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응렬 장군, 회고록을 통하여 폭로
이응노·박인경 부부 집에서 북한 간첩 난수표와 세포조직 명단 발견. 박인경은 1994년부터 한국에 수시로 드나들며 우대 받아

李庚勳(조갑제닷컴 인턴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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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작전사령관을 지낸 윤응렬 장군(예비역 소장)이 2010년 11월, 자서전 <상처투성이의 영광>(황금알)을 출간했다. 동백림 사건 당시 프랑스 책임자였던 그는 책에서 "모든 것을 묻어두고 인생을 마감하려 했다. 그러나 나는 지난 노무현 정권의 '국정원 진실위'가 발표한 동백림 사건 진상을 보고는 고뇌에 빠지고 말았다."며 자신이 경험한 동백림 사건의 전말을 밝힌다.
  
   그는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 위원회가 발표한 동백림 사건 재조사 결과에 대해서도 아래와 같이 비판한다.
  
  <위반 정도가 약했다는 것은 매우 자의적인 해석이다. 지금 잣대로는 그것이 큰 문제가 아닐지 몰라도, 당시의 급박한 대치상황에서는 중대한 反국가행위로 인식될 수 있다. 6·8 총선 이전에 위법 행위 당사자의 제보로 수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애당초 정치적 목적으로 기획되었다는 (과거사 위원회의)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동백림 사건 당시 駐佛 공사였던 尹 장군은 顧庵 이응노와 박인경을 서울로 압송했었다. 尹 장군은 책에서 李·朴 부부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그 내용이 흥미롭다. 그는 李·朴 내외의 집에서 북한과 관련된 증거물을 찾으며 깜짝 놀랐다고 한다.
  
  < 이응노 화백은 서울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中情 본부로부터 이 화백 부부가 간첩활동에 사용한 송수신기와 亂數表(난수표) 등의 증거물을 수거해 보내라는 지시가 왔다. 이 화백의 집을 불법으로 침입해 증거물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집주인이 부재중에 압수 수색영장도 없이 가택에 침입한다는 것은 외교관 신분의 나라도 현행범으로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어 국외 추방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동행한 中情 요원은 프랑스 법에 따라 엄벌을 받게 된다. 하지만, 본국의 지시는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두지 않았으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파견 나온 中情 요원인 육군의 정 소령과 베테랑 수사관 김 준위 두 사람을 데리고 인적이 끊긴 한밤에 한국대사관을 나섰다. 다행히 내가 이 화백 집을 잘 알고 있었고 집이 단독주택이어서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다.
  
   남이 우리를 쉽게 볼 수 없는 뒷마당으로 접근해 유리창 한 장을 부순 다음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방 옷장에서 일반 가정에서는 보기 드문 단파 수신 라디오를 발견했다. 그러나 온 집안을 다 뒤졌지만, 난수표나 세포조직 명단을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은 가고 마음은 급했다.
  
   나는 이 화백이 허위자백을 해 우리를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도록 함정에 빠뜨리려는 술책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위험을 무릅쓰고 이 화백의 집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는 순간 “찾았습니다.”하는 김 준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나는 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북한 간첩들의 난수표를 보았다. 난수표는 특수 처리된 아주 얇은 용지의 넓이 3.5cm, 길이 30cm 정도 크기였다. 그것은 직경이 담배보다 약간 가늘게 둘둘 말려 프랑스 고루아(golois)담뱃갑 안에 담배와 같이 숨겨져 있었다.
  
   나는 이 화백 부부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역시 베테랑 수사관 김 준위는 달랐다. 난수표에는 확대경으로 읽어야 할 정도의 작은 활자로 4단위 숫자가 가득 인쇄되어 있었다.
  
