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族部落 - 釜山市 同族部落의 變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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釜山의 同族部落
  

동족부락

入鄕

소속洞인구(71/76년)

동족부락가호 수(71/76년)

대표적직업(71/76년)

농업의비중(71/76년)

廢農원인

땅값(71/76년)

龍湖1동開城王氏

7代祖

8162/31091

25/25

농업/구方“? 노동,퓜? 대여, 행상

80%/10%

74년-구획정리

1천원/4~5만원

龍湖1동波平尹氏

11代祖

60/60

농업/공장근로자, 가게, 전세놓기

70%/0%

75년-구획정리

1천원/4~5만원

鶴章동朴·辛부락

朴氏→8代祖辛氏→5代祖

2239/8824

朴 23/20

신 28/20

농업/구멍가게, 전세, 공단근로자

100%0/%

74년-구획정리

1천원/3천원

雲蜂慶州金氏

7代祖

<1715년>

18691/41000

25/25

농업/농업, 직공, 셋방

50%/50%

68-정책이주

4천원/6천원

周禮동礪山宋氏

14代祖

9354/23000

21/31

농업/공원, 회사원, 건물대여

70%/7%

74년-구획정리

1천원/3천원

掛法동昌原黃氏

14代祖

9737/15610

48/48

농업, 상업, 회사원, 공장, 건물대여

30%/0%

75년-구획정리

3만/5만원

佐동金海金氏

14代祖

1046/1343

29/29

농업/농업

80%/80%

1천~4천원/1천~6천원

久瑞동朴·鄭마을

朴→10代祖鄭→7代祖

3221/7019

朴 62/57세대鄭 58/58세대

농업/상업, 건물대여, 셋방

50%/10%

73년-구획정리

2만/5만원

楊亭동淸道金氏

13代祖

<1592>

19774/25403

57/60

상공업/〃

0%/0%

66-도시계획

50~60만원/〃

草邑동密陽孫氏

16代祖

11542/18778

33/38

의사, 상업/〃

0%/0%

50년-농지개혁

5~10만원/〃

錦絲동南平文氏

14代祖

24039/46000

30/25

농업/공장근로자

50%/0%

75년-구획정리

1천/4만원

石坮동潁陽千氏

10代祖

1183/1612

53/54

농업/농업

50%/50%

변동없음


  
  

동족부락

時祀(71년/76년)

洞際(71년/76년)

문중조직(71/76년)

문중재산

품앗이(契)

혼인

종교

洞長(71/76년)

평가

龍湖1동開城王氏

음10月初丁/양11월첫일요일

9월 9일, 洞주관/

〃 〃

有司제도/이사회제도

토지/토지, 장학기금

기금으로 상부상조

洞外婚

유, 불교

비동족/〃

강화

龍湖1동波平尹氏

음10月初丁/〃

〃 〃

유사제도/〃

토지/토지(축소)

없음

유교

동족/비동족

약화

鶴章동朴·辛부락

음10月/〃

음섣달/〃

유사제도/〃

토지/토지

며느리계는 없어짐

洞外婚

유교

동족/비동족

雲蜂慶州金氏

음10月/〃

정월보름/〃, 제주없이

품앗이

비동족/비동족

정체

周禮동礪山宋氏

동지, 보름, 5월그믐/〃〃〃

토지/토지, 건물

없음

동족/〃

유지

掛法동昌原黃氏

섣달그믐/〃

토지/토지(축소)

