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핵 게임 - 북한 원전개발과 남한의 대응전략(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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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프렌치 커녁션
  
  프랑스 재처리 회사와 교섭
  
  원폭의 원료 물질 생산을 뜻하기도 하는 「핵연료 재처리」라는 이 민감한 낱말이 우리정부 문서에 처음 의미 있게 등장한 것은 1969년 5월 제172차 원자력위원회가 확정한 원자력 연구개발 장기이용 계획서였다. 원자력 연구소가 작성한 이 계획서는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기간(1972∼76년)에 재처리 체제에 관한 기술적, 경제적 검토를 한 뒤 제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기간(1977∼81년)에 재처리 시설의 설치를 추진한다」고 했다.
  
  1971년 1월 당시 원자력 청 산하에 있던 원자력 연구소는 재처리 사업계획서를 원자력 청에 제출하였다. 1974∼80년을 건설기간으로 잡고 경남 온산공업단지 인접지역에 하루에 우라늄 1t을 처리할 수 있는 대단위 공장을 만든다는 요지였다.
  
  1972년 7월에는 영남화학(주)이 핵연료 재처리 합작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정부에 제출하였다. 미국의 스켈리 석유나 NFS사(Nuclear Fuel Services), 일본의 미쓰비시 석유가 국제합작 하여 1978년 가동목표로 고리 원자력발전소 인접지역에 년(年) 처리능력 9백t 규모의 재처리공장을 건설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두 계획중 국제합작 계획이 실제로 추진되었다. 이 계획에는 핵 확산금지와 관련한 국제적 규제 강화의 움직임이 본격화되기 전에 기득권을 확보한다는 전략적 고려가 있었던 것 같다.
  
  원자력연구소는 1972년 원자력 연구개발의 최우선 과제를 핵연료주기기술의 확립으로 설정, 그 핵심 거점 기술인 재처리기술과 핵연료 가공 기술의 연구를 위한 시설 도입 교섭에 들어갔다. 미국 측은 냉담했다. 원자력연구소와 자매결연관계에 있던 알곤 국립연구소도 재처리분야의 기술훈련협조 요청을 거절하였다.
  
  주재양(朱載陽)씨가 책임자로
  
  정부는 눈을 유럽으로 돌렸다. 1972년 5월 최형섭(崔亨燮) 과학기술처장관은 프壕봇?영국을 공식 방문했다. 원자력 협력, 특히 재처리 기술도입에 관한 협의가 있었다. 이에 따라 이해 10월에는 프랑스 원자력 청(CEA)의 장피에르씨 등이 한국에 왔다. 핵연료가공 및 재처리사업에 관한 양국간의 기술협력 문제를 의논하였다. 1973년 3월 프랑스의 원자력청과 그 산하의 재처리 시설 용역회사인 SGN사(Saint Gobin Techniques Nouvelles) 대표단이 와서 원자력연구소와 구체적인 협의를 진행하였다.
  
  SGN사는 재처리기술이 세계에서도 가장 발달된 프랑스에서도 이 분야의 대표회사였다. 프랑스 원자력청 산하의 국영회사로서 1952년부터 가동되었다. SGN은 한국 이외에서 파키스탄 등 핵무기 개발을 꾀하는 나라들에게 재처리시설을 수출한 경험자로서 숱한 외교적 분쟁의 소지를 제공한 회사였다.
  
  원자력연구소는 일단 SGN사에 대해 시험용 재처리설의 개념 설계를 요청, 용역계약을 맺었다. 73년 9월 윤용구(尹容九) 원자력 연구소장은 CEA와 SGN사를 방문하였다. 재처리사업과 발전소용 핵연료 가공사업의 협력 방안을 의논한 끝에 정부간 차관교섭이 매듭지어지는 대로 공장 건설계약을 체결하자고 합의하였다. 1975년 4월에는 원자력 연구소와 SGN사이에 재처리 시설건설을 위한 기술용역 및 공급계약이 체결되었다. 정부는 이때 핵연료 사이클을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국내에서 독립시키겠다는 자립전략을 설정, 재처리이외에 핵연료 제조기술의 도입도 시도하였다.
  
  제1 핵연료 가공 시설인 핵연료 성형가공 시험 시설의 도입선은 프랑스의 CERCA사로 정했다가 75년 1월에는 원자력 연구소와 그 공급계약이 체결되었다. 정부는 사용 후 핵연료의 재처리에 의해 분리된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원전 핵연료로 재 순환시키는데 필요한 혼합핵연료 가공시험시설(제2 핵연료 가공시설)의 도입에 대해서는 벨기에의 핵연료 주기기술 용역 전문업체인 BN사(Belgonucleaire)와 교섭을 진행하고 있었다.
  
