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적 발포, 지휘권 二元化 없었다."- 이희성 주장과 일치
1995년 서울지방검찰청과 국방부 검찰부의 5.18 광주 사건 관련 수사보고서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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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시경부터 시위대가 장갑차 등으로 공수부대에 돌진 공격해 오고 兵士 1명이 장갑차에 깔려 死亡하자 이에 대응하여 첫 發砲가 있었다. 다시 시위대가 장갑차와 버스 등 차량 돌진을 계속하자 공수부대 將校들이 집단적으로 발포하였다.

   
   
   의문점에 대한 수사결과
  
   (1) 發砲 경위
  
   사전계획에 따른 의도적 발포는 아니었다.
  
   고소·고발인들은 공수부대의 발포는 5월20일 23시경 광주역 앞에서 示威群衆에 발포하면서 계속되었는데, 5월21일 13시경 도청 앞에서의 집단 발포의 형태를 보면, 이는 시위대의 차량 돌진을 저지하기 위한 自衛 목적의 우발적 사격이 아니라, 광주시민들의 公憤을 고조시키기 위하여 별도로 사전에 계획된 명령에 따라 행하여진 의도적인 발포였을 가능성이 많다고 주장했다.
   수사결과 광주에서의 최초의 발포는 5월19일 17시경 광주고등학교 부근에서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5월19일 17시경 사직공원을 搜索하고 복귀하던 11공수여단 63대대 配屬 장갑차가 광주고등학교 부근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가 장갑차를 포위 공격하면서 불붙은 짚단을 던져 장갑차에 불을 붙이려 했다. 장갑차에 타고 있던 한 장교가 장갑차 문을 열고 空砲를 쏘고 다시 威脅 射擊하는 과정에서 주위에 있던 고등학생 1명이 총격을 받아 부상한 것이었다.
   또 5월20일 23시경 3공수여단이 광주역 일대에서 시위대와 공방을 벌이던 중 트럭·버스 등 시위대의 차량 돌진 공격으로 死傷者가 발생하는 등 守勢에 몰렸다.
   3공수여단장은 경계용 실탄을 예하 대대에 전달하고, 대대장은 이를 將校 위주로 분배하여 이들이 돌진하는 차량을 항하여 發砲했다. 광주역으로 實彈을 전달하러 가던 특공지원조가 시위대와 마주쳐 진로가 막히자 위협 사격을 했다.
   5월21일 다시 전남대 앞에서 장갑차, 경찰 가스차 등 시위대의 차량 돌진 공격에 대응하여 돌진하는 차량에 發砲했고, 그 와중에서 死傷者가 발생한 것이다. 이와 같은 발포 경위에 비추어 위 발포가 광주시민들의 公憤을 고조시킬 목적으로 사전에 계획된, 의도적인 발포였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5월21일 전남도청 앞에서의 발포는 그동안 國會 聽聞會 등에서는 그 경위에 관하여, 시위대의 1차 장갑차 공격 후 도청에서 撤收하던 31사단 병력으로부터 공수부대가 小量의 실탄을 인수하여 將校들에게 분배한 상태에서 다시 시위대가 차량 공격을 해오자 장교들이 自衛的 次元에서 발포한 것이라고 주장되어 왔다.
   수사 결과 11공수여단 61·62대대는 도청 앞·금남로에서 시위대로부터 차량 공격을 받은 후 示威가 소강상태에 들어간 5월20일 24시경 대대장 지프차 등에 통합 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을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危急時에만 사용하라는 지시와 함께 중대장 이상 將校들에게 1탄창(15발)씩 분배했다.
   63대대는 5월21일 10시30분경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같은 날 13시경 시위대의 차량 공격이 있기 이전에 이미 將校들 위주로 실탄이 분배되어 있었던 사실이 확인되었다.
   13시경부터 시위대가 장갑차 등으로 공수부대에 돌진 공격해 오고 兵士 1명이 장갑차에 깔려 死亡하자 이에 대응하여 첫 發砲가 있었다. 다시 시위대가 장갑차와 버스 등 차량 돌진을 계속하자 공수부대 將校들이 집단적으로 발포하였다.
   그 무렵 7공수여단 35대대도 撤收하던 31사단 병력으로부터 실탄을 인계받아 이를 將校들에게 분배하였다. 돌진하는 차량을 피해 人道와 인근 건물에 산개하였던 공수부대원들 중 일부가 도청 및 주변 건물 屋上에 올라가 경계를 하고 있다가 접근하는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당시, 사격통제에 상당한 문제점 노출 확인
  
