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주판(珠板)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얘기를 하면 대다수가 우선 설마 하는 반응부터 보인다. 조선이 중국 일본에 비해 상업적 발전이 좀 뒤처지긴 했지만 그러기야 했겠냐는 것이다. 개성상인들의 부기(簿記)를 반증의 예로 들기도 한다. 그런 정도의 복잡한 부기법이 있었는데 주판을 사용하지 않았을 리가 있겠냐는 생각이겠다.

놀라운 송도부기, 그러나 주판은 사용하지 않았다

사실 개성상인들의 부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한국수학사>(2009.01.14. 김용운, 김용국 공저 /살림)에선 개성 부기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폐쇄적인 상인사회 내부에서 행해졌기 때문에 주변에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개성상인들 사이에서 차츰 형성된 이른바 <송도부기 松都簿記> 또는 ‘사개송도치부법(四介松都治簿法)’은 본질적으로 현재의 복식부기(複式簿記)와 같다는 점에서 상업이 수학에 영향을 끼치는 일이 거의 없었던 한국 수학사에서 그야말로 경이적인 발명이었다.”

지적대로 송도부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개성상인들의 이 대단한 부기도 주판을 이용한 주산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한국수학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주산이 보급되지 않았던 한반도의 소규모 상업활동 속에서 왜 부기술만이 유독 발달하였는가에 대한 의문이 당연히 제기될 만하다. 이에 대해 가능한 답 중 하나가, 전통사회의 독특한 상업 형태가 바로 고리대 상업자본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개성에서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 대규모의 고리대금업이 성행하고 있었다. (…) 前자본주의의 마지막 선인 상업자본의 축적이 진전을 본 개성에서가 아니면 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삼국시대 이래 관권이 관리했던 고리대는 일종의 공공연한 수탈 수단일 뿐만 아니라, 서민 사이의 상거래에서도 일반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경제구조 속에서는 기록의 중요성이 계산 그 자체보다도 훨씬 컸을 것이다. (…) 개성의 화폐 자본가 사이에서는 끊임없이 지출・수입되는 대규모의 복잡한 수치를 빠짐없이 기록하기 위한 기장법이 무엇보다도 절실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상업적 발달이 사실상 거의 전무했다. 중농억상(重農抑商)의 주자학 체제의 결과였다. 주자학 체제가 성공적이었던 그 만큼 상업적 발달은 억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성공적인 삶이란 오직 문신관료로 입신출세하는 것 하나였다. 모두가 과거에 몰두했다. 그런데 거기에서 상대적으로 예외적인 지역이 황해도 평안도 등 서북지역이었다. 서북지역 출신들은 조선시대 내내 과거를 통한 등용에서 소외돼 있었다. 바로 이렇게 조선시대의 유일한 사회적 성공의 줄에서 소외돼 있었던 덕분에 서북지역에선 역설적이게도 상업활동이 활발했다. 개성상인 의주상인 등은 청나라 일본 등과의 무역을 통해 부를 쌓았다. 개성상인들은 이렇게 대외무역으로 축적한 부를 지역 내에선 고리대로 다시 운용했다. 송도부기의 발달은  그 결과였다는 것이다.

주판 사용법이 전해지긴 했지만...

이렇듯 그나마 상업활동이 활발했던 서북지역에서도 기록을 위한 기장법은 발달했지만 주판은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니 상업활동이 거의 성장하지 않았던 여타 지역에서 주판이 널리 사용될 리가 없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주판이 사용되지 않았던 것은 상업활동의 미약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국수학사>는 그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는 주판이 일반에게 급격히 보급되었지만, 조선사회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당시 조선에 주판셈의 방법이 전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주판의 책’으로 알려진 정대위의 <산법통종>은 출간되자마자(1593) 곧바로 조선에 소개되었다. (…) <산법통종>의 보급률은 상당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 주판을 사용해서 계산을 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의 예만 보인다. 주판셈을 소개한 수학책으로 조선 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주학신편 籌學新編>이 있는데, 이 책의 저자는 <구수략>처럼 주산을 배격하지는 않지만, 주판의 구조에 대해서 (…) 기본적인 설명만으로 끝내고 계산 방법에 대해선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저자 자신도 사실은 주판셈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산가지 계산을 신성시한 조선의 유학자

