 떠돌이 신세, 언제나 끝을 낼 수 있을까. 백년설이 불렀던가. <나그네 설움>의 가사가 생각난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 길 지나온 자국마다 눈물 고였네.”

이게 바로 우리의 처지가 아닌가? 부산에 간다지만 부산에 간들 뾰족한 수가 있을 것도 아니겠고, 가야 하는데 갈 곳도 오라는 데도 없는 유랑의 신세, 처량하고 막막하기만 하다. 암울한 현실 앞에 왜소한 내 모습이 너무도 무력하게 느껴졌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일러주시던 할머니 말씀이 떠올라 스스로를 곰곰 되돌아보았다.

한 칠십 리 걸었을까. 점촌에 이르렀다. 날이 저물어 간다. 잘 집을 찾아야 하는데 겁부터 났다. 초가집이 5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어촌, 큰 기와집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과연 저 가운데 우리를 재워줄 집이 있을까? 50여 채 되는 집을 빠짐없이 돌며 사정하여 보았다. 그러나 예상대로 방이 없어 재워 줄 수 없단다. 북한의 가옥은 겹집으로 되어 있어, 작은 집도 방이 네 개는 있다. 남한의 농가 구조도 북한 집과 외관상 비슷하여 방이 네 개는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도 방이 없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慶州로 향하다

겨우 받아주는 집을 찾았다. 집에 들어가 보고서야 방이 없다는 말이 빈 말이 아님을 알았다. 안방과 웃방 방 두 개뿐이니 손님을 재울 수 없는 구조였다. 저녁을 먹고 나자 주인이 따라오라며 마당에 나가더니 장작 네 개비를 새끼줄에 묶어 들고는 앞장선다. 간 곳은 마을회관이었다. 부엌 아궁이에 장작 네 개비를 지피고 여기서 자란다. 방에 들어갔더니 방바닥이 얼음장 같다. 겨울 내내 사람이 기거하지 않았으니 그럴 수밖에…. 침구라곤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목침뿐이다. 방바닥을 만져보니 溫氣(온기)라곤 없다. 피곤하여 졸리니 눈을 붙여야 하는데 을씨년스럽다. 추워서 몸이 덜덜 떨리니 잠들 수가 없다. 추위에 떨며 날밤을 새자니 죽을 맛이었다. 빨리 날이 밝기나 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동지섣달 긴긴 밤이라더니 너무나 길다.

점촌을 뒤로 하고 길을 나서기는 하였는데 잠자리 구할 걱정이 태산 같다. 하는 수 없다. 이제부터는 파출소에 찾아가 염치불구하고 잘 곳을 주선하여 달라고 떼써보기로 하였다. 그날 저녁 무렵에 포항 양포읍에 이르렀다. 마침 길가에 파출소가 있어 들어갔다. 형사가 홀로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사정을 말하였더니 친절하게 대해준다. 자기도 고향이 평양이라며 동정적이다.

어디에 갈 것인가 묻기에 부산에 갈 것이라 하였다. 부산엔 친척이라도 있는가 하는 물음에 없다고 하였더니 그러면 왜 하필이면 먼 부산에 가려 하는가? 하고 묻는다. 북한에서 의대를 다녔으니 부산의 병원에서 조수로라도 일하다가 유엔군이 북진하면 따라서 고향에 갈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부산까지 갈 것 없이 여기서 고개 하나만 넘으면 경주인데 경주에는 제 15, 16, 18 육군병원이 주둔하고 있어 일자리 구하기가 쉬울 테니 경주에 가는 게 낫지 않겠는가” 하고 충고하여 준다. 우리는 결국 그의 충고를 따르기로 하였다. 부산으로 가려던 발길을 경주로 돌리고 말았다.

함흥의대생들도 월남해 서울의대 졸업

이것이 인생의 갈림길임을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전쟁이 터지자 서울대학교는 부산으로 피난하여 開校(개교)했다. 전쟁 중이라는 이런저런 이유로 결원이 많아 편입학의 길이 있었다. 함흥의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분들도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와서 개업하거나 軍병원에서 도와주고 있었다. 그분들이 보증해주면 의대 학생임을 인정받아 청강생으로 한 학기 수강한 후 정규 학생으로 등록하여 서울대 의대를 졸업할 수 있었다. 이렇게 졸업한 동기생이 20여 명은 된다. 우리는 경주로 발길을 돌리는 바람에 인생길이 달라졌다.

양포를 떠나 험한 고개를 넘어 해질 무렵에 덕촌이라는 작은 농촌마을에 도착하였다. 경주까지는 20리밖에 안 된단다. 그곳 농가에서 하룻밤 신세지고 다음날 정오경에 경주에 도착하니 1951년 1월 1일 설날이었다. 우선 경주 경찰서로 찾아갔다. 공휴일이라 당직 경찰관이 찾아오는 피난민들에게 피난민 증명서를 발급해주고 있었다. 별다른 조사나 심문 없이 불러 주는 대로 기입하고는 경찰서장의 직인을 찍어 교부해주고 있었다. 너무나 쉽게 발급하여주니 이래도 되나 의아스러웠다. 근처 피난민 연락소에 들러 등록을 하였더니 구호품으로 안남미 쌀 두 되씩, 담요 한 장 씩을 준다.