   난수표를 찾자, 이제는 더 중요한 세포조직 명단을 찾아야 한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쯤 되니 위험을 걱정했던 마음도 사라졌다. 온 방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때 거실에 프랑스어 주간잡지 ‘파리 마치’가 1미터 높이 정도의 두 줄로 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이상했다. 이 화백 부부는 프랑스어를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살 경제적 여유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프랑스어 잡지를 구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나는 김 준위와 함께 잡지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몇 권을 넘겼을까, 잡지에 끼워져 있던 세포조직과 명단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동베를린의 북한 공작책을 중심으로 이 화백은 물론, 윤이상, 박협, 노봉유가 각기 다른 계열에 속하도록 해 그들의 橫的(횡적) 연결이 차단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노출을 대비한 공산당의 특수한 조직 형태였던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자결용 청산가리까지 발견하고는 놀랐다. 이 화백이 자결까지 하면서 북한에 충성할 것으로는 믿지 않았지만, 북한의 공작이 얼마나 무서운지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이 사건 이후 사건 관련자 중 일부가 친북 활동을 계속한 것은 사실이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顧庵 이응노 화백과 그 부인 박인경의 경우였다. 박인경은 본인 자신이 동베를린 사건 연루자(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5년)로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백건우·윤정희 부부 납치 미수 사건의 직접 당사자였다. 이 사건은 근년에 유고슬라비아 주재 북한대사가 유고슬라비아 정부에 대해 백건우·윤정희 부부 납치공작을 시인한 문서가 공개되면서 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1977년 당시 파리에 거주하던 이들이 박인경에 의해 유고슬라비아로 유인되어 북한공작원에 납치될 뻔했던 것이다.
  
   백·윤 부부는 천신만고 끝에 파리로 돌아와 프랑스 주재 한국대사관에 박인경을 고발했다. 그러나 이응노·박인경은 한국대사관의 조사에 응하지 않고 파리를 떠나 잠적했다. 그리고는 1983년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박인경이 1994년부터 한국에 수시로 드나들고 우대를 받는 것에 격분한 백·윤 부부는 납치가담자로 박인경을 지목, 수사기관에 다시 수사를 의뢰했다. 하지만, 수사는 전혀 진척되지 않았다. 오히려 박인경은 진실위의 발표를 기회로 국가에 대해 항의하는 판국이 되었다. 윤이상은 죽을 때까지 북한을 위하여 활동했고, 북한으로부터 어마어마한 대우를 받았다>
  
  
   1958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顧庵(고암) 李應魯(이응노, 1904-1989)·朴仁京(박인경, 1926~) 부부는, 1967년 東柏林(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한국으로 압송된다.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이들은 다시 파리로 돌아간다.
  
   동백림 사건은 1967년 7월8일 중앙정보부(現 국가정보원)의 발표로 알려졌다. 북한은 1957년부터 비교적 통행이 자유로운 동베를린에 거점을 두고, 막대한 공작금을 동원해 서독을 비롯한 서유럽에 거주 중인 유학생 및 각계각층의 장기체류자들에게 공작을 벌였다. 이 공작으로 유럽의 수많은 남한 유학생과 장기체류자들이 포섭됐다. 그 중 11명은 평양에 다녀온 후 ▲해외유학생·광부·간호사 등의 명단을 입수하여 평화통일방안을 선전하고, ▲국내 민족주의비교연구회와의 연계 및 각계 요인들에 대한 포섭, ▲선거에서의 혁신인사 지지 등의 지령을 받았다. 1967년 12월3일 재판부는 이들에게 국가보안법·반공법·형법(간첩죄)·외국환관리법 등을 적용해 조영수·정규명에게는 사형, 정하룡·강빈구·윤이상·어준에게는 무기징역 등 피고인 34명 모두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동백림 사건 발생 10년 뒤인 1977년 7월31일, 유고(現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서 ‘尹靜姬(윤정희)·白建宇 (백건우) 부부 납치 미수 사건’이 발생한다. ‘尹·白 부부 납치 미수 사건’이란, 유명 피아니스트 백건우·여배우 윤정희 부부가 北韓의 工作으로 유고에서 拉北(납북)될 뻔한 사건이다. 이 납치 미수사건에는 尹·白 부부와 顧庵의 두 번째 부인 박인경이 등장한다.
  
   北으로부터 ‘尹·白부부 납치’지령을 받은 朴仁京은 연주회 초청이라는 명목으로 ‘尹·白 부부’를 1977년 7월31일, 공산국가인 유고로 유인했다. 朴은 유고에서 이 부부를 납치해 납북시키려고 계획했으나, 실수를 범해 미수에 그치고 만다.
  