  1974년 1월 과학기술처 원자력국장 이병휘(李炳暉)씨는 벨기에를 방문, 플루토늄 가공기술 및 연구시설의 도입을 위한 벨기에 정부차관의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그해 9월에는 최(崔) 과기처장관이 벨기에를 방문, 기술용역 및 기술훈련 협의를 거쳐 11월에 혼합 핵연료 가공 시험시설의 개념설계를 BN사에 맡기는 계약을 했다.
  
  인도의 개발 모델에 관심
  
  이것은 미국을 따돌리고 프랑스와 벨기에로부터 원자폭탄의 폭약에 해당하는 플루토늄 분리 및 그 취급 기술을 종합적으로 손에 넣으려는 의도를 보인 것이었다. 핵 폭탄용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위한 재처리사업은 최형섭(崔亨燮) 과기처장관, 주재양(朱載陽) 원자력연구소 부소장, 김철(金哲) 원자력연구소 대덕분소 공정개발실장을 축으로 하여 추진되었다. 뒤에 원자력 연구소의 재처리사업과 연구로 개발사업 국방부산하 국방과학 연구소의 핵 폭탄 설계와 유도탄 개발사업을 통합 조정하여 朴대통령을 보좌한 것은 중화학공업 및 방위산업담당 수석비서관이었던 오원철(吳元哲)씨였다.
  
  핵 폭탄 개발은 플루토늄을 생성시키는 연구로와, 연구로에서 타고 나온 핵연료에서 그 플루토늄을 분리하는 재처리공장, 그리고 플루토늄을 폭약으로 하여 핵 폭탄을 설계·제조·시험하는 시설 및 운반수단인 미사일 연구의 종합 시스팀이다.
  
  재처리 사업 실무책임자 주재양(朱載陽)씨는 미국 MIT대학에서 화공분야를 전공한 뒤 핵연료 관계의 연구를 했던 재미학자로서 1973년 3월1일에 원자력 연구소 특수사업담당 부소장에 취임하였다. 그의 우선 과제는 인력확보였다. 그때는 국내외 어디를 찾아보아도 재처리공장에 근무했거나 재처리를 전공한 학자가 없었다. 그는 그해 5월 23일부터 7월 12일까지 캐나다와 미국을 방문, 젊은 한국학자들을 찾아내 이 특수사업에 끌어들이기 위한 설득작업을 벌였다. 김철(金哲)씨의 경우는 서울대 화공과출신으로서 뉴욕 주립대학(스토니 브룩소재)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2년간매사추세츠주의 나티크 육군연구소에서 근무 중 朱載陽씨에게 설득 당하여 귀국하였다.
  
  金박사는 육군 연구소에서 폐기 문서를 완전히 없애버리려는 보안상의 목적으로서, 종이를 분해, 셀루로즈 성분을 포도당으로 변화시키는 연구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 재처리 사업을 위하여 해외로부터 유치된 과학자들은 약 20명이었다. 거의가 화공·화학전공자였다. 재처리 과정이 기본적으로 용매 추출에 의한 플루토늄 분리라는 화학 공정이기 때문이었다.
  
  플로리다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자마자 김철(金哲)씨 밑에서 이 사업에 참여하게 된 이철수(李哲洙)씨를 비롯한 유치 과학자들의 과반수는 서울 공대 화공과 출신이었다. 서울대 화공과의 입학 점수가 전국에서 가장 높던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상반기에 화공과에 들어갔던 이들이었다. 오원철(吳元哲) 수석비서관도 서울대 화공과 출신이다. 유치 과학자들은 주택제공, 높은 월급 등 특별대우를 받았다.
  
  캐나다서 NRX 연구로 도입추진
  
  주재양(朱載陽)씨는 재처리 기술도입 뿐 아니라 연구로 확보의 실무 책임자이기도 했다. 朱부소장은 73년 11월 9일에 재처리 사업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프랑스의 SGN사 등을 한 달간 방문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대만과 인도를 보름동안 방문하였다. 朱부소장외 2명의 이 대만, 인도방문사유를 「원자력 연구소 20년사」는 「NRX원자로 도입에 따른 기술 문제 협의차」라고 적고 있다. 이 짧은 기록은 朴대통령의 핵 폭탄 개발 전략에 대한 중요한 암시를 던지고 있다. 74년 3월 23일 朱부소장은 드디어 NRX원자로 도입 사업 추진 차 프랑스와 캐나다를 24일간 방문한다. 프랑스의 재처리공장과 캐나다의 NRX연구로 도입이란 두개의 기본 축이 구체화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때 인도는 캐나다의 NRX연구로를 도입하여 독자적으로 핵 폭탄 제조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 정부는 주부소장 등 실무 책임자들을 인도에 보내 인도의 개발 전략을 우리의 모델로 배워 오도록 했던 것 같다. 핵 폭탄 개발과 관련하여 일반의 오해가 있다. 상업용 원자력 발전에서 타고 나온 사용 후 핵연료를 재처리하여 얻은 플루토늄이 핵 폭탄 제조에 쓰일 수 있다는 오해가 그것이다. 핵 폭탄용 플루토늄은 군사용 원자로와 연구용 원자로에서만 생산된다.
  
