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김동인의 문학을 향한 마음속 불길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항변(6)-2 한 발 앞서 문학을 꿈꾼 친구 주요한의 영향…

嚴相益(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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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죽은 소설가를 추적>

같이 어울려 다니는 친구인 주요한은 김동인에게 자기는 앞으로 ‘문학’을 하겠다고 했다. 김동인은 문학이 뭔지 몰랐다. 아버지는 일본유학을 하고 변호사나 의사가 되라고 했다. 그들에게는 먼저 동경을 거쳐 간 유학생들이 앞날을 예측하는 길잡이였다. 하숙방에서 주요한이 이런 말을 했다.

“중국에서 동경으로 유학을 왔던 노신(魯迅)이라는 학생이 있었어.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서 공부를 했는데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의학보다 문학이 적합하다고 생각하게 됐지. 그는 동경에서 ‘신생(新生)’이라는 잡지를 만들면서 문예운동을 시작했어. 자금난으로 잡지가 계속되지는 못했지만 여러 문학작품을 만들어 잡지에 실었지. 러시아 작품을 번역하기도 했고.”

한 발 앞서 가는 친구 주요한의 정신적 성숙을 보면서 김동인의 마음은 물결이 일었다. 아직 김동인에게 문학은 개념이 잡혀 있지 않았다. 그게 직업이 될 수 있는 것인지도 의아했다. 그렇지만 김동인 역시 어려서부터 책과 가까웠다.
아버지는 대동서관(大東書館)이라는 서점을 가지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서가에 꽂혀있는 책을 많이 읽었다. 그중에서 이인직(李人稙)이 쓴 소설 ‘귀의성’(鬼의 聲)은 그에게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들을 모아놓고 중국 혁명가들의 얘기나 월남망국사(亡國史) 같은 얘기를 해주었다.

지주였던 아버지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셈이었다. 안창호(安昌浩), 이승훈(李昇薰) 같은 분들을 모셔서 토론의 자리도 만들곤 했다. 평양에 있는 집 건너편에 안창호 선생의 누이가 살고 있었다. 가끔 누이를 만나러 오는 안창호 선생은 어린 동인(東仁)을 만나면 손을 잡고 산책을 갔다. 형 김동원(金東元)이 독립운동에 관련된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들어갔었다. 그때 형은 감옥에서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을 들여보내 달라고 했다. 김동인이 열두 살 때 톨스토이의 작품을 형이 있는 감옥에 가져다주었다. 처음으로 톨스토이와 만난 셈이었다.

김동인 역시 기본적으로 책이 좋고 영화가 좋았다. 그는 일본어판 ‘소년문학문고’ 일곱 권을 사다가 밤을 새서 읽었다. 그 외 문고판들을 닥치는 대로 빌리기도 하고 사서 읽기도 했다. 러시아 소설들을 많이 읽었다. 톨스토이를 읽고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었다. 작품 전체에 나타나 있는 침울한 맛과 무게와 힘은 어린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사람의 마음을 끄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문학은 한 인간의 정신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휴일은 아사쿠사(淺草)에 영화를 보러 갔다. 미국영화가 불란서와 이태리 영화를 압도하여 세력을 잡기 시작했다. 장편의 시리즈 탐정영화가 인기였다. 채플린이 등장하는 희극영화가 수입되어 상영됐다. 그는 제국관, 전기관 등 서양 영화를 전문으로 하는 상영관을 주로 다녔다. 일본 영화는 아직 무대극 그대로 오노에<尾上松之助> 독무대 시절이었다. 여배우라는 것은 일본에 없던 시절이었다. 그는 영화관에서 돌아올 때는 음식점에서 10전짜리 튀김덮밥을 사먹으면서 행복했다. 서구의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여 일본의 의회 민주정치가 꽃을 피우던 시절이었다.

영작문 시간이었다. 그는 영어 노래를 하나 지었다. ‘튕클튕클, 리틀스타’로 시작하여 사전을 뒤적여 몇 줄의 노래를 만들었다. 일본인 선생이 김동인을 보고 네가 지은 것이냐고 물으면서 너는 장차 훌륭한 문학인이 되겠다고 칭찬했다. 김동인은 일본인 선생의 칭찬을 듣고 문학이라는 것에 보다 가까이 갔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온천으로 유명한 국립공원 닛코로 수학여행을 갔다. 호수 옆에 있는 여관에 묵었다. 다음날 찾아간 화엄폭포는 99미터 높이에서 하얀 물안개를 날리며 낙하하는 폭포였다. 전망대 옆에 조그만 비석이 보였다. 비석에는 폭포에서 떨어져 자살한 ‘토무라 조’라는 일본 고등학생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담긴 글이었다. 수학여행에서 돌아와 작문시간에 그 비석에 새겨진 시(詩)에서 느낀 감흥을 써냈다. 사랑을 잃어버린 감정을 나름대로 묘사한 글이었다.

“중학생 주제에 건방지지만 칭찬하지 않을 수 없구나.”
일본인 작문선생의 평가였다. 문학을 향한 불이 마음속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다니던 명치학원은 조선인들과 인연 깊은 학교였다. 명치학원 조선학생 동창회 명부에는 박영효(朴泳孝), 김옥균(金玉均) 같은 조선 개화당의 거두(巨頭)가 기록되어 있었다. 김관호(金觀鎬) 화백이 그린 그림이 학교 담에 장식되어 있었다. 일본서도 시마자키 도오손(島崎藤村)을 비롯해서 많은 문학인이 명치학원 출신이었다.

학생들은 학급의 회람잡지를 만들었다. 김동인은 ‘병상(病床)’이라는 소설을 써냈다. 그의 처녀작인 셈이었다. 그 소설을 보고 문학을 얘기하자고 하숙으로 찾아오는 일본인 동창들이 있었다. 그들은 소년다운 열정과 희망으로 너는 장차 조선의 소설가가 되어라, 나는 일본의 소설가가 되마, 그리고 조선과 일본이 서로 문학으로 교류하며 끝까지 문학 교제를 하자고 했다.

당시 일본 문학계는 아리시마 다케로(有島武郞), 기쿠지칸(菊池寬), 아쿠다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등이 출세하기 이전이었다. 기쿠지의 스승인 나쓰메(夏目漱石)의 시절이었다. 김동인은 빅토르 위고까지도 통속작가라 경멸할 만큼 야심만만했다. 그는 책을 통해 많은 작가를 만났다. 오스카와일드를 만나고 레오 톨스토이를 만났다. 그의 예술관이 형성되고 있었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든 세계에 만족치 않는다. 자연계에 아름답고 훌륭한 ‘꽃’이라는 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 손끝으로 그림으로든 조각으로든 꽃을 모방한다. 자연계에 만족치 못하고 제 손으로 복제하여 그것을 좋아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자연계를 모방하여 음으로 창조한 아름다움이 음악이요, 그림이나 조각 등으로 표현한 것이 미술이고 글로 나타내는 것이 문학이라고 인식했다.

자기가 창조한 세계가 예술이었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비교해 볼 때에 ‘사랑의 천사’며 성자라는 존경을 만인에게 받은 톨스토이보다 폭군이란 평을 받던 도스토예프스키가 훨씬 더 ‘내면의 세계’를 명료하게 창조한 것 같았다. 아름다움 그 자체를 만들어 보아야겠다는 꿈이 생겼다. 그것은 도덕과 윤리를 넘어서는 가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통해 그런 아름다움을 추구해 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언론의 난
[ 2017-08-11, 10:13 ] 조회수 : 701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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