   ‘尹·白 부부’는 九死一生(구사일생)으로 납북을 면했고, 박인경이 유고로 자신들을 유인해 납북시키려 했다고 주장했다. 尹·白 부부 이외에도 많은 이들이 박인경의 행동을 의심했다. 사건 직후 박인경은 조사에도 협조하지 않았고, 사건의 실체도 밝히지 못했다. 心證(심증)만 있고, 物證(물증)은 없었기 때문이다.
  
   1977년 프랑스 파리. 고암 이응노 화백의 주례로 1년 전 결혼한 尹·白 부부는 고암과 박인경을 부모처럼 여겼다. 그해 7월, 박인경은 연주회 초청이라는 명목으로 尹 ·白 부부를 프랑스 밖으로 유인했다. 박인경은 연주회 초청 이전에도 “같이 해외여행을 가자”고 이들에게 두 번이나 제안을 했었으나 부부는 거절했었다.
  
   다음은 월간조선 1999년 11월호에 실린 우종창 기자의 기사 일부로, 납치 사건의 정황을 적고있다.
  
   <1977년 7월 초, 白建宇씨는 李應魯씨의 부인 朴仁京(당시 51)씨를 통해, 스위스 취리히에 사는 ‘미하일 파블로비크’라는 부자가 자기 집 살롱에서 음악회를 열어 白씨의 연주회를 듣고 싶어한다는 제의를 받았다. 고려화랑(李應魯씨가 파리에서 경영한 화랑)의 고객 ‘에나’라는 여성으로부터 이 제의를 받았다는 朴씨는 며칠 후, 파블로비크 이름의 초청장을 白씨에게 건네 주었다.
  
   7월21일자로 된 초청장의 내용은 白씨의 음악을 듣게 되어 기쁘다는 것과 슈베르트, 차이코프스키, 쇼팡 등을 듣고 싶으며 白씨 가족은 물론, 朴仁京씨도 초청, 경비를 다 부담하겠다는 것이었다. 파블로비크는 이 초청장에서 음악회는 고령의 자기 부모를 위한 것인데 그들이 유고 자그레브 교외의 별장에 살고 있다고 했다. 白씨는 연주장소는 당연히 초청자가 살고 있는 스위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두 달 후로 예정된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서울 연주회 준비로 바빴던 白씨는 일단 거절했으나 朴仁京씨가 자기 입장이 난처하다고 권유해 마지못해 응낙했다. 白씨는 한 해 전에 李應魯씨 주례로 영화배우 尹靜姬씨와 결혼식을 (李씨 집에서) 올렸고, 평소 李씨 집안과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
  
   白씨는 부인 尹靜姬씨와 생후 5개월 반된 딸 眞希(진희)양을 데리고 朴씨와 함께 1977년 7월29일 오후 2시5분, 파리發(발) 취리리行(행) 스위스 항공 705便(편)에 올랐다. 다음날인 7월30일은 尹靜姬씨의 33회 생일이어서 동행했다. 李應魯씨의 아들 隆世(융세)씨가 이들을 파리 공항까지 태워주었다.
  
   취리히 공항에 도착하자 佛語(불어)가 유창하고 키가 큰, 파블로비크의 여비서라는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비서는 파블로비크의 양친이 유고에 가 있어, 거기서 연주회를 하기 때문에 유고행 비행기로 갈아타야 한다면서 白씨 일행의 짐을 찾아 옮겨 싣는 수속을 밟았다.
  
   白씨가 비자도 없이 공산국가 유고에 갈 수 없다고 하자, 여비서는 스위스 제일의 갑부가 입국 수속을 다 취해 놓았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하며 취리히∼자그레브간 왕복표를 건네주었다. 尹씨가 아기에게 먹일 요구르트를 사려고 했을 때, 여비서는 자기가 갔다 오겠다고 자청한 후, 朴仁京씨에게 동행을 제의해 朴씨가 따라갔다. 朴씨는 여비서로부터 봉투를 받았다. 취리히 공항에서 잠시 대기하던 白씨 일행은 자그레브行 유고 항공기에 올랐다. 여비서는 동행하지 않았다.
  