  우리나라 고리에 있는 경수로 원전에서 나온 사용 후 핵연료를 재처리하면 플루토늄이 생기는데 여기에는 핵폭발에 방해가 되는 플루토늄 240이 23.8%나 들어있다. 핵폭발용이 되려면 플루토늄 동위원소들 중 플루토늄 240이 7%이하, 플루토늄 239가 90%이상이어야 한다. 경북 월성에 있는 캐나다 중수로의 경우에는 플루토늄 240이 26.6%로서 이 역시 폭탄용으로는 적합하지 못하다. 상용 원전의 사용 후 핵연료에서 핵폭발용 플루토늄 239가 순도 미달이 되는 것은 핵연료가 3년간이나 타기 때문이다.
  
  군사용 원자로나 연구용 원자로는 핵연료의 연소 시간을 짧게 함으로써 핵 분열성 플루토늄을 90%이상의 순도로 생산할 수 있다. 북한을 포함하며 지금까지 핵 폭탄을 개발했거나 개발을 시도했던 나라는 모두 연구로에서 폭발용 플루토늄을 얻었다. 따라서 어떤 형의 연구로를 확보하느냐가 핵 폭탄 개발전력의 제1관문이 된다. 웨스팅 하우스자료에는 1977년 현재 핵무기 개발용으로 돌릴 수 있는 연구로는 인도, 이스라엘, 캐나다(3개), 대만, 노르웨이, 서독, 이탈리아, 스위스 등 8개국에 11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
  
  인도는 캐나다로부터 NRX연구로를 도입, 인도에서 채굴된 천연 우라늄을 핵연료로 집어넣을 때 태운 사용 후 핵연료에서 폭발용 플루토늄을 생산하였다. NRX연구로는 중성자 감속재로 중수(重水)를 사용하는데 이 중수 제조는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여 수입에 의존할수 밖에 없었다.
  
  인도 핵실험의 충격
  
  박(朴)대통령은 연구로 가동에 필요한 중수와 천연 우라늄 공급선도 미국이 아닌 나라에서 확보해야했다. 朴대통령의 핵 개발 의지와 한국이 처한 이런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나선 것이 이스라엘국제상인 사울 아이젠버그였다. 1950년대부터 한국에 거점을 마련하여 턴 키 베이스의 기간산업건설과 이에 따른 외자 알선으로 떼돈을 벌었던 아이젠버그는 1969년에 처음으로 한국 정부 고위층에 캐나다의 중수로 원자로를 소개하였다. 핵 개발을 위해서 편리하다는 설명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朴대통령은 68년의 1·21 청와대 습격사건과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에 대하여 미국이 화끈한 대응을 하지 않고 69년에는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는 것을 보고 한국의 안전을 위해서는 핵 폭탄 개발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을 때였다.
  
  상담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1972년 11월에 아이젠버그가 캐나다 원자력공사(AECL)와 독점 대리인 계약을 맺으면서부터였다. 1973년4월 캐나다 원자력공사의 존 그레이사장은 한국에 와서 청와대, 상공부, 과학기술처, 한전 등을 차례로 방문, 월성에 세워질 60만㎾짜리 원자력3호기 건설 계획에 참여할 뜻을 비쳤다. 73년 11월에 호주 대사에서 한전 사장으로 임명된 민충식(閔忠植)씨는 상공부와 한전의 일부 실무자의 반대를 꺾고 직접 朴대통령의 의중을 받들어 원자력 3호기 주 계약자로 AECL을 선정하는 쪽으로 밀고 나갔다. 이때 우리 정부는 캐나다로부터 중수로 원자로이외에 3만㎾짜리 NRX연구로를 같이 수입하기로 하고 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NRX연구로에 쓸 중수로와 천연우라늄 연료는 캐나다 중수로(CANDU)에도 공급되므로 미국의 간섭을 피해 안정적으로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캐나다형 중수로는 연료의 일부를 매일 교체하도록 설계돼 있었다. 미국제 경수로는 1년에 한 번 정도 원자력 발전소의 가동을 중단시킨 뒤 연료를 바꾸는 데 비해 중수로는 수시로 사용 후 핵연료를 끄집어 낼 수 있다. 국제 원자력기구에서는 핵 개발 야심을 가진 나라가 중수로를 가지면 사용 후 핵연료를 몰래 빼내 플루토늄을 재처리해 내기가 쉽다고 판단하여 경수로보다도 훨씬 엄중한 감시를 하고 있다.
  
