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 26일, 일본 해상자위대 관함식에 참여하기 위해
한 명의 영국 노신사가 일본을 방문했다. 당시 84세의 고령
에 신장병까지 앓고 있던 노신사는 영국의 前외교관 '사무엘
폴'씨다. 그는, 죽기 전에 꼭 일본을 찾아와야 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했다. 그는 부축을 받으며 일본 함정에 승선했다.

'내가 죽기 전에, 어떻게든 그 때 일에 대한 禮를 정식으로 표
하고, 그 때 있었던 일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
니다.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그 사람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자리에 앉은 '사무엘 폴'씨는, 61년 이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그 때까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1942년 2월28일 동남아시아 자바
섬의 북서쪽 스라바야 해상에서 펼쳐진 일본해군과, 영국해
군을 비롯한 연합군 함대 간의 해전 상황으로부터 시작되었
다.

당시 전투는 일본해군의 압도적 우위였다. 이틀 동안 이어진
전투에서 영군해군을 비롯한 연합군측 함정은 속속 격침되었
다. '사무엘 폴'(당시 소위)씨가 승선한 영국 구축함 인카운
터號 역시 일본 전함의 공격을 받아 엔진이 파괴되는 등 침
몰 상황이 되었다. '폴'씨를 비롯한 영국 해군병사들은 바다
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1942년 3월1일 오후 2시에 영국
구축함 인카운터號는 일본 전함의 집중 함포사격으로 완전
히 침몰하고 말았다.

전투는 끝났지만, 바다로 뛰어든 영국 병사들에게 있어 지옥
은 그 때부터 비로소 시작이었다. 해상에 퍼진 重油로 온몸이
기름 범벅이 되었고 눈을 제대로 뜰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침몰한 인카운터號 소속 병사를 포함해, 해상에는 400명 이
상의 병사들이 표류를 하게 되었다. 8명 정원의 구명보트는
8척이 떠있을 뿐이었고, 대부분의 표류자들은 널판지 등 나
무조각에 겨우 몸을 의지한 채 사투를 지속해야만 했다. 당
시 '폴'씨는 '네덜란드군이 반드시 구조하러 올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구축함 침몰 직전에 긴급구조요청 무선
을 타전했는데 근처 인도네시아 해변에 네덜란드군 기지
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구조대는 오지 않았다. 대신, 상
어가, 무방비 상태로 표류 중인 병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
고 표류자들은 패닉상태에 빠졌다. 저녁을 지나 밤중이 되
자, 체념하는 병사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표류자들의 절망
감은 더욱 깊어져 갔다. '폴'씨는 당시, 밀려오는 절망 가
운데에서도 영국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간신히 마음
을 추스렸다.

다음 날 오전 10시, 표류한 지 20시간이 경과한 시점에서
표류자들은 아무 것도 먹고 마시지 못한 상태가 되어 전
부 탈진했고, 내려쬐는 강렬한 태양 아래 서서히 절망적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급기야 절망감과 육체적 고통
을 견디지 못해 자살을 기도하는 경우까지 생겨났다.

그런데 이러한 절박한 상황 가운데 갑자기, 저 멀리 배가
한 척 보였다. 표류자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혼신의 힘을
다해 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폴'씨를 비롯한 표류자들
은 네덜란드 해군이 구조를 위해 접근하고 있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유심히 배를 바라보던 '폴'씨는 경악
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네덜란드 군함이 아니라, 바로 敵
軍 일본의 구축함 '이카즈치'(雷)였다. '이카즈치'(雷)는,
승조원 220명의 소형급 구축함이지만, 연합군 전함을 세
척이나 침몰시킨 전과를 자랑하는 함정이었다. 함장은 '구
도 슌사쿠'(工藤俊作, 당시 40세) 소좌(소령)로서 신장
185 센티미터, 체중 90킬로의 신체를 가진 인물이었다.
'이카즈치' 함상의 관측병은 멀리서 이들 표류자를 발견
하고, '다수의 부유물 발견'이라는 보고를 해놓은 상태였
다.