<구수략 九數略>은 숙종 때인 1700년 영의정 최석정이 지어 간행한 조선시대의 수학책이다. <구수략>은 마방진에 대한 연구를 싣고 있는 등 한편에서는 동양 수학의 걸작으로 칭송된다. 그러나 계산 방식으로는 주역과 음양사상을 바탕으로 한 산가지 계산방식을 신성시하고 주판에 의한 주산을 배격하고 있다. 이렇게 산가지 숭앙 분위기로 인해 “<구수략> 이후 200년이 지난 개화기에조차도 여전히 주산은 냉대 받고 있었던 것이다.”(<한국수학사>)

“<구수략>에서 볼 수 있는 공격적인 반발, <주학신편>의 엉성하고 소극적인 소개, 심지어는 주판셈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은 수학책이 많았다는 것은 사대부층과 산학자 사회에서는 물론 기타 식자층에도 주판이 보급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한국수학사>는 <구수략>의 저자인 최석정에 대해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유학자며 역학자였을 뿐 아니라 조정의 고위관리였던 최석정의 경우는 물론, 중인(中人) 산학자를 포함한 식자층의 일반적인 경향은 본질적으로 상인사회와 절연되어 있었다는 것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특히 역학에 심취하였던 최석정의 후예 즉 보수적인 교양사회는 산가지에 의식적으로 더 집착했다. 죽산(포산)은 역학자에게는 역의 팔괘와 상통하는 권위를 지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산가지 숭배 경향은 중국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중국에선 상업의 활발한 성장과 함께 주판의 사용이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산가지에 의한) 포산을 제외한 다른 모든 계산법을 배척하는, 중국보다 훨씬 극단적인 정통주의로 일관했다.”

백성들에겐 주판셈을 사용할 만한 상행위 자체가 없었다

그렇다면 일반 백성들의 경우는 어땠을까? 철저히 농업에 매여 있고 자생적인 상업활동의 성장이 극히 미약했던 만큼 주판셈이 보급될 까닭이 없었다.

“읽기・쓰기・주판셈을 서민 교육의 목표로 삼았던 에도시대처럼, 널리 일반에게까지 주산이 확대 보급될 가능성이 조선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 조선에서는 주판셈과 같이 계산 기술이 중요시될 정도로 서민 생활 속에 상행위가 파고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업활동이 민간사회 속에 기반을 두지 못했고, 유럽의 상업도시는 차치하고라도 중국이나 일본에 비길 정도의 상업사회조차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전통사회의 가부장적 존재로 군림한 관인 조직과의 유착에 의해서만 상행위가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업은 아예 처음부터 독립적으로 성장할 기반을 박탈당했던 것이다.”

“(…) 수탈 경제 아래의 민중생활에서 질서 있는 유통사회의 산물인 ‘시민 수학’이 중요시될 턱이 없었다. 실용적인 쓸모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통념으로도 말이다.”

<한국수학사>의 저자 김용운

<한국수학사>의 저자 김용운 교수는 한일관계와 일본문제 관련 저술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분이다. 하지만 본업은 수학이다. 특히 수학사에 있어선 한국에선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세계 수학사를 정리한 <김용운의 수학사>(201307.10. 살림)라는 저서도 있으며, 한국수학사학회 회장이기도 하다. (1927년생이니 한국 나이로는 90이다. 하지만 여전히 현역이다.)

<한국수학사>는 본래 1977년 초판이 발간됐었는데 두 번의 개정판을 거쳐 2009년 새롭게 개정증보판을 냈다. 공동저자인 김용운(金容雲) 김용국(金容局), 비슷한 이름에서 혹시 하는 느낌이 있었다면, 맞다. 두 사람은 형제이기도 하다.

수학의 발달, 특히 ‘시민 수학’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발달과 밀접히 결합돼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맹아 혹은 근대적 요소는 그러한 측면에서도 살펴 볼 수 있다. 계산 도구의 발달은 특히 더 그러하다. ‘조선시대의 주판’ 문제에서 그 점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수학사에 관심 있는 분이 아니라도 사회경제사적 관점에서 부분적으로라도 읽어볼만하다 생각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