   시골 공항처럼 작은 자그레브 공항에서 尹靜姬씨는 ‘조선민항’이라 쓴 북한 항공기가 착륙 대기 중임을 보았다. 白씨 일행은 비자가 없어 출입국관리소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승객들이 다 빠져 나간 뒤, 한 공항 직원이 나가라고 손짓해 출입국 심사대를 통과했다. 그 직원은 여권에 입국 확인 스탬프를 찍어주지 않았다. 공항 청사 밖으로 나오자 白씨 일행을 마중 나온 사람은 없었다. 尹씨는 선글래스를 낀 동양 여성이 멀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마중객을 찾기 위해 두리번대는 白씨에게 朴씨는 취리히 공항에서 파블로비크 여비서한테서 받았다며 편지 봉투를 주었다. 봉투 겉에는 ‘아미크’라는 이름과 주소, 집의 약도가 그려져 있으며, 안에 유고 돈 8백 디나르가 들어 있었다. 白씨는 택시를 타고 운전사에게 약도를 보여주었다. 자그레브 시가지를 벗어난 택시는 한적한 시골 길을 15분가량 달린 뒤, 3층 집 앞에 도착했다. 행인이 없는 조용한 곳이었다. 택시 요금은 2백 디나르가 나왔다.
  
   마당에 사람이 없고 연주회를 초대한 집치고는 조용했다. 이상하다고 느낀 白建宇씨는 택시 운전사에게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아내 尹씨와 딸은 택시 안에 두고, 白씨는 朴仁京씨와 운전수 등과 함께 집 근처로 다가갔다. 정문은 잠겨져 있었고, 뒤로 돌아가니 뒷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운전사가 앞에 서고 그 뒤를 白씨와 朴씨가 따랐다.
  
   1층은 안을 둘러볼 수 없게끔 창문마다 커튼이 쳐져 있었다. 白建宇씨는 여비서가 준 봉투 속에 들어 있던 키로 문을 열었다. 朴仁京씨가 맨 먼저 집안으로 들어가고 白씨와 운전사는 밖에서 기다렸다. 조금 있다 밖으로 나온 朴仁京씨는 2층에 만찬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白씨가 들어 가보니 1층에 있는 세 개의 방은 모두 문이 잠겨 있었고 2층은 모두 방문이 열려 있었는데, 그중 한 방에 보자기를 씌운 테이블 위에 복숭아를 담은 과일 그릇과 하얀 접시가 놓여 있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白씨가 이웃집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옆집에서 10대 소녀가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白씨가 소녀에게 “아미크씨 집이 맞느냐” 고 묻자 소녀는 “그렇다” 면서 “늙은 할아버지가 혼자 사는 집” 이라고 했다. 소녀는 3층 창밖에 널려 있는 빨래를 가리키며 “집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며 건너왔다. 소녀가 먼저 집안으로 들어가고 白씨가 뒤처져 들어갔다. 소녀가 3층으로 올라간 지 얼마 안 돼 갑자기 “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서 내려오는 소녀 뒤에 동양 남자가 서 있었다.
  
   놀란 白建宇씨는 택시 쪽으로 달려갔다. 동양인은 “웨이트(Wait·기다려라), 웨이트” 하며 다가왔다. 白씨가 얼른 택시에 오르자 동양인은 택시 손잡이를 잡았다. 白씨는 안에서 문을 잠그고 운전사에게 빨리 출발하라고 말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白씨는 미국 대사관을 찾았다. 자그레브 주재 미국 영사관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6시10분이었다.
  
   영사관은 문이 닫힌 뒤였고, 도서관도 막 문을 닫으려는 참이었다. 도서관 직원이 크리스텐선이라는 부영사를 소개했다. 부임한 지 얼마 안되는 서른 두 살의 젊은 사람이었다. 크리스텐선은 자기가 숙박 중이던 팰리스 호텔로 白씨 일행을 안내했다. 호텔에서 白씨는 다음날인 7월30일 오전 8시50분에 유고를 출발해 파리로 가는 비행기표를 구입하고 저녁을 먹었다.
  