  1974년 5월에 인도가 핵폭발 실험을 했다. 라자스탄 사막의 L자모양 참호속에서 이루어진 핵실험 장치는 나가사키 투하 원폭보다 약간 작은 15kt짜리 였다. 인도가 핵폭발 실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 캠브리지 대학 출신인 핵 물리학자 호미 바바박사의 집념 덕분이었다. 그는 1945년에 벌써 원자력 연구소를 설립, 평화 목적의 이용이란 명분을 내걸고 연구를 진행하였다.
  
  연구 자금은 초기에 인도의 재벌들이 부담했고 네루 수상이 적극 뒷받침했다. 바바박사는 미국, 프랑스, 캐나다 등 핵 선진국의 기술 협조를 받는데도 폭넓은 외교력을 발휘하였다. 핵폭발용 플루토늄이 생산되었던 캐나다제 NRX형 연구로 사이러스(4만㎾)는 캐나다가 경제원조의 일환으로 인도에 공급한 것이었다. 사이러스 원자로에서 태워진 사용 후 연료에서 플루토늄을 뽑아낸 재처리공장은 미국 회사의 기술적 도움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미국이 비밀분류를 해제한 휴렉스 방식의 재처리 공장이었다.
  
  원폭제조 막을 길 없다
  
  이들 국가가 인도에 핵 관련기술을 마음 턱 놓고 넘겨준 것은 세계 평화를 부르짖으며 비동맹 외교를 선도해 온 인도를 믿었던 때문이었다. 인도도 핵폭발 실험의 목적을 건설 등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선전하였다. 인도는 핵 확산금지 조약이 평화목적의 핵폭발까지 금지하고 있는데 반발하여 이 조약에 가입하지 않고 있었다.
  
  인도의 핵폭발 실험이후 뒤늦게 낭패한 캐나다는 NRX연구로에서 생성된 플루토늄을 앞으로는 핵 폭발물 제조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줄 것을 인도에 요구, 거절당하자 인도에 대한 원자력 기술협력을 두절시킴으로써 캐나다 회사가 짓고 있던 중수로 1기는 완공되지 못하였다. 인도 핵실험은 가난한 나라도 정치 지도자의 강력한 뒷받침이 있으면 핵 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실증함으로써 핵 보유국을 경악케 했다.
  
  핵 보유국들은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서로 단결하여 핵 폭탄 개발과 관련 있는 연구로 농축 재처리 기술 및 이와 관련된 주요 기자재의 대외 판매나 이전에 따른 규제를 한층 더 강화하게 되었다. 이런 새로운 움직임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인도식 핵 개발을 추진하고 있던 한국이었다.
  
  인도 핵 실험이후 개발 도상국에 의한 핵 개발이 국제 문제가 되었을 때 미국 의회 자료실(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은 뉴욕의 폴리 테크닉 연구소 핵 공학 부장인 존 R 라마쉬박사에게 의뢰하여 개발도상국 및 소국(小國)의 비밀 핵 폭탄 개발 가능성에 대하여 조사 보고하도록 하였다. 라마쉬박사는 이들 나라가 플루토늄 생산용 원자로를 핵 선진국의 도움 없이 만들 수 있느냐에 대해 『어렵지 않은 일이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소국 및 개발도상국에 의한 플루토늄 생산용 원자로의 건설에 관하여」란 대(對) 의회용 보고서에서 「1년에 1㎏의 플루토늄(20kt급 원폭 한 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을 생산할 수 있는 원자로는 1천3백만∼2천6백만 달러를 들이면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재처리 시설도 쉽다
  
  라마쉬 박사는 또 「설계에 필요한 정보는 이미 공개된 문헌에 다 있으며 건설에 필요한 부품과 자재는 공개된 시장에서 구할 수 있다. 우라늄은 세계 도처에 부존돼 있어 큰 부담 없이 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결론적으로 핵 확산의 금지를 위한 국제적 규제에도 불구하고 이들 나라가 핵 폭탄 개발을 추진하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라면서 오히려 핵 개발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라마쉬 박사에 따르면 핵 폭탄 하나를 만들기 위한 최소양의 플라토늄은 4㎏이다. 농축 우라늄 핵 폭탄의 최소량은 우라늄 11㎏이라고 한다.
  
