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아래는 6.25 動亂 중 記者의 부친이 목격한 美軍 포로 이야기이다.

찌는 듯이 무덥던 6.25전쟁 당시 8월의 어느 날, 나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종로로 잠시 나들이를 갔다. 말이 나들이였지 사실은 동원된 군중으로 나간 것이었다.

낙원동 초입에 다다랐을 무렵, 멀리 인사동 쪽에서 키 크고 피부가 하얀 사람들이, 대오(隊伍)를 지어 행진(行進)해 오고 있었다.

할머니는 긴장한 모습으로 “UN군이다”라며 탄식했다.

당시 나는 여덟 살에 불과했지만 전쟁을 겪으면서 세상 물정을 조금은 알고 있었기에 그들이 북괴군에게 포로가 되었으니 얼마나 잔인한 대우를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약간 느린 행보로 한발 한발 다가오고 있는 美軍들의 모습은 제대로 먹지 못해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해 있었다.

겉모습만 봐도 그들은 괴뢰군들이 자행한 온갖 虐待(학대)에 시달렸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생명만 부지한 채, 무표정한 모습으로 기계적으로 걸음만 걷고 있었다.

그들의 군복(軍服)은 걸레처럼 더럽고 남루했다. 부상자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약물 치료를 받지못해 상처가 퉁퉁 부어 썩어가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어떤 美軍은 팔목이 보통 사람의 두 배 가량 부풀어 올랐고, 또 어떤 이는 발 등에 손가락이 두서너 개는 들어갈 만큼 구멍이 난 상처에 피고름이 뭉쳐있었다.

그는 옆 동료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한 걸음 한 걸음 떼고 있었다.

미군포로들의 ‘죽음의 행진’이 멀리 동대문 쪽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할머니는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서서 울고 계셨다.

젊디젊은 그들은 北으로 끌려가는 도중에 온갖 고초를 견디지 못 견디고 조국(祖國)과 가족의 품을 그리워하며 쓸쓸히 죽어갔으리라 생각된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때마침 美軍 포로들의 行進 중에 보도(步道)에서 보자기를 깔고 오이와 호박을 팔던 어느 할머니가 갑자기 오이 하나를 집어 들더니 美軍 손에 몰래 쥐어주는 것이었다.

괴뢰군 감시병들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피해, 한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美軍은 고마워할 겨를도 없이 오이를 입에 대고 살짝 한 모금 물고서는 뒤에 있는 전우(戰友)에게 주었다.

이쯤에서 이 이름 모를 오이장수 할머니의 행동이 얼마나 큰 용기(勇氣)를 필요로 했는가 하는 것은 당시의 거리 풍경이랄까, 사회상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6.25 사변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美軍이 공습 중에 살포한 삐라를 몰래 줍다가 괴뢰군에게 적발당해 무고한 시민들이 즉결처분 당할 정도로 분위기가 살벌했다.

시계(時計)를 차고 다니다 괴뢰군이나 내무서원에게 검문을 당해 풍속(風俗)을 해(害)하는 행위로 몰려 時計를 몰수당해도 말 한마디커녕 목숨 부지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感之德之) 하던 때였다.

오이장수 할머니의 용기있는 선행(善行), 그리고 美軍들의 뜨거운 전우애(戰友愛가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의 腦裏(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아주 오래 전 故人이 되었을 오이 장수 할머니의 그 勇氣에 고개 숙여 冥福을 빈다.

정리/김필재 spooner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