   연락을 받고 호텔로 달려온 미국 공보관 관장은 白씨가 미국 영주권을 가진 피아니스트라는 것을 알고 일행을 집으로 초대해, 白씨의 연주를 들었다. 밤 12시쯤 호텔로 돌아온 白씨 일행(尹靜姬씨+朴仁京씨)은 헤어지기가 겁나 모두가 416호실에 투숙했다. 크리스텐선의 방은 3층에 있었다.
  
   아침 6시40분쯤 밖에서 416호실 문을 두드렸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白씨가 가만히 있으니까 朴仁京씨가 문을 열려고 했다고 한다. 白씨는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하고는, 크리스텐선 방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잠시 후 크리스텐선은 “문밖에 세 명이 있다. 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인데 모두 북한 사람 같다” 고 전화로 알려주었다. 1시간쯤 지난 후, 짐꾼 한 명을 데리고 온 크리스텐선은 白씨 일행을 로비로 안내했다. 로비에는 미국 영사관 영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영사는 크리스텐선에게 白씨 일행을 공항까지 안내하라고 일렀다.
  
   공항에서 출국 심사를 받는데 담당관은 입국 도장이 없다며 의아해했다. 전날 입국 때 白씨 일행에게 들어가라고 손짓했던 사람이 나타나 또 한 번 손짓으로 나가라고 했다. 白씨 일행은 파리行 유고 항공기 ‘JU 1242’便을 타고 7월30일 정오쯤 파리 오를리 공항에 내렸다. 집에 도착하고 얼마 후, 유고 美 영사관의 크리스텐선이 안부를 묻는 전화를 걸었다>
  
  당시 국내 언론 보도에서 지적된 박인경의 미심쩍은 행동은 다음과 같다.
  
   < ①연주회 초청을 주선했다는 여자에 대해 “파리에 사는 사람이며 아주 친한 사람” 이라고 했다가 “어디 사는 사람인지 모르며 서너 번밖에 만난 일이 없다” 며 분명한 신원을 밝히지 않고 있다.
  
   ②초청장이 처음엔 우편으로 보내져 왔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비서라는 여자가 두고 갔다고 번복했는데 비서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있다.
  
   ③취리히 공항에서 파블로비크의 여비서가 아기에게 먹일 요구르트를 사러 갈 때 朴仁京씨가 따라가, 白씨 부부가 안보는 데서 자그레브 별장의 약도와 돈이 든 봉투를 받았다.
  
   ④자그레브 공항 도착 후, 마중 나온 사람이 없어 白씨가 두리번거리자 朴仁京씨가 봉투를 내주면서 “택시타고 오라는 말인가봐. 택시 타고 가자” 라고 말했다.
  
   ⑤별장 도착 후, 빈집을 앞장서 올라갔다 나오면서 “만찬회 준비가 다 되어 있다. 올라가 봐” 라고 말했다.
  
   ⑥미국 영사관으로 가면서 “이 일을 크게 벌리지 말고 조용히 덮어두자” 고 말했다.
  
   ⑦미국 영사관에 들어서면서부터 말이 없어지고, 미국 공보관장이 집으로 초대했을 때는 호텔에 그냥 있자고 했다
  
   ⑧북한 사람이 호텔 방문을 두드렸을 때 “내가 가볼까” 하면서 문을 열어주려는 것을 白씨 내외가 기겁을 하며 말렸다
  
   ⑨白씨가 한국대사관에 가서 신고를 하자고 하자 “나는 프랑스 정부와 손잡고 살 수 있다” 면서 거절했다. >
  
   사건이 발생한 지 한 달 후인 1977년 8월31일, 尹·白 부부가 서울로 왔다. 부부는 중앙정보부에서 피해자 조사를 받았다. 이것으로 납치 미수 사건 수사는 종결되었고,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 공식 발표를 하지 않았다. 대신 정부는 顧庵 이응노 화백의 국내 전시회를 금지시키고 작품 유통을 막았다.
  
   이후 이응노·박인경 내외는 1983년 한국 국적을 버리고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이들은 1987년, 북한의 초청을 받아 평양에서 이응노 화백 개인전을 열었다. 그 후 李 화백은 1989년 프랑스에서 사망했다. 李 화백은 尹·白 부부 납치 미수 사건이후 한국 땅을 한 번도 못 밟은 것이다.
  