함흥의대 친구가 사준 우동 네 그릇

연락소를 나왔으나 갈 곳이 없다. 점심 때가 훨씬 지났으니 배가 고프다. 설날이니 점심은 먹어야 하는데 돈이 없다. 그나마 가진 것이라고는 오징어뿐이니, 오징어를 팔려고 시장을 찾았다. 오징어 한 축에 2200환씩 다섯 축에 1만1000환을 받았다. 구호품 쌀도 파는 수밖에 없었다. 한 말에 3000환씩 쳐서 넉 되에 1200환을 받았다. 이게 총재산이니 아껴야 했다. 이제 점심도 먹었으니 남한의 시장 풍경이 궁금하여 시장을 돌아보기로 하였다. 돈이 없으니 잠도, 밥도 공짜로 해결해야 하는 막막한 처지인데도 한가하게 시장 구경이나 하려 한다고 철딱서니 없는 철부지라고 나무랄 수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그것은 철없이 구는 치기도 무모한 만용도 아니다. 젊은이기에 가질 수 있는 자신감에서 오는 여유로움이라고 이해하는 게 옳지 않을까?

시장은 피난민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북한에서 온 피난민들, 서울 등지에서 온 피난민들, 부산으로 가는 도중에 들린 피난민들로 붐볐다. 사람들 틈에 끼어 밀려가다가 그 많은 사람들 틈에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학교 친구 김신현이 아닌가? 미군 군복을 입은 그는 몰라보게 변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함흥에서 미군부대 통역으로 근무하다가 부대와 함께 경주로 철수하였단다. 점심을 사준다고 우동 가게에 들어갔다. 한 그릇에 300환 하는 우동 네 그릇을 주문하여 두 그릇씩 먹으란다. 허겁지겁 먹고 있는데 그는 호주머니에 있는 것을 모두 꺼낸다. 양담배, 껌, 캔디, 돈을 꺼내서 전부 우리에게 주니 우정의 고마움을 새삼 느꼈다. 우리는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미군 부대 통역으로 일하며 北進을 기대했으나…

그 때 경주에는 북한에 진주하였다가 철수한 미군 군단 본부가 주둔하고 있었다. 얼마 후 그 친구의 주선으로 미군 부대에 일자리를 얻었다. 나는 美10군단 제4통신대 통역으로, 친구는 美10군단 210. C. I. C 통역으로 일하게 돼 정말 다행이었다.

1월 말에 부대가 충주로 이동하였다. 충주에 한 달 가량 머물다가 2월 말에 제천으로 옮겨 갔다. 제천에 5개월 가량 주둔하다가 홍천을 거쳐, 1951년 10월 말경에 강원도 인제군 관대리로 이동하였다. 피난민들은 신이 났다. 이런 속도로 북진하면 고향 갈 날도 머지않았다고 흥분하였다. 기대에 부푼 모두의 얼굴에는 웃음이 넘쳤다.

그러나 戰況은 그렇지가 않았다. 관대리에 눌러 앉은 부대는 요지부동이다. 단 한 뼘도 움직이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자 휴전에 대한 이야기가 떠돌더니 마침내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피난민의 시름은 점점 깊어만 가고 있었다. 기어이 고향에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피난민의 간절한 소망은 점점 멀어져만 가고 있었다. 1953년 7월에 휴전이 되니 넉넉잡고 석 달이면 돌아갈 것이라고 믿고 떠나온 피난길이 영영 돌아갈 수 없는 불귀의 길이 되고 말 것 같으니 실향민의 심정이야 오죽하였을까? 1954년 2월, 홍천농업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발령 받아 교단에 서게 됐고, 교직이 나의 천직이 되었다.

휴전이 되어 총성은 멎었으나 전쟁이 할퀴고 간 傷痕(상흔)은 너무도 크고 깊었다. 전쟁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삶의 터전이 송두리째 허물어졌으니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부족했다. 하루하루 끼니를 이어가기가 버거운 힘든 삶의 연속이었다. 미국이 구호물자로 보내온 안남미, 보리쌀, 밀가루, 옥수수 가루, 우유 가루가 아니었다면 아마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였을 것이다. 미군용 담요 한두 장 없는 집이 없었다. 입을 것이 없어 미군 군복을 염색하거나 탈색하여 입었다. 구호물자 양복 한 벌 얻어 입으면 그게 최고의 나들이 옷이었다.