洞契

동족/〃

佐동金海金氏

음력 1월3일 〃6월 3일/〃

토지/〃

품앗이, 계

비동족/〃

정체

久瑞동朴·鄭마을

음10月/〃

정월보름전날/〃

토지/건물

없음

洞內婚

동족/비동족

약화

楊亭동淸道金氏

음10月/〃

정월보름/〃

이사회/〃

토지/토지, 건물, 기금

洞外婚

동족/동족

강화

草邑동密陽孫氏

음10월/음10월첫일요일

정월보름/〃

위원회/〃

토지/토지

洞內婚

비동족/〃

錦絲동南平文氏

음10月/〃

75년 중단

유사제도/〃

토지/토지

유교/불교

약화

石坮동潁陽千氏

음10月/〃

정월초, 派별로/〃 〃

토지기금/토지기금

품앗이

洞外婚

유교

동족/동족

정체


  
   도시동족부락(同族部落)의 사회적 기여
  
  부산의 동족부락은 취락형태부터 일반주거지역과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들을 갖고 있다. 기와집·정원수·대문·흙담들이 조성하는 포근한 분위기는 흔히 「비둘기집」이라 불리는 규격화된 도시주택가에선 맛볼 수 없다. 3백~4백년 내려온 취락이 가진 표현할 수 없는 은근함을 물량만의 축적으론 구할 수 없는 모양.
  
  도시인들은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만인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하나의 城에 쳐벽혀버린다. 문을 두드리는 어떤 방문객에게도 반가움보다 경계심을 먼저 발동하지 않을 수 없는 생활이다. 한번 집에 들어오면 다음날 출근 때까지는 그 집을 나가지 않고도 그 편을 좋아하는 도시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동족마을 내부에선 사정이 다르다. 저녁을 먹은 뒤 아기를 안고 「슬리퍼」를 끌며 내의바람으로 스스럼없이 동네의 이집 저집을 방문할 수 있는 느슨한 분위기가 그곳엔 있다. 도시 동족부락의 구성원들이 격심한 사회변동에도 불구하고 그 마을을 떠나지 않으려 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이런 심리적인 안정감인 것이다. 상부상조(相扶相助)가 문명발달에 끼친 공헌은 큰 바가 있다.
  
  한국의 동족부락은 원시 씨족사회의 직접적인 계승도 아니고 서구(西歐)의 촌락공동체와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단결된 상호부조의 정신이 동족부락의 발생동기였으며 수백년간의 존속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동족부락의 지향하는 바 기본정신은 여씨향약(呂氏鄕約)의 정신 바로 그것이다.
  
  中國宋의 감전여씨문중(監田呂氏門中)에서 동족(同族)의 교도(敎道)를 위해 채택된 呂氏鄕約의 정신을 조선선조(朝鮮宣祖)시대 이율곡(李栗谷)이 「栗谷鄕約」에 그대로 반영시켰다. 栗谷鄕約은 전국의 부락에 채용돼 朝鮮후기의 촌락생활을 지배하는 규범이 됐다.
  
  呂氏鄕約의 기본정신은 덕업상권(德業相勸)·과실상규(過失相規)·예속상교(禮俗相交)·환난상휼(患難相恤)이었다. 즉 상호부조와 권선징악의 정신인 것이다. 동족부락의 발생연대별 통계를 보면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대가 많다. 우리나라의 저명한 동족부락 1천6백85개소중 3백~5백년 전에 생긴 것이 6백46촌락으로 가장 많았다(선생수조(善生水助)『朝鮮의 취락(聚落)』).
  
  강원도(江原道), 제주도(濟州道)를 제외한 南韓의 주요 동족부락 1백74개소의 발생연대통계에 따르면 66%인 1백 14개 부락이 2백~3백50년전으로 나타났다. 고승제수(高承濟授)는 이런 통계를 인용, 많은 동족부락들이 피폐한 농촌사회 특히, 임진왜란이 몰고온 농촌의 황폐속에서 자위수단으로 발생했다고 쓰고 있다(75년 학술원(學術院) 논문집 『근세향교제도(近世鄕校制度)의 구조적(構造的) 변화』).
  
  부산의 12개 동족부락중 11개 부락도 비슷한 역사적 배격에서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입향조(入鄕祖)의 入鄕연대를 보면 1代를 30년으로 계산하여 2백~4백년 전에 속하는게 약 90%인 11개 부락이며 3백~4백년 전이 8개 부락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때 피난해 왔다는 入鄕祖의 전설이 4개 마을에서 전해지고 있다.
  