   박인경은 납치 발생 17년 만인 1994년 1월초, 서울에서 열린 이응노 화백 5주기 展에 첫 입국한 후 한국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1996년, 金正日의 본처인 성혜림의 조카 이한영은 자신이 쓴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 동아일보사(1996)>에서 尹·白부부 납치 지령은 평양에서 내려진 것이라고 밝힌다. 1997년 북한에서 남파한 공작원에 의해 피살된 이한영은 이 납치 사건에 박인경이 개입됐다고 서술했다. 그가 지목한 ‘할머니’는 박인경을 지칭한다.
  
   <이 사건(윤·백 부부 납치 공작)을 총지휘했던 사람은 이정룡 연락부 1부부장이다.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까지 했다. 백건우·윤정희 부부 납치미수 사건은 모스크바에서 이부부장에게 직접 들었다. 공작책임자의 말이니 가장 정확할 것이다. (중략)
  
   제일 데려오기 쉬운 사람이 프랑스에 있는 윤정희라고 판단했다. 작전계획의 비준도 받았다. 김정일이 허가한 것이다. 납치 장소는 유고슬라비아로 정했다. 처음부터 유고슬라비아로 데려오면 공산국가라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음악을 좋아하는 돈 많은 재일교포가 백건우씨의 팬인데 그가 백씨의 연주를 듣고 싶어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윤정희를 잘 아는 할머니(박인경을 지칭)를 공작원으로 참가시켰고 유고의 자그레브 경찰국장을 3만 달러를 주고 포섭했다. 별장 하나를 빌려 외곽은 자그레브 경찰이 지키고, 별장 안에는 공작원들이 숨어 있었다. 공작원 할머니가 집에 들어와 “왔어요” 라고 말하면 모두 튀어 나가 납치하기로 했다.
  
   납치작전의 실패는 할머니가 대사를 틀리게 말한 탓이다. 할머니가 “왔어요” 하면 벽장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튀어나오게 돼 있었는데, 할머니가 “다들 어디 갔나” 하는 바람에 옷장에 숨어 있으면서 튀어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암호가 이상하자 숨어있던 사람들 중 허묵(허정숙의 아들)이라는 연락부 과장이 튀어나왔다.
  
   백씨 부부는 미국의 보호 아래 자그레브 공항을 빠져나갔다. 북한 측은 마지막으로 공항에서 한 번 더 납치를 시도해보자고 했지만 결국은 실패했다. 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관계자들은 모두 모가지가 날아갔다. 이정룡 부부장만 살아 남았다>
  
   납치 미수 사건 발생 26년 뒤인 2003년 7월, 월간조선 7월호는 북한이 尹·白부부 납치 공작을 공식 시인한 외교문서를 발견해 특종보도했다. ‘尹·白 납치 공작’에 북한이 개입한 것이 공식 확인된 것이다. 월간조선은 크로아티아 정부가 보관 중인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중앙委 간부회 행정위원인 도브리보예 비디치가 자그레브 주재 북한 대사 정광순을 불러, 북한 측이 자행한 ‘한국 피아니시트 백건우씨 유괴 공작’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고, 이에 대해 북한 정광순 대사가 해명하는 대화록 형식의 문서를 입수 했다고 보도했다.
  
  다음은 월간조선 2003년 7월호 기사.
  
   <익명을 요구한 한 정보기관 관계자는 “영화狂인 金正日이가 영화배우 윤정희씨를 납치해 오라는 지령을 내려, 당시 對外연락부 부장이었던 전설적인 할머니 공작원 정경희가 직접 평양에서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나와 지휘했다. 자그레브 현장의 실무 책임자는 ‘허묵’이란 가명을 사용하는 베테랑 공작원이었다. 윤정희 부부를 유고 자그레브로 유인하는 역할은 朴仁京이 맡았다” 고 증언했다.
  
