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가을, 열여섯 살의 김동인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항변(6)-1 동경 유학생활의 시작

嚴相益(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6

<죽은 소설가를 추적>

국립중앙도서관을 다니면서 자료 속에 파묻혀 살았다. 3·1운동 당시 재판기록과 독립투사들의 조서들을 보았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자 재판에 관련된 서류들도 뒤졌다. 일제시대 한국과 일본의 신문 잡지와 소설, 기행문, 문학작품들을 다양하게 읽었다. 책장이 삭아서 종이먼지가 부스러져 나오는 이광수(李光洙), 김우영(金雨英) 등 친일파로 찍힌 사람들의 자서전들도 읽었다. 그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을 만나 많은 시간 얘기를 들었다. 김동인이 쓴 전집들과 그의 리얼한 삶을 기록한 ‘문단 30년’을 빠짐없이 되풀이해서 읽으면서 분석했다. 입력된 수많은 자료들을 머릿속에서 재조립하면서 세월 저쪽의 청록색 안개 속에 숨겨져 있는 사실들을 재구성해 보기 시작했다.   

1915년 가을 열여섯 살의 김동인이 일본으로 가기 위해 부산항 부둣가에 서서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소해 보이는 약한 모습의 소년이었다. 천 톤의 화륜선(火輪船)이 검은 연기를 뿜어 올리며 파도를 헤치고 들어왔다.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고려환(高麗丸)’이었다.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왕래하는 배였다. 배에는 일본으로 일자리를 찾아가는 조선노동자들이 많았다. 한일합방이 되자 조선에서 일거리가 없는 사람들은 모두 일본의 공사판으로 가고 있었다.

김동인이 탄 배는 다음날 아침 시모노세키 항에 도착했다. 바로 동경행 기차표를 끊었다. 덩치가 작아 소아(小兒)라고 하면서 반액 할인표를 사서 탔는데도 차장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역에서 떠나 얼마쯤 가자 짙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 해변이 나타났다. 멀리 가까이 섬들이 아름답게 보였다.

김동인은 중학교 과정인 동경의 명치학원(明治學院)에 등록했다. 그는 평양의 숭덕소학교를 졸업하고 기독교계 학교인 숭실중학교에 들어갔었다. 성경 암송시험이 있었다. 미처 다 외우지 못하고 성경을 펼쳐보다가 담임선생한테 심한 꾸지람을 받았다. 아버지는 독특한 자존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김동인이 중학교를 중퇴하게 하고 바로 일본으로 유학을 보낸 것이다.

그가 입학한 중학교는 동경 이치가야(市谷)의 육군사관학교 근처에 있는 학교였다. 학교수업이 끝나면 등에 조그만 가방을 메고 천천히 걸어 아오야마(靑山) 연병장 문 쪽의 전차 정류장으로 갔다. 그곳의 길거리에 있는 가게에서 파는 모찌나 군고구마의 달콤한 맛이 좋았다. 거기서 전차를 타고 나카시부야(中澁谷)역에서 내리면 성심여학원(聖心女學院)으로 가는 언덕길이 있었다. 그 길 중간쯤에 목재와 판자로 만든 작은 이층집들이 모여 있었다. 그 속에 그의 하숙집이 있었다. 하숙집 앞에는 넓은 공터가 있었다. 하숙집 이층의 다락방에서 책을 보다가 심심하면 하숙집에 있는 다른 학생과 공터에 나가 야구공을 주고받았다.

동경에는 고향 친구이자 소학교 동창인 주요한(朱耀翰)이 먼저 와 있었다. 주요한은 목사인 아버지가 동경에서 목회를 하게 된 관계로, 아버지를 따라 동경에 먼저 와 있었다. 김동인은 주요한과는 소학교 시절부터 친구이자 라이벌 관계였다. 친구 주요한의 후배가 되는 게 싫어 동경학원에 입학했었다. 그러나 동경학원이 폐쇄되는 바람에 다시 주요한과 같은 중학교에서 다니게 된 것이다. 

소년 김동인에게 동경은 꿈같은 다른 세상이었다. 주요한과 전차를 타고 동경시내구경을 다녔다. 긴자거리의 ‘간코바’라는 상가는 시계탑이 눈길을 끄는 특이한 건물이었다. 가운데 통로를 중심으로 주인이 다른 점포들이 마주보고 늘어서 있었다. 도기, 거울, 세공, 칠기, 죽세공, 장난감, 그림책, 인형, 문구, 도장, 보석, 상아세공, 시계, 사진, 화장품, 주머니류, 포목, 안경 등 없는 게 없었다.

미스코시 백화점은 르네상스식으로 지어진 화려한 대형 건물이었다. 입구 주변에 조각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입구로 들어가면 정신이 나갈 정도로 화려했다. 대형계단을 배치한 큰 홀이 있었다. 홀은 일층에서 오층까지 시원하게 뚫려 있었고 대리석으로 만든 열 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 위에 아치가 이어져 있었다. 건물의 외부와 내부에 거대한 기둥을 세워 건물을 더욱 화려하게 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빛이 아래층까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층에서 악대들이 쿵작거리며 나팔을 불고 북을 흥겹게 치고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미스코시의 위층은 고급명품을 파는 곳이었다. 미스코시의 자체 상표를 붙여 파는 특화된 물건들이 있었다. 미스코시 비누, 미스코시 학생화, 미스코시 분, 미스코시 버터, 미스코시 냉장고 등의 물품들이 질서정연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미스코시 브랜드 상품이 식료품에서 화장품, 잡화, 가정용기구류까지 없는 게 없었다.

미스코시 백화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다이마루 백화점도 있고 마쓰야 백화점도 있었다. 대한제국의 왕실은 미스코시에서 판매하는 물품들을 들여다 썼다고 했다. 긴자 거리는 일층에는 원기둥을 만들고 이층에는 발코니가 있는 벽돌건물의 집들이 이어져 있었다. 벚꽃나무와 단풍나무가 거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 거리에 있는 ‘기무라야’라는 제과점은 앙빵을 파는 유명한 곳이었다. 단팥을 넣은 만두 모양의 빵은 중앙부분을 약간 움푹하게 파고 거기에 소금으로 절인 벚꽃을 얹어놓았다. 그 빵은 가운데가 쑥 들어가서 ‘배꼽빵’이라고도 하는데 천황도 좋아한다고 했다. 앙빵의 맛은 특이했다. 달콤한 팥의 향기가 입안에 부드럽게 번졌다. 그러면서도 벚꽃의 신맛이 단맛과 어울렸다.

(계속)

언론의 난
[ 2017-08-10, 11:52 ] 조회수 : 923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코나스넷  |  리버티헤럴드  |  뉴데일리  |  뉴스파인더  |  뉴포커스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