  부산을 비롯한 경상도(慶尙道)지방이 임진왜란으로 입은 피해는 극심했다. 『선조실록(宣祖實錄)』(宣祖34년條)은 임진왜란이 끝난 2년뒤의 전국농토조사결과를 적고 있다. 왜란전의 전국농토는 1백90만8천결(結)이었는데 왜란뒤엔 28.4%에 불과한 54만2천結만 남아 있었다. 가장 피해가 심한 곳은 慶尙道로서 왜란 전의 43만結은 왜란 뒤 약 17%인 7만結로 축소됐다. 유성용(柳成龍)이 기록한대로 당시의 농촌은 『몇개 촌락을 지나야 人家를 하나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군문등록(軍門謄錄)』).
  
  부산의 동족부락은 지방의 명문거족(名門巨族)들이 일으킨 부락이 아니다. 이들 동족부락의 창설자들은 평범한 양반계층이었다. 명문거족들의 동족부락이 가진 병폐-권위의식, 배타성, 신분차별-에 오염될 소지가 적었다는 얘기도 된다. 부산동족부락의 노인네들중 자기조상 자랑을 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결국 부산의 동족부락들은 순수한 상호부조의 정신 아래서 창설됐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상호부조의 정신은 동족부락구성원의 경제적 평준화를 촉진한다. 동족부락이 일반부락에 비해 빈부차가 심하지 않고 경제적 안정을 얻고 있음은 김두헌향교(金斗憲鄕校.『조선가족제도연구(朝鮮家族制度硏究』) 등 많은 학자들이 지적한 대로다. 천재지변을 만나 어떤 가족이 빈곤에 빠지면 다른 일족들이 힘껏 돕는다. 특히 종손(宗孫)이 당했을 때 그 도움은 각별하다. 이런 도움은 각종 契에 의하여 제도적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또 동족부락에선 先代의 가산(家産)을 탕진하는 것을 가장 큰 불효라고 생각하는 기풍이 아직 남아있어 극빈자의 발생을 억제하는 작용을 한다.
  
   향토애(鄕土愛) 높은 동족부락
  
  초읍손씨(草邑孫氏), 양정김씨(楊亭金氏)를 비롯한 대부분의 부산동족부락도 中下 내지 中上層의 비교적 균등한 생활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아시아」혈연공동체의 이런 기능은 구성원들의 「프롤레타리아」化와 「부르좌」化를 다같이 억제하고 있다는게 통설이다(『「아시아」의 토지제도(土地制度)와 농촌사회구조(農村社會構造)』-아세아경제연구소간(亞世亞經濟硏究所刊)). 부산의 동족부락들이 해방뒤의 좌우익 혼란중에서도 비교적 희생자 없이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기풍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도시화의 時代에서 도시속의 동족부락이 가진 가장 큰 사회적 기여의 잠재력은 ① 향토애 ②전통의 계승 ③ 획일성에 대한 다양한 생활방식의 존속 ④非行억제기능 등에 있는 것 같다.
  
  부산의 12개 동족부락 가운데 33%인 4부락은 소속동의 동장에 동족출신을 얹혀놓고 있다. 71년엔 반이 넘는 7개 부락의 동족들이 동장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5년 사이 동족부락의 지역행정에 대한 영향력이 약화된 곳은 구획정리사업으로 외래인구가 엄청나게 몰려와 동족부락의 발언권이 상대적으로 약해진 동이다. 동장이 비동족출신으로 바뀐 3곳은 龍湖1동(坡平尹氏), 鶴章동(朴辛부락), 久瑞동(朴鄭부락). 이들 3개 동족부락은 내부적으로도 동족의식이 크게 희박해져 지역사회의 「리더」로서의 힘을 잃고 있다.
  
  통장이 동족부락출신이 많은 것은 지역사회에 정통하고 관심이 많으며 주민들의 협력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인 것 같다. 이들 동장들의 기분이 되는 동족(同族)세력의 지역사회 참여의식도 일반시민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높다. 양정김씨(楊亭金氏)들의 경우 陽亭2동에서 그들이 점유하는 인구비율은 1% 남짓하지만 同舍신축, 새마을사업, 반상회 등에선 항상 중심역할을 하고 있다.
  