   다만, 고소·고발인들의 주장과 같이 위와 같은 발포가 대대장이나 여단장 이상의 上級 指揮官이나 별도의 指揮系統에 있는 특정인의 구체적인 발포 명령에 따라 행하여진 것이거나 또는 광주시민들의 公憤을 고조시키기 위하여 사전 계획에 따라 의도적으로 행해진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결국 전남도청 앞에서의 發砲는 현장 지휘관인 공수부대 대대장들이 차량 돌진 등 위협적인 공격을 해오는 시위대에 대응하여 경계용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이를 분배받은 공수부대 將校들이 대대장이나 지역대장의 통제없이 장갑차 등의 돌진에 대응하여 自衛 目的에서 발포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그 이후 계속된 발포 중에는 비록 시위대가 武裝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도로에 나와 단순히 口號를 외치거나 차량으로 도로를 진행하거나 총상자들을 救護 또는 護送하려 하거나, 심지어는 총기 발사나 차량 돌진 등 軍에 대하여 直接的 威脅을 가하고 있지 아니한 상태에까지 발포가 이루어진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 당시 實彈 및 射擊 統制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2) 광주 파견부대 指揮權의 二元化 여부
  
   공수여단 시위진압 투입은 적법절차 거친 것
  
   고소·고발인들은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上級 指揮官인 계엄사령관·2군사령관·전교사령관·31사단장의 정상적인 지휘계통하에 있지 않고, 별도 세력의 事前 計劃에 의해 지휘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즉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이 투입될 당시의 광주 상황이 공수부대의 投入이 필요할 정도가 아니었고 현지의 31사단장이나 전교사령관이 요청한 사실이 없음에도 공수부대와 학생들의 최초 충돌 이전 시간에 특전사령관이 벌써 11공수여단의 추가 투입을 지시했다.
   계엄사령관이 自衛權 보유를 최초로 천명한 것은 5월21일 19시30분이고 2군사령부가 自衛權 행사를 지시한 것이 5월22일 10시30분임에도 하급부대인 7공수여단은 5월21일 18시에, 戰敎司는 같은 날 20시30분에 미리 自衛權 발동 명령을 내렸다. 심지어는 5월20일 23시경 이미 3공수여단이 광주역에서 發砲를 했다.
   5월24일 호남고속도로 광주인터체인지 부근과 효천역 부근에서 두 차례나 군부대 간에 誤認 射擊이 발생한 사실 등에 비추어 별도의 指揮體系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7공수여단 2개 대대를 전남대 등 3개 대학에 배치한 것은 소요 예방과 진압을 이유로 陸本이 전국 92개 대학에 戒嚴軍을 배치하는 措置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이다. 이때 이미 軍 兵力의 시위 진압 투입은 전제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5월18일 오후 7공수여단 2개 대대가 광주시내 시위 진압에 나선 것은 계엄 확대 선포 후 전국에서 유일하게 광주시내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경찰이 軍의 투입을 요청하고 있는 상황에서 계엄사령관-2군사령관-전교사령관-31사단장의 계통에서 軍兵力 투입을 결정한 사실이 인정된다.
   11공수여단의 추가 투입이 광주시내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학생들이 충돌하기 전인 5월18일 14시경 결정된 것은 사실이다. 이는 광주 시위 상황을 보고받은 육본에서 군 병력의 增援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다만 공수여단 중 적절한 파견부대의 결정을 위하여 특전사령관의 의견을 들어 11공수여단을 增援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지휘권 2원화 증거 없다
  
