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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러시아를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여전히 세계 2위의 군사력을 보유한 초강대국이며, 미국과 군사력으로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국가다.

국내 인터넷 사이트를 검색하다 보면 에이즈(AIDS), 즉 후천성면역결핍증이 미국의 생물무기의 일종이라는 글을 자주 접하게 되는데, 이를 처음 퍼트린 게 바로 舊소련 정보기관이다.

1992년 3월 당시 러시아 정보기관(SVR) 장관으로 훗날 총리가 된 에프게니 프리마코프는 에이즈 바이러스가 미군 연구실에서 제조된 생물무기라는 허위 스토리에 대해 KGB의 기만공작 부문이 날조한 것임을 인정했다. 러시아 신문 <이즈베스티야>는 1992년 3월19일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도했다.

“수년 전 우리 중앙지가 보도한 유명한 기사 즉, 에이즈는 아마도 펜타곤의 비밀 연구실에서 유래했다고 지적한 기사에 대해 프리마코프가 언급했다. 프리마코프에 의하면 미국 과학자의 흉계를 폭로한 이 기사는 KGB의 날조라고 한다. 소비에트는 결국 1987년 8월 미국 정부의 압력으로 에이즈 기만 공작 캠페인을 포기했다.”

미 국무성이 일부러 이를 프로파간다로 지적한 것은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에이즈 미국 음모론'이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아무리 과학적-객관적 반론을 해도 모략론을 번복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예를 들면 미 국무성이 지적하듯이 에이즈의 기원은 서아프리카 침팬지의 아종에서 볼 수 있는 원숭이 면역결핍 바이러스에 있다고 반론해도, 그 바이러스를 바탕으로 미국이 생물무기를 개발했다는 등 모략론을 전개할 여지가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 심리학에서는 음모론을 ‘긍정적 피드백’(positive feedback) 현상으로 본다. 쉽게 말해 자기 가설에 부합하는 사실만을 채택하고, 맞지 않은 것은 과감하게 버리는 행태라는 것이다.

음모론을 제기하는 쪽의 경우 자신들이 설정한 가설에 맞아떨어지는 것이라면 사소한 것이라도 크게 받아들이고, 자기 가설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도 하찮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강하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 내린 결과에 매몰되어 과정을 생략한다. 결과의 한 부분만 같으면 과정을 잊어버리고 자기 가설과 일치됐다는 희열에 빠져버린다.

사람들은 미제의 사건에 대해 원인과 결과를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들의 경우 해석이 단순-명쾌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다보니 음모론적 해석을 하게 된다. 이 때문에 음모론적 해석을 하는 상당수 사람들을 보면 대개가 고학력자들이다. 

음모론은 주로 미제의 사건을 다룰 때 ‘그럴듯한’ 대안이 된다. 음모론이기 때문에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잘못된 생각이다. 음모론을 제기하는 쪽과 음모론을 비판하는 쪽 모두 객관적·과학적·논리적 방법을 동원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인간의 본성이라 할 수 있는 ‘의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음모론은 끊임없이 확대-재생산되기 때문이다. 음모론은 그 어떤 소설보다 흥미진진하다. 바로 이것이 음모론이 끼치는 '해악'이다.

김필재 spooner1@hanmail.net / 2015년 10월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