  동족부락의 향토애는 주민운동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69년 운봉김씨(雲峰金氏)들이 주동이 돼 벌인 「농토 연고권 환원투쟁」. 당시 雲峰마을에서 각 기관에 보낸 호소문엔 金氏들의 또이또이 連名이 내리닫이고 적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동족부락의 단결력을 실감해 했다. 이 투쟁은 69년 문화재관리국이 회동(回東)수원지부근의 국유지 임야 48만평을 C목장에 불하해 줌으로써 시작됐다. 48만평 가운데는 雲峰부락주민들이 5·16 이후 혁명정부의 시책에 발맞춰 개간한 농지 2만평이 포함돼 있었다. 당국에선 개간지를 불하해 주겠다고 사전에 약속했다. 운봉(雲峰)주민들은 이 약속만 믿고 4년간 피땀 흘려 황무지를 옥토로 바꿔놓았던 것이다.
  
  배신당한 雲峰사람들은 金씨문중의 유일한 대학졸업자인 金병익씨(45)를 중심으로 투쟁위원회를 조직, 2년간 끈질긴 싸움을 벌였다. 결국 金씨들은 평당 50원의 보상금을 받는데 그쳤으나 이것이 발단이 돼 고급공무원들이 구속되는 사태로 번졌다. 金씨들은 이 투쟁과정에서 동족부락 특유의 단결력으로 똘똘 뭉쳐 싸웠던 것이다.
  
  龍湖동 開城王씨들은 이웃한 B주물공장에서 내뿜는 매연에 견디다 못해 지난 5년간 공해반대투쟁을 벌여 결국 이 공장으로부터 자진해서 이전하겠다는 답을 받아냈다. 동족부락의 지역사회에 대한 깊은 관심은 부락제(部落祭)로 상징되는 향토에 대한 애착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12개 동족부락 가운데 錦絲洞(일시중단)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부락들이 부락제를 올리고 있다.
  
  민속학자들이 여러번 지적한대도 한국의 민속(民俗) 중 部落祭만큼 긍정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달리 없다. 이기적인 도시민들에게 부락제는 단결감과 일체감을 불어넣을 수 있는 둘도 없는 민속이다. 전통예술의 측면에서 부락제는 보고(寶庫)의 몫을 다하고 있다. 이것을 전체 洞의 행사로 격상(格上)시켜 마을의 축제(祝祭)로 전승시킨다면 각박한 도시생활에 청량제가 되고 전통예술의 자연스런 보존도 아울러 도모하고 2중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同族部落의 앞날
  
  발전적인 변모에 성공한 동족부락과 그렇지 못한 부락 사이엔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 성공한 門中은 사회변혁을 감당할 만한 계층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세력의 형성은 문중의 역사적인 발전의 결과이기도 하다. 동족부락이 개화문명에 어떻게 대응했는가에 따라서 그 뒤의 변모는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발전한 문중에는 일찍부터 자녀교육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교육이야말로 가장 유리한 상속이라고 믿었다. 원래 전통적인 농촌사회는 토지의 상속으로 지연(地緣) 및 혈연(血緣)공동체를 유지해 왔다.
  