   초기에 7공수여단을 시위 진압에 투입한 후 5월18일 야간에 공수부대를 광주시내에 거점 배치하고, 5월19일 11공수여단의 추가 작전통제에 따라 責任地域을 구분하여 시위 진압에 투입하고, 5월20일 3공수여단의 추가 투입에 따라 다시 책임지역을 구분하여 시위 진압에 투입하고, 5월21일 공수부대를 시 외곽으로 철수시키는 등의 일련의 部隊 運用에 관한 지휘를 실제 31사단장과 전교사령관이 행한 사실이 인정된다.
   계엄사령관의 自衛權 보유 천명 시간과 각 부대의 自衛權 발동 지시 시간이 軍資料上 先後가 맞지 않는 듯한 것은 사실이다. 이는 自衛權 발동이 결정된 마당에 계엄사령관의 방송을 통한 발표 이전에 自衛權 발동 사실이 下級 部隊에 통보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도 尹輿禎 전교사령관은 5월21일 16시경 李熺性 계엄사령관으로부터 계엄군 외곽 철수와 함께 自衛權 발동 승인을 받은 사실 등에 비추어 그와 같은 지시들이 발령, 전파되는 과정에서 先後가 다르다고 하여 指揮官이 二元化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5월21일 16시경 31사단장의 2개 공수여단에 대한 작전지휘권이 전교사령관에게 전환된 후에는 각 공수여단이 책임지역에서 外廓 封鎖 임무만을 수행하다가 광주 재진입 작전에 투입된 것이다. 광주 재진입 작전은 전교사령관이 계엄사령관의 지휘를 받아 특전사령관 등의 자문과 助言을 참고하여 그의 책임하에 수행한 것이 인정된다.
   또 군부대 간의 오인 사격은 戰敎司 예하 각 부대 간에 상호 상황 전파 및 통제 미숙, 단위 부대 지휘관들의 상황 판단 미숙과 침착성 부족 등에 기인하여 발생한 것이다. 이를 두고 指揮權 二元化의 결과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광주에 파견된 3개 공수여단이 전교사령관이나 31사단장의 작전 통제하에 있었음에도 31사단 등과는 無電 交信 체계가 상이한 상태에서 특전사 일부 장교들이 전교사에서 전용 무선 발수신 장치를 설치하여 각 공수여단과 별도로 交信하면서 상황을 파악했다. 특전사령관이 11공수여단과 3공수여단의 增援결정 의견을 제시하고, 수시 광주를 방문하면서 공수여단 지휘관들을 격려하고, 광주 재진입 작전인 상무충정작전을 수행함에 있어 특공부대를 선정하는 데 관여한 사실 등이 인정된다. 이를 가지고 당시 공수여단에 대한 指揮權이 二元化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3) 무기 피탈 고의 방치 여부
  
   5월20일 23시경 광주세무서에서 카빈 17점 탈취
  
   고소·고발인들은 事前에 계획된 虐殺 蠻行의 시나리오에 따라 광주시민들로 하여금 무기고를 습격, 武裝을 하도록 상황을 유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광주시민들이 광주 외곽 지역에서 武器庫를 습격하고 武器를 탈취하여 광주까지 돌아오는 동안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고 武器가 광주에 반입된 후에 외곽 도로가 봉쇄된 점 등을 들었다.
   광주에서는 시위대에 의한 무기 탈취는 5월19일 15시15분경 시위대가 기독교 방송국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31사단 경계병력으로부터 M16 小銃 1정을 탈취한 것이 처음으로, 이 小銃은 곧 회수되었다.
   그 후 5월20일 23시경 광주세무서 放火·점거시 지하실 武器庫에서 카빈 17정을 탈취했고, 5월21일 13시경 광산 하남파출소에서 카빈 9정이 탈취되었다.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武器 탈취에 나선 것은 5월21일 13시경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發砲가 있은 후다. 시위대는 광주 인근 지역으로 진출하여 화순, 나주 등 지방의 支·派出所와 화순광업소, 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으로 銃器와 實彈을 탈취했던 것이다.
   당시 軍이나 警察이 광주 외곽 지역의 일선 支·派出所와 방위산업체 등에 산재해 있는 무기·실탄·탄약류를 조기에 회수하여 통합 보관하는 등 실효성 있게 統制하지 못하고 경찰관이나 향토사단인 31사단 防衛兵 1~3명이 경계병력으로 배치되어 있다가 무기를 탈취당한 것은 사실이다.
   광주지역의 시위가 확산되자 두 차례에 걸쳐 광주 시내 예비군 무기고에 있는 小銃과 彈藥을 회수하여 군부대에 보관시킨 것 또한 사실이다.
   다만 軍의 조기진압 의지와는 달리 시위가 급격히 확산됨으로써 警察과 軍兵力이 광주시내 시위에 대처하는 데만도 급급해한 상태였다. 지방 경찰 병력도 대부분 광주시내로 차출되어 인근 지방으로까지 진출하여 무기를 탈취하는 시위대를 사전에 막기는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특히 5월21일에는 전남대에서 3공수여단이, 전남도청 앞에서는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이 시위대와 치열한 공방전 끝에 결국은 전남도청 등을 포기하고 시 외곽으로 철수하는 형편이었다. 軍이나 警察이 병력 운용에 여유가 있는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무기고 습격을 방치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달리 軍이 시위대의 무기 탈취를 의도적으로 방치했음을 인정할 아무런 자료를 발견할 수 없다.
  