그런데, 해당 해역은 미군 잠수함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곳
으로서 '구도'(工藤) 함장은 보고된 '부유물'과 관련해, '미
군 잠수함이 함정을 공격한 흔적'일 수 있다고 판단하고 본
격 경계태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불과 한 달 전에 미군 잠
수함의 어뢰 1발에 피격된 경험을 갖고 있는 구축함 '이카
즈치'의 함장으로서 경계를 조금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얼마 전에 일본 유조선이 바로 이곳에서 미군 잠수
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까지 된 일이 있기 때문에, 가
급적 이곳을 빨리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구도'(工藤) 함장은 인근에 미군 잠수함이 존재할 가능성
이 크다는 판단을 내리고 즉시 함내에 전투준비 명령을 하
달했다. 남은 것은, 속히 그곳으로부터 벗어나는 일 뿐이
었다. 그 때 관측병으로부터 2차 보고가 올라왔다.

'부유물은 敵軍 병사들로 확인!, 400명 이상으로 추정!'

'구도'(工藤) 함장은 근처에 잠망경 같은 수상한 물체가
확인되는지 여부를 추가 경계토록 지시한 후, 구축함의
항로를 표류자들 쪽으로 돌리도록 명령했다. 표류자들과
구축함 간의 거리는, 기관총 유효사거리로 좁혀졌다. 자
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함정이 일본 구축함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된 표류자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기총 소사로 우리 모두가 벌집이 될 것'이라며
표류자들은 공포와 절망의 도가니에 빠졌다.

'구도'(工藤) 함장은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그곳은 미군
잠수함 활동 해역이기 때문에 잠시라도 그곳에서 지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폴'씨는 점점 다가 오는 일본 구
축함을 보면서 이제 끝난 목숨이라고 생각하고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다른 표류자들도 이미 체념 상태
가 되었다. 그 순간 '구도'(工藤) 함장은 함내에 명령을
내렸다.

'敵兵들을…구조하라!'

함정에는 즉시 깃발이 높이 게양되었다. 구난활동 중이라
는 것을 알리는 국제공통의 신호旗였다. 구난 신호기를 확
인한 표류자들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간 기분이 되었다. 구축함 갑판에 있던 일부 병사들
은 불만을 터뜨렸다.

'敵兵을 구조하라고? 함장 제 정신인가?'

'우린 200명이고, 저들은 400명인데, 구조 후 기운 차린
저들이 폭동이라도 일으키면 어떻하려고!'

'구도'(工藤) 함장의 의사결정은, 해군학교 등을 통해 그
동안 배워온 '무사도'에 따른 것이었다. 비록 전쟁 중이라
도 곤경에 처한 적을 돌보지 않는 것은 정정당당한 싸움이
아니라는 정신이었다. 이렇게 해서, 구조 작업은 시작되었
다. 구조는, 부상자 등 위중한 상태의 표류자를 우선적으
로 일본 병사들이 끌어올리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내 문제가 생겼다. 20시간 이상 사투를 해온 표류자들
대부분이 탈진 상태가 되어 자력으로 올라오기가 힘든 상
황이었다. 일본 병사들이 이들을 부축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었지만, 일손이 너무 부족했다. '구도'(工藤) 함장은 두
번째 결단을 내려야 했다.

'1번 砲 배치 병력만을 제외한 전원이 구조활동에 임하라!'

위험 해역에 머문 상태에서 나아가 사실상 무장해제 수준
까지 감수하면서 일본 병사들 대부분을 구조활동에 투입
한 것이다. 일본 병사들은, 갑판으로 건져 올려진 표류자
들의 기름 투성이 몸을 알콜 등으로 일일이 닦아주었다.
그 순간 만큼은 적과 아군이 따로 없었다. 아울러, 생명
과도 같은 보급품인 물(水)과 음식들을 이들 표류자들에
게 제공했다. 저녁 무렵 구조활동은 끝이 났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구도'(工藤) 함장은, 표류자들이 더 있을 것으로 예상
되는 서쪽으로 항로를 바꾸라는 지시를 내렸다. 참모진
의 '구조활동을 계속하다가 나중에 전투상황이 벌어지
면 연료가 부족해 낭패를 볼 우려가 있다'는 의견에도
'구도'(工藤) 함장은, '표류자는 한 명이라도 놓치면 안
된다, 전원구조해야 한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추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던 잔여 표류자들도 구조하
여, 최종적으로 구조된 영국 해군은 422명에 달했다.

