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병원으로 혈압약 처방을 받으러 가는 길이었다. 아파트에서 이삿짐이 나가는 게 보였다. 더러 엘리베이터에서 만나 인사를 하던 오십대 중반쯤의 부부가 집을 팔고 이사를 가는 것 같았다. 아내는 대학교수고 남편은 전 대법관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 대법관은 존경할 만한 분이었다.

판사들은 대법원장이라는 최종 종착지에 오르기 위해 무한경쟁을 벌인다. 그의 아버지는 군사정권 시절 대통령이 대법원장을 하라고 하는데도 조용히 사양한 인물이었다. 독재정권의 입맛에 맞는 사법부의 수장이 되기 싫었던 것 같다. 높은 관직보다 소리내지 않고 그걸 거절하는 사람이 위대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 아들은 다른 것 같았다. 아마도 가족을 고생시킨 아버지의 강직이 달갑지 않았던 것 같았다. 얼마 전 아내를 통해 그 집 부인이 당한 낭패를 전해 들었다. 그 집 아내는 어떤 예술단체의 재정자금 이십억 원을 잠시 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친구 한 명이 찾아와 그 돈을 사흘만 자기의 은행구좌에 넣어달라고 했다. 그 다음에 바로 송금해서 원상회복하겠다고 했다. 다급한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인정에 끌려 그렇게 해 주었다. 그러나 사흘 후 그 돈은 돌아오지 않았다. 친구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성경 속의 욥기같이 갑자기 닥친 불행이었다. 단체의 돈을 관리하던 아파트 이웃의 그 부인은 넋이 나간 사람이 되어 버렸다. 아파트를 팔고 이사를 가는 것이다.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졍글이다. 틈만 보이면 여우같은 인간이 스며들어 재산을 물고 달아난다.

또 다른 불행이 있었다. 아파트 옆동에 음대 지망의 고등학생들에게 플룻을 개인레슨 하는 영감이 살고 있었다. 그가 어느 날 제자로부터 성추행으로 고소를 당했다. 그가 이웃에 사는 변호사인 내게 와서 상담을 했다. 법 근처에는 가보지 않은 그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별 게 아니었다. 악기를 불기 위해서는 호흡법을 먼저 가르쳐야 하는데 긴 의자에 눕게 한 채 들숨 날숨을 알려주다가 여학생의 배를 건드린 게 발단이었다. 그 사실 자체보다는 여학생이 음대 입시에서 낙방한 게 더 원한을 산 것 같았다. 선생이 뒤에서 교수들에게 로비를 하지 않아 떨어졌다고 오해를 한다는 것이다. 그게 고소의 배경 같았다. 그 얼마 후였다. 그 영감이 자살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변호사를 하면서 보는 세상의 불행은 여러 가지였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불행의 질감과 농도도 다양했다. 오래 전에 사형수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깜깜한 암흑 속에서 어떤 고난을 당해도 존재 자체가 행복이라고 했다.

암으로 죽어가던 부자의 애절함을 본 적이 있다. 일생 돈의 노예가 되어 살던 그는 그 돈들을 전부 불태워버리거나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다고 외쳤다. 친구에게 속아 재산을 잃은 착한 부부에게는 하나님이 그보다 더 귀한 것을 그들의 영혼에 부어주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파트 주위를 맴도는 자살한 플룻 선생의 혼도 지금쯤 별 것 아닌 걸 가지고 너무 심각하게 생각했다고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게 상담을 하러 왔을 때 좀 더 잘해주고 안심을 시킬 걸 하는 아쉬움이 든다.

살다 보면 재산을 날리고 병이 들고 모함을 받기도 하는 여러 고난이 온다. 선한 마음 결백한 사람에게 오는 그런 고통들은 또 다른 하나님의 검은 은혜라고 하는데 아직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