  
   (4) 헬기 기총 소사여부
  
   헬기사격 피해자 洪蘭·鄭樂平씨는
   일반 총상으로 밝혀져
  
   광주에서 武裝 헬기의 공중 사격으로 많은 人名 被害가 야기되었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었고, 조비오 신부·이광영 승려·아놀드 피터슨 목사 등이 헬기 기총 소사를 목격하였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당시 육군항공단 근무 관계자들은 헬기 기총 사격은 엄청난 人的·物的 被害를 야기하는 것으로 그러한 射擊을 실시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군 관계자료상으로는 5월21일 2군사령부가 戰敎司에 수송용 헬기인 UH-1H 10대, 무장헬기 AH-1J(코브라) 4대를 지원하고, 事態 기간중 헬기가 총 48시간 동안 武力示威를 했다는 기재 외에, 실제 공중 사격 실시 여부에 대하여는 아무런 기재를 발견할 수 없었다.
   먼저 목격자들의 진술을 살펴보면, 위 이광영은 5월21일 14시경 헬기사격으로 15~16세의 女學生이 어깨 부위를 被擊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를 적십자병원으로 후송했다고 진술했다. 적십자병원의 당시 진료기록부와 응급실 관계자의 진술에 의하더라도 그 당시 헬기 사격 피해자가 來院했음을 확인할 수 없었다.
   조비오 神父가 5월27일 헬기 사격의 피해자라고 지목한 洪蘭은 檢察조사에서 건물 屋上에 있던 戒嚴軍의 小銃 사격에 의해 다쳤다고 진술했다.
   鄭樂平은 5월21일 14시경 광주경찰서 상공에서 기종 미상의 헬기가 기관총 사격하는 것을 목격했으며, 부근 진주다방의 종업원이 屋上에서 헬기가 쏜 기관총을 맞고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진주다방 종업원인 심동선(남·30세)에 대한 檢屍調書에 의하면 死因이 M16 소총에 의한 관통총상(射入口 1×1cm)이고, 당시 빌딩 屋上에 있던 공수부대원의 射擊에 의한 被擊이라는 취지의 증언(광주오월항쟁사료전집 714쪽)도 있다.
   아놀드 피터슨 牧師는 헬기가 旅回하고 上空에서 총소리가 들려 헬기에서 기총 사격을 한 것으로 믿고 있으나 헬기 사격 자체를 목격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사격 장면을 촬영한 것으로 檢察에 제출한 사진상의 헬기 하단 불빛은 기관총 사격시 발생되는 섬광이 아니라 헬기에 부착된 충돌방지등 불빛임이 확인되었다.
   그밖의 목격자들도 막연하게 헬기에서 사격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일 뿐, 달리 구체적으로 피해사실을 진술하지 못하고 있다.
   광주시내 적십자병원·기독병원·전남대학병원의 각 당시 진료기록부와 응급실 관계자들의 진술을 검토해 보아도 그 당시 각 병원에서 헬기 총격에 의한 피해자가 來院했거나 入院·치료를 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다.
   광주시위 관련 死亡者 165명에 대한 광주지방검찰청 死體檢屍記錄에서도 특별히 헬기 기총 사격에 의한 死亡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할 수 없었다.
   또한 AH-1J 헬기의 장착 武器인 토우 미사일, 2.75인치 로켓, 20밀리 발칸포(분당 750발 발사)나 500MD 헬기의 장착 武器인 2.75인치 로켓, 7.62밀리 6열 기관총 (분당 2000~4000발 발사)에 의한 標的 射擊의 경우 나타나는 대규모의 人命 被害와 뚜렷한 피탄 흔적, 파편 등이 확인되지 않았다.
   전교사 교훈집의 「油類 및 彈藥의 높은 소모율」이라는 기재는 교훈집 작성시 헬기 사용의 일반적 敎理상의 문제를 육군 항공운용교범에서 그대로 인용하여 적시해 놓은 것이다. 실제 다른 사례에 비해 광주지역에서 油類나 彈藥을 많이 소모했다는 것이 아닌 점 등에 비추어 헬기 장착 무기에 의한 사격으로 人命被害를 야기한 사실은 인정할 수 없었다.
  