그 날 밤에 '폴'씨 등 영국 장교들은 따로 호출을 받아
'구도'(工藤) 함장과 만나게 되었다. 그때 '구도'(工藤)
함장은, 격식을 갖추어 '폴'씨 등을 대하며 이렇게 말
했다.

'諸官들(그대 영국 將兵들)은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때문에, 諸官들은 우리 일본해군의 명예로운 게스트
(손님) 입니다.'

다음 날, 영국 해군 422명은, 포로로서 일본 병원船으
로 옮겨타게 되었고, 終戰과 함께 영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이후 '폴'씨는 영국의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1996년 '폴'씨는 '마이 럭키 라이프(나의 행운
의 인생)'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 서문에, 자신의 아내
와 가족 등을 열거하고 '이 책을 나의 목숨을 구해준
일본제국해군의 구도 슌사쿠에게 바칩니다'라고 썼다.
'폴'씨는 이렇게 말했다.

'한 두 명의 소규모 표류자를 구해 주는 경우는 있지만,
이렇게 많은 적군을 구조해 준 사례는 없을 것입니다.
일본의 무사도에 존경을 표합니다. 이런 무사도 정신을
실천하며 나의 목숨을 구해준 구도 슌사쿠 함장에게
내가 죽기 전에 정식으로 감사의 뜻을 전하고자 일본을
찾아 왔습니다'

하지만, 구도 슌사쿠 함장의 소식은 끝내 알 수가 없었
다. 전쟁 당시 구도(工藤) 함장은 구축함 이카즈치(雷)
에서 다른 함정으로 인사이동을 했는데, 이후 구축함 이
카즈치(雷)가 미군의 공격으로 격침되어 승조원 전원이
전사했다. 이러한 충격 때문인지, '구도'(工藤) 함장은
終戰 이후로 전우들과의 만남을 일체 갖지 않았다. 나
중에 확인한 결과, '구도'(工藤) 함장은 1979년 1월4일
별세했다(향년 77세).

2003년 '폴'씨의 일본 방문을 계기로, 해상자위대 관계
자가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고자 '구도'(工藤) 함장과 친
분이 있었던 옛날 사람 등을 만났을 때도 모두가 이 일
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 '구도'(工藤) 함장
은, 이 일에 대해 생전에 아무에게도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폴'씨가 아니었다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폴'씨가 영국으로 돌아간 이후,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
로 '구도'(工藤) 함장이 묻힌 묘지 소재지가 확인되고
유족들과도 정식으로 연락이 닿았다. 2008년 12월 '폴'
씨는 매우 불편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구도'(工藤) 함
장 추도식에 참석하기 위해 몸소 일본까지 찾아와 묘
지에 헌화했다. '구도'(工藤) 함장은, 살아 생전에 이
일에 대해서는 가족들에게도 전혀 이야기한 적이 없
었다. 그런데 딱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생전에 '구도'(工藤) 함장이 계속 타고 다니던 자전거
가 너무 오래되어 더이상 탈 수 없을 만큼 낡은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도 '구도'(工藤) 함장은 계속 그 자전거
를 고집했다고 한다. 보고 있던 조카 딸이, '새 자전거
로 좀 바꾸시지 그러세요?'라고 했다. 그 때 '구도'(工
藤) 함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옛날에 영국군으로부터 얻은 소중한 자전거라서, 버
릴 수 없다.'

https://youtu.be/QAevTFqLE0w
https://youtu.be/ItdMS8N-gk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