   “허묵은 유고 자그레브를 무대로 활약한 북한의 거물 공작원이다. 워낙 많은 假名(가명)을 사용했기 때문에 진짜 이름과 출신 내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북한이 유엔(UN)에 옵서버단을 파견했을 때 허묵은 ‘권호’라는 가명으로 유엔본부에 근무하며 재미교포들을 공작금을 주고 포섭했다. 허묵이 필요로 하는 돈과 각종 첩보장비를 보급해 준 사람은 비엔나 주재 북한대사관 3등 서기관 이상준이다. 허묵과 평양의 통신 연락은 이상준이 담당했다”
  
   이 관계자는 윤정희씨 부부 납치에 관계했던 한 북한 여자의 이름을 공개했다. 그녀의 이름은 ‘방화자’로, 허묵의 연락책 이상준의 아내라고 한다. 이 관계자에 의하면 ‘방화자’는 납치사건 당시 유고 자그레브 공항에 나가 선글라스를 끼고 윤정희씨 부부에 대한 감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이런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사건 발생 직후 윤정희씨 증언으로 공개되었다.
  
  윤정희씨는 “시골 공항처럼 작은 자그레브 공항에서 조선민항이라 쓴 북한 항공기가 착륙 대기 중임을 보았다. 공항 청사 밖으로 나오자 우리 일행을 마중나온 사람은 없었다. 나는 선글라스를 낀 동양 여성이 멀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고 말했다.
  
   영국의 선데이 타임스도 사건 발생 당시인 1977년 8월14일자 1面 기사에서 ‘白씨 부부가 유고 공항 입구에서 보았던 선글라스를 낀 동양 여자는 자그레브 주재 북한 통상대표부에 근무하는 북한인으로 밝혀졌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 동양 여자가 ‘방화자’이고, 이상준의 아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방화자’의 정체를 처음 공개한 이 관계자는 “납치 공작은 ‘방화자’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고 말했다.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1977년 당시 유고인들은 선글라스를 끼지 않았다. 유럽인도 아닌 동양 여자가 선글라스를 끼고 자그레브 공항에 나타난 것이 납치 공작 실패의 첫 번째 실수이고, 두 번째 실수는 ‘방화자’가 북한식의 짧은 치마를 입었다는 점이다. 유럽의 낯선 공항에서 어색한 차림을 하고 있는 동양 여자를 보는 순간, 영화배우인 윤정희씨는 여성 특유의 직감력에 의해 긴장했던 것이다”
  
   납치 공작이 실패로 돌아가자 북한의 金正日은 굉장히 애석해했다고 이 관계자는 말했다.
  
   1년 후인 1978년 북한은 영화배우 崔銀姬(최은희)씨를 홍콩으로 유인, 납치에 성공한다. 앞서 언급한 정보기관 관계자의 계속되는 증언이다.
  
   “최은희 납치 공작의 단서는 박성철이 제공했다. 남북 조절위원회 회의 참석차 서울에 온 박성철은 金正日을 위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라는 영화의 흑백 필름을 얻어 북한으로 돌아갔는데 이 영화를 본 金正日이 최은희씨 납치를 지령했다.
  
   최은희씨 납치는 윤정희씨 납치 방식과 거의 그대로 진행되었다. 파리에 살고 있던 윤정희씨 부부를 유고로 유인한 사람이 朴仁京이란 여자이었듯이 당시 서울에 살았던 최은희씨를 홍콩으로 유인한 사람은 李像姬(이상희·당시 52세·사망)라는 여자다. 朴仁京은 가짜 연주회 초청장을 만들어 윤정희씨 부부를 유인했고, 李像姬는 최은희씨에게 홍콩 영화 출연을 위해 초청한다는 허위 초청장을 보냈다. 똑같은 수법에 최은희씨가 당한 것이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박인경의 한국 활동이 자유로워지자 尹·白 부부는 國情院(국정원)에 찾아가 천용택 원장에게 “박인경은 북한하고 관련성이 짙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마음대로 드나들도록 놔두는 것은 위험합니다”고 했으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고 했다.
  
   朴仁京은 2000년부터 2005년 9월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서 ‘이응노 미술관’을 운영했다. 이후 평창동 이응노 미술관의 수장품을 인수받은 대전광역시는 2007년 5월, ‘대전광역시 이응노 미술관’을 개관했다. 朴은 미술관 개관과 함께 명예 관장으로 임명돼 지금도 명예 관장 職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2010년 11월, 인사동에서 15년 만에 개인전을 연 바 있다.
[ 2011-01-23, 10:3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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