생활이 어려워 슈샤인(shoe-shine) 보이로 나서는 소년들은 구두닦이 통을 메고 미군을 찾아다니며 구두를 닦아 가계를 도왔다. 미군 천막이나 숙소에서 청소하고 심부름 하는 하우스보이로 일하며 살림을 돕는 소년들, 시장에서 미국 달러를 사고파는 암달러상이나, 단속의 눈을 피해가며 양키 물건을 암거래하여 가계를 근근이 꾸려가는 억척 주부들, 다방이나 음식점을 돌면서 고사리 같은 가냘픈 손으로 껌을 팔아 끼니를 이어가는 어린이들, 철부지 꼬마들은 '깁미 껌(Give me gum), 깁미 쪼코레트(Give me chocolate)'하며 미군을 쫓아다녀야 했다. 이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 또 있을까?

의사 대신 교사로서의 삶

교육 여건도 열악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교실이 부족하여 일부 학생은 미군용 천막에서 수업을 하니 여름에는 더워서, 겨울에는 추워서 고역이었다. 점심 시간에는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아이들이 수돗가에서 주린 배를 물로 채워야 했으니 1인당 국민소득이 100불도 안 되는 가난한 나라의 국민이기 때문에 겪어야 할 숙명치고는 너무도 가혹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아침 학급 조회시간에 교실에 들어갔다. 한 학생이 벌건 얼굴로 앉아있다. 수상하여 불러냈더니 술 냄새가 난다. 술 먹고 버젓이 학교에 오다니 발칙한 놈이라는 생각에 화가 났다.

“술 먹었어?”라고 하니 “술 안 마셨습니다.”라고 답한다. “술 냄새가 나는 데도 안마셨어?”오리발을 내민다고 화가 나서 언성을 높였다. “술 냄새요? 정말 안마셨습니다. 술 냄새가 난다면 아마 술지게미 때문인가 봅니다. 밥이 없어 어머니께서 이웃에서 얻어온 술지게미를 먹었더니 술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다.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에 말문이 막혔다.

석 달마다 돌아오는 分期末(분기 말)이 되면 수업료 때문에 학생들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을 해야 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경제사정이 어려워 수업료 미납자가 많아 학교 운영이 어렵다고 납입을 독촉하라고 선생들을 닦달한다. 미납한 학생을 집에 돌려보내란다. 돌려보내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학교 방침이니 따를 수밖에…. 교실에서 열심히 수업을 받고 있는 학생을 집에 돌려보낸다는 것은 교사에겐 내키지 않는 정말 하기 싫은 일이었다. 그래도 배움에 대한 학생들의 학구열은 뜨거워 식을 줄 몰랐다. 그들의 배움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겨레의 희망이며 험하고 고된 삶을 견디어 내게 하는 버팀목이었다.

교사의 처우도 말이 아니었다. 1954년 2월에 첫 봉급을 받았다. 일금 4300원, 무상으로 주는 쌀과 보리쌀 서 말씩, 학교 기성회에서 주는 기성회 수당 6000원, 이게 전부였다. 정말 쥐꼬리만한 보수였다. 당시 쌀 한 말에 4000원이었다. 그래도 보수가 적다고 처우가 나쁘다고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려운 고비를 넘겨 이렇게 살아남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생각하며 열심히 가르쳤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노력뿐임을 알기에 모두는 허리띠를 졸라 맸다.

피난민들의 원통하고 허망한 마음을…

결국 우리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이는 우리의 성실함고 근면함에 대한 하늘의 보답 아니겠는가? 그런데 칠천만 겨레가 그토록 바라는 통일은 언제쯤 이루어질까? '통일은 대박'이라고 하는데 그 통일 대박을 우리는 언제쯤 이룩할 수 있을까? 피난민에겐 통일은 오매불망 못 잊어 하는 혈육을 만나는 날이 될 것인데…. 고향을 떠난 지 65년, 그 긴 세월 동안 어느 한 순간인들 부모형제를 잊은 적이 있었던가? 피난 초기엔 할머니 생전에 돌아가야 하는데 하고 조바심 내며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느긋하게 기다리자”고 마음을 달래었다. 아무렴 부모님 생전에야 돌아갈 수 있겠지 하고…. 그러나 그 바람마저도 허물어졌다. 마지막 남은 소망은 살아서 고향 땅 밟아 부모님 산소에 술 한 잔 올리는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살아온 한 평생인데 이제 그것마저도 버려야 할 것 같다. 내 나이 90이 되어 가니 버릴 수밖에 없지 않는가?

인생은 空手來空手去(공수래공수거)라 하였으니, 이제 나도 모든 바람 내려놓고 빈 손으로 가야 할 것 같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버린 피난민 1세들, 잊을 수 없는 혈육의 그리움을 간직한 채 유명을 달리하고 있는 이 애절한 현실을 공감하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맺힌 사연들이 풍화되어 잊혀져 가는 현실에 피난민들의 마음은 무너져 내린다. 뼈에 사무치는 혈육에의 그리움 떨쳐버리지 못하고 힘겹게 붙잡고 매달려 내려놓지 못하는 피난민들의 원통하고 허망한 그 마음 어찌 할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