  
   (5) 대검 및 화염방사기 사용 여부
  
   공수부대 대검 살상 사실 확인
  
   ▲대검 사용여부
   軍 관계자들은 대부분 시위대를 진압하면서 대검을 사용한 일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着劍 상태에서 트럭을 타고 武力示威를 하던 중 시위대로부터 投石공격을 당하자 일부 부대원이 착검 상태에서 下車하여 시위대를 추격, 체포하였던 사실이 인정된다. 그 과정에서 대검 부분으로 피해가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하헌남·최승기·김인윤·이인선·최미자 등이 당시 刺傷을 입었고, 사망자 손옥례·권근립·윤개원·김평용·박종길·민병렬·허봉·김경환 등의 死體에서 刺傷이 발견된 점을 종합하면, 지휘관의 의사와 무관하게 공수부대원들에 의하여 시위 진압현장에서 대검이 사용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편집자 注: 鄭海直 교사(보성 노동국교 광곡분교) 증언에 의하면 5월19일 16시30분경 광주소방서 바리케이드 앞에서 공수부대원이 체포한 젊은이 세 명을 대검으로 찔렀다고 한다. 또 金容完씨(당시 고3)는 20일 밤 광주 신역 부근에서 공수부대원에게 뒤통수를 곤봉으로 얻어맞고 대검으로 정강이 아래를 찔리는 부상을 당했다. 이 밖에도 대검에 찔린 증언은 상당수에 달한다. 「月刊朝鮮」 1988년 3월호 「내가 겪은 80년 5월의 光州」 참조>
  
   ▲화염방사기 사용여부
   군 관계자들은 화염방사기는 토치카 또는 장갑차 공격용으로서 人體에 火焰을 방사했다면 전신 중화상으로 대부분 死亡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광주에서 화염방사기로 火焰을 방사한 적이 없고, 당시 火焰用 藥品 자체가 지원된 일이 없다. 다만 소요진압용 작용제(CS분말)나 소요 군중 식별용 유색수를 넣어 이를 살포하는 데 화염방사기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달리 화염방사기로 火焰을 방사하거나 화염방사에 의한 火傷 死亡 사실을 인정할 자료를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최강식(남·35세)이 5월21일 광주시청 앞에서 시위대 장갑차를 몰고 가다가 화염방사기 공격을 받고 火傷을 입었고 (1987년 7월15일 악성 섬유성 조직구암으로 사망), 崔炳玉(남·21세)이 5월21일 전남대 앞에서 시위중 화염방사로 顔面에 火傷을 입었으며, 최충용(남·29세)이 5월19일 광주소방서 앞에서 계엄군이 화염방사기를 위협용으로 수직으로 쏘는 것을 목격했다고 각 주장(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 1007~1013쪽)했다.
   최강식에 관한 보상금 지급결정 관련 서류에 의하면 이 사람은 5월21일 장갑차를 몰다가 체포된 것이 아니다. 그는 중흥동 건축 현장에서 戒嚴軍에 체포되어, 전남대·광주교도소·상무대를 거치면서 全身을 구타당하고 火傷을 입었으나 그것이 화염방사기에 의한 火焰인지는 보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이 사람에 관한 보상금 지급결정 관련 서류에 의하면, 동인은 5월20일 16시경 전남대 앞 굴다리에서 계엄군에 체포되어 교도소로 호송될 때 공수부대원이 車輛 안에 최루탄을 집어넣어 火傷을 입었다고 진술서를 작성했다. 같은 내용의 강길성의 목격 진술서도 첨부되어 있으며, 달리 위 주장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없었다.
  