  발전한 도시 동족부락에선 자녀교육이 재산상속 이상으로 후손들의 번창을 보증하는 생활수단임을 재빨리 깨달았다. 일찍 신문화의 교육을 받은 계층의 草邑과 楊亭에선 사회변화에 대응하는 주체세력으로 등장, 문중현대화를 주동했다. 물론 교육의 상속을 가능케 한 것은 그런 부락들이 대체로 부유하며 고등교육을 시킬 수 있는 재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금사(錦絲)동 남평문씨(南平文氏), 괘법(掛法)동 창원황씨(昌原黃氏) 부락의 예(例)처럼 재력이나 家格은 좋았지만 유교와 농사에 너무 집착, 신문명을 등한시하여 동족의식의 전승계층을 양성못한 문중도 있다. 재산의 많고 적음은 동족근대화 필수조건은 아닌 것 같다. 쇠퇴하고 있는 동족부락엔 동족의식의 계승세력이 없거나 약하다. 이런 부락내 대학졸업자 또는 재학생이 전연 없거나 한 두 명이 고작이다.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은 노년층과 의사소통이 잘 안돼 마을을 탈출(?), 시중심부로 나가버리는 수도 있다. 이런 마을에선 50代 이상만이 농사에 종사하며 문중을 지키고 있었다. 그 밑에선 10代, 20代의 자녀들이 문중일엔 별 관심없이 따로 놀고 있었다. 30~40代의 청장년층은 分家하자마자 마을을 떠나고 알맹이가 빠져 속이 텅빈 동족부락에 구획정리의 회오리 바람이 몰아쳤다.
  
  12개 부락중 71년에 농업의 비중이 50% 이상이었던 5 개부락이 구획정리로 농토을 빼앗겼다. 농토를 팔아 상점이나 내고 집을 지어 세를 줄 수 있게 된 사람들은 그래도 성공한 편이다. 상당수는 실업자가 됐다. 자녀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공장으로 나가기 시작, 노년층의 자녀들에게 얹혀 사는 형편이 된다. 자녀들에 대한 발언권은 약해지고 직업전환의 혼란기에서 허우적거리느라고 문중이나 동제(洞祭)에 대한 관심은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저런 복합적 이유에서 도시 동족부락은 농토 없이도 존속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물론 외형적으로 동족취락이 유지되고 있다 해도 동족의 결합의식이 없다면 진정한 동족부락이라 규정할 수 없을 것이다. 김두헌교수(金斗憲敎授)는 동족부락은 동성동본자의 단순한 집단거주가 아니라 동족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항상 집합적 행동의 便을 갖는 생활공동체라고 정의 했다. 즉 제사, 친목, 경제적인 협조 등 상호부조의 정신을 자각한 구성원으로 조직된 동족부락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도시의 동족부락들은 아직도 문중총회, 시사, 족보편찬, 동제를 통해 집합적 행동을 과시하고 있다. 해방 뒤의 보통선거는 이른바 「씨족(氏族)표」의 중요성을 드높혀 이런 집합적 행동을 조장하고 있다. 그러나 핵가족화는 동족의식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다. 부산의 동족부락중 「그린벨트」에 묶여있는 3개 마을을 제외하곤 모두 핵가족비율이 70% 이상이다.
  
  핵가족, 즉 부부중심 가족제도에선 친족관계가 약하다는 게 정설이다. 부부관계를 넘어선 형제자매관계, 숙질(叔姪)관계, 고부(姑婦)관계 등 근친관계는 친우관계 이상의 것이 아니다. 이에 반해 부자중심가족(직계 및 확대가족)은 혈연적 수직관계를 기둥으로 하여 연속성과 포괄성을 가진다. 포괄성은 문중조직으로 나타난다. 동족부락이 부자중심가족에 바탕을 두었던 것은 물론이다.
  
  핵가족화로 아무리 동족의식이 희미해지더라도 시사(時祀)는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부산의 동족부락구성원중 기독교 신자는 0.1%에도 못미친다. 압도적인 다수가 유교인 만큼 제사는 계속될 것이다. 시사(時祀)의 존속은 위토답(位土畓) 등 문중 공유재산과 그것을 관리하는 문중조직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시사(時祀)가 존재하는 한 동족부락은 약해질지언정 해체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제(洞祭)의 존속은 위협받을 것이다. 도시의 경우 동제(洞祭)의 주최자는 洞 즉 자연부락에서 그 부락에 잔존한 동족집단으로 바뀌었다.
  
  동족부락이 조상제사에 대한 것만큼 洞祭에 대해 의무감을 가질 리는 없다. 벌써 동제에 대한 무관심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음을 보았다.
  