  라마쉬 박사는 (북한처럼)원자력 발전소가 없는 나라의 입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연구로는 천연우라늄을 그대로 연료로 쓸 수 있고, 흑연을 감속재, 가스를 냉각재로 쓸 수 있는 원자로라고 분석했다. 이런 원시적 원자로는 1942년에 원폭 제조의 선구자 페르미가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만든 세계 최초의 원자로와 같은 형이다.
  
  이런 초기 형식의 원자로는 그 상세한 설계도가 이미 공개돼 있어 이를 모방하여 만들기는 간단한 일이다. 라마쉬 박사는 건설 기술자 1명, 전기기술자 1명, 기계 기술자 2명, 금속 기술자 1명, 핵 공학자 3명만 있으면 그 설계와 건설을 지휘·감독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 건설 시작 후 4년 뒤에는 원자로가 가동될 것이고, 1년 뒤에는 그 핵연료 중에 작은 핵 폭탄 하나를 만드는 데 충분할 정도의 플루토늄이 생성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북한은 라마쉬 박사의 이 보고서를 베낀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비슷한 연구로를 만들었던 것이다. 한국 원자력 연구소가 7백억 원을 들여 지난해부터 짓고 있는 다목적 연구로(K-MRR‥Korea Multi-Purpose Research Reactor)사업 단장인 김동근(金東勤)박사는 『북한의 연구로는 지독하게 간단하다. 그런 것을 짓고 싶었으면 벌써 전에 만들었을 것이다. 특히 우리 K-MRR에 비교하면 공학적으로 형편없는 저 수준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연구로는 고도의 기술로 만들어지고 있지만 평화적 이용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대해 조악하기 짝이 없는 북한 것은 플루토늄 생산에는 적합하다는 사실이다』고 말했다.
  
  라마쉬 박사는 개발 도상국의 재처리 능력에 대해서도 검토 보고서를 냈다. 그 결론도 플루토늄 생산용 원자로의 경우와 같았다. 개발 도상국들이 이미 공개된 문헌과 공개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부품으로 어렵지 않게 재처리 공장을 만들어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원폭용 플루토늄을 재처리방법으로 뽑아내려면 연구용 원자로에서 1년쯤 태운 연료를 꺼내 재처리 공장에 걸어야 한다.
  
  2만 5천㎾짜리 연구로의 천연 우라늄 연료는 약 60t이고, 여기에서 생성되는 플루토늄이 9㎏이다. 원자로에서 꺼낸 사용 후 핵연료는 물 속에서 1백 29일간 저장하여 방사능을 감소시킨다. 플루토늄 생산용 연구로에서 나온 사용 후 핵연료의 경우 1백 20일이 지나면 방사능은 t당 5만5천 큐리 정도이다. 이것은 상업용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온 사용 후 핵연료의 방사능 1t당 2백만∼3백만 큐리의 50분의1 쯤 이다.
  
  재처리의 가장 큰 기술적 문제는 방사능이 강한 사용 후 핵연료의 차폐시설 속에 집어 넣어놓고 원격 조종으로 운반, 해체, 절단, 분석, 용해, 분리시키는 일이다. 여기에 필요한 방사능 차폐 시설과 원격 조종장치의 제작 및 설치와 운영이 재처리 과정의 핵심적 사항이다. 상업용 원전 재처리 시설보다 훨씬 약한 방사능을 취급하는 핵무기용 플루토늄 추출을 위한 재처리 시험시설이 제작이나 운전면에서 훨씬 쉽다는 얘기이다.
  
  플루토늄 재처리 공장 설계도 공개된 것이 많다. 라마쉬 박사에 따르면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반웰의 재처리 공장 설계도는 도서관에서 구할 수도 있고 살수도 있다는 것이다. 라마쉬 박사는 재처리시설을 설계, 건설, 감리 하는데는 고급 인력도 필요 없고 다음과 같은 7명의 엔지니어만 있으면 된다고 주장했다. 화공 기술자 2명과 건축 기술자, 전기 기술자, 기계 기술자, 금속 기술자, 핵 공학 기술자 1명씩. 그는 작은 플루토늄 추출용 재처리 시설을 미국에서 만든다면 2천5백만 달러 쯤 들것이라고 계산했다.
출처 : 월조
[ 2003-07-04, 17:5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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