  
   (6) 광주 外廓地域 피해 관련 眞相
  
   오인사격으로 다수 시민 사망
  
   5월21일 공수부대가 전남대와 전남도청 앞에서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하여 5월27일 재진입 작전을 할 때까지 시 외곽 봉쇄 및 도로 차단 등과 관련하여 여러 건의 民間人 被害 사례가 주장되어 왔다.
   그 중 앞에서 본 수사결과에 상세히 적시한 바와 같이 3공수여단 5개 대대가 5월21일 광주교도소로 撤收하는 과정에서 그 동안 連行한 시위대 수십 명을 천막 등으로 덮은 트럭에 실어 호송하면서 더운 날씨에 차량 안으로 과다한 인원을 탑승시키고 최루탄을 터뜨려 火傷환자를 발생시켰다. 교도소 도착 후에도 진압봉 등으로 구타했으며, 교도소 도착 당시 차량에는 窒息死 등으로 사망한 5~6구의 死體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3공수여단은 5월24일까지의 광주교도소 방호 기간중 수차례 무장시위대와 交戰한 외에, 5월22일 10시경 교도소 부근을 통과하던 김성수 일가를 시위대로 오인 銃擊을 가하여 일가 3명이 총상을 입고 그중 처 김춘아가 후유증으로 死亡한 사실이 있다.
   위와 같이 철수 과정에서 발생한 사체 및 교전 과정 또는 부상자 치료과정에서 사망한 사체 등 모두 12구의 사체를 교도소 부근에 假埋葬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광주-목포간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효천역 부근에 배치된 20사단 61연대 병력에 의해서도 5월22일 05시40분경 및 09시경 2회에 걸쳐 시위대 차량으로 오인한 銃擊으로 왕태경 등 민간인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한 것이 확인되었다.
   5월22일 17시경 20사단 62연대 2대대에 의한 광주통합병원 확보 작전 시 무장시위대와 民家를 두고 벌인 交戰 과정에서 인근 화정동·쌍촌동·내방동 등에 거주하는 이매실·함광수 등 주민들이 총상을 입고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음이 확인되었다.
   해남에 주둔하고 있던 31사단 93연대 2대대도 5월23일 2회에 걸쳐 시위대와 交戰했고 그 과정에서 박영철 등 2명이 사망했음이 확인되었다.
   5월23일 10시경 11공수여단 62대대가 매복하고 있는 주남마을 앞 광주-화순간 國道에서 미니버스가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질주하다가 총격을 받아 박현숙 등 10여 명이 사망했다. 남자 중상자 2명이 後送도중 다시 총격을 받아 사망했음이 확인되었다.
   5월24일 13시30분경 11공수여단이 주남마을에서 송정리비행장으로 이동하면서 송암동 부근에서 시위대 10여명과 총격전이 벌어지자 주변을 향해 亂射하여 전재수 등 어린이 2명이 사망했다.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으로부터 오인 사격을 받아 63대대 병력 9명이 사망하자 이에 격분하여 부근 일대를 搜索, 시위대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무장시위대원 1명과 권근립 등 마을청년 3명, 마을주민 1명이 총격을 받고 사망한 사실 등이 확인되었다.
  
  
   (7) 死亡者 數
  
   193+47명 이외의 사망자 수 확정은 불가능
  
   현재까지 정부의 관련 資料에 의하여 확인된 광주시위 관련 死亡者는 군인 23명·경찰 4명·민간인 166명 등 모두 193명이고 광주 시위 관련 행방불명자로 인정되어 補償金이 지급된 사람은 47명이다.
   이 死亡者數는 당시 死體로 확인된 숫자이나, 死體중에는 身元이나 사망 경위가 일체 불상인 경우가 많다. 한편 목격자의 진술 등에 의하여 死亡者가 있음은 확인되면서도 당시 死體가 발견·확인되었는지 여부나 신원불상인 死體와의 동일성 여부 등에 대한 판단이 현재로서는 곤란하여 당시의 실제 死亡者 數를 지금 다시 확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편집자 注: 계엄사가 80년 6월에 발표한 사망자 명단과 死因을 보면 시민측 사망자 164명 중 27명이 타박상·두부 손상·자상으로 숨진 것으로 돼 있다. 또 34명이 19세 이하이고, 14세 이하 사망자도 5명이나 된다. 두부손상 사망자 중엔 65세 노인도 있다. 광주부상회 회원 131명 중 12.2%인 16명이 구타에 의한 부상이고 약 80%가 허리 위에 총격을 받아 다쳤다. 광주에서 얼마나 죽었느냐도 문제지만 어떻게 죽었느냐의 문제도 중요하다. 「月刊朝鮮」 1985년 7월호 「191명이냐 2000명이냐」 참조).
[ 2016-05-20, 09:1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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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평선     2016-05-25 오후 12:37
한많은 광주 항쟁 반드시 바르게 짚고 넘어 가야 한다 .
온국민이 납득할수 있는 , 항쟁의 주모자가 누구 인가 ?
생존해 있다면 당당히 나와야 하고 ,사망 했다면 그 증거가 명백해야 한다.
목숨을 건 투쟁이었다면 ,그 피해에 대하여 , 좀더 객관적으로 당당해야 한다.
명분 없는 폭동 이라면 , 그 책임은 달fk 저야 한다.
그진실에 대하여 광주는 분명하게, 증거를 제시 할수 있어야 한다.
민주 항쟁인가 ? 폭동인가? 억울한 피해자를 원치 않는다.
그 주모자가 누구인가 ???????????????????????????????
올해의 기념일 행태를 보면 이건 아니다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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