  도시가 진행됨에 따라 도시생활의 몰인간성에 대한 반발 또는 심화될 것이다. 인간성에 대한 갈증은 全面的 접촉, 全人的 접촉, 장기적인 유대감을 가능케 하는 도시동족부락의 존속을 돕는 역할을 할 것이다.
  
  적어도 도시에선 동족부락이 긍정적인 측면이 부정적이 면을 압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동족부락의 존속을 인위적으로 유도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존속할 수 있는 사회조직만이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다만 도시동족부락의 건설적인 기능의식을 교훈으로 삼고 그것의 올바른 전승에 정부나 지식인들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많은 농촌의 동족부락들이 부산의 동족부락과 비슷한 변모의 길을 걷게 될 것이므로 부산의 동족부락들이 경험했던 구획정리에 의한 대량실업, 토지 「브로커」의 농간, 부락제(部落祭)의 파괴 같은 부작용을 막을 수 있는 정책수립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는 바다.
  
   * 入選 所感
  
  우리가 전통문화의 전승에 실패한 원인은 이 사회의 「엘리트」계층이 가진 전통문화에 대한 획일적 사고방식에 있는게 아닐까.
  전통문화에 대한 무차별적인 과소평가는 그러나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무조건적 우월감 조장과 일맥상통한다. 즉 도식적이고 획일적인 발상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동족부락(同族部落)을 보는 「눈」을 편견의 틀에서 객관적인 관점으로 옮길 수 있다면 우리는 후세에 전승시킬만한 많은 美德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족함 많은 글이 입선된 것은 이 조사보고서가 제시한 문제의식 덕분이라 믿고 관계자들에게 감사한다.
  ◀1946년 생
  ◀1967년 부산 水産大 중퇴
  ◀1971년부터 5년간 국제신보 기자
  ◀1974년 韓國 記者協會 제정 제7회 韓國記者賞(취재보도 부분) 수상
  
  * 審査評
  
  예비심사를 거쳐 本選에 오른 작품은 3篇이었다. 『大都市 同族部落의 變貌』는 釜山주변의 同族部落이 부락의 都市化 近代化 과정을 통해 겪은 변모를 서술하고 일정조건하에서는 근대화가 반드시 동족부락의 해체(解體)를 수반하지 않으며, 동족부락은 그 나름대로 전통적인 상부상조(相扶相助)의 생활양식이 근대화가 몰고 오는 非情的인 측면을 알맞게 中和하고 있다는 관찰을 하고 있다.
  
  우리 고유의 가치관(價値觀)을 再評價해야 할 오늘의 역사적 시점에서 많은 시사(示唆)를 주는 바 있다. 주도(周到)한 조사와 분석, 투철한 현장감각, 흥미 있는 내용을 담고 있어 佳作入選으로 뽑았다.
  여기에서 제시되고 있는 결론 - 근대화와 동족부락의 유지와의 兩立性 - 은 도시주변에서 뿐 아니라 展村에서 찾아져야 비로소 큰 가치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메리카」의 對「아메리카」戰爭』은 미국의 多國籍企業의 생리가 이른바 국가독점 자본주의(國家獨占資本主義)의 요구와 兩立하지 않는다는 지적을 비롯,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의 변모를 분석한 것으로서 筆者의 지식의 폭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多國籍企業에 대한 서술분석은 거의 없고 우선 평가가 행해지고 있으며 결과로 흥분과 여러 군데에 독단(獨 )이 엿보인다.
  『開化에 미친 선교사(宣敎師)들의 功過』는 素材 자체는 좋았다. 기독교상륙의 초창기는 아직도 많은 발굴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롭고 많은 자료가 발굴됐다 해도 그것을 일정한 「패턴」에 집어넣는 안목도 긴요하다.
  전체적으로 皮相的인 분석과 설명이 행해지고 있다.
  審査委員: 趙淳, 柳根一(中央日報 論說委員)
  
출처 : 월간중앙
[ 2003-07-04, 15:4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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