問3/박정희는 비밀 독립군이었나?

조갑제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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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3: 박정희는 滿軍내의 비밀 독립군이었나?
  답: 박정희를 비밀 독립군이었다고 미화하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사실이 아니다. 다만 그는 滿軍 장교이면서도 민족정신을 버리지 않고 있어 독립군 조직의 포섭 대상자였음은 확실하다. 기자가 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해당 부분을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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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승환 중위
  
  박승환은 1943년에 여운형의 명령을 받고 연안으로 잠입하여 무정을 만나고 왔었다.
  
  만군중위 박승환은 만군내의 조선인 장교들과 무정의 세력을 연결시켜 일본의 패망이 임박한 시점에 국내로 진공한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박승환은 '만주와 중국전선에 있는 조선인 학병들이 탈출하여 백두산으로 집결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하고는 '조국광복의 과정에서 우리가 피를 흘려야만 떳떳하게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열변을 토하는 것이었다.
  
  방원철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팔로군과 싸우면서 느꼈던 모순과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 같았다. 박승환은 '오늘부터 방동지는 우리 비밀조직의 일원이 되었으니 절대로 경거망동을 하지말라'고 당부했다. 특히 소영웅적인 행동을 하지 말 것과 개별적인 탈출을 금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박승환은 '같은 부대에 근무하는 조선인 장교들을 포섭하고 무기들을 구해서 봉천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방원철은 열하성의 8단으로 돌아와서 이주일 박정희 신현준을 설득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부대 사이가 수십 리, 수백 리나 떨어져 있어 만나기도 어렵고 그들도 자신과 한 마음일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여운형-박승환계의 이 만군내 비밀조직의 한 회원이었다는 증언들이 있다. 이 증언들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기자는 박승환이란 한 젊은 장교의 비극적이고도 영웅적인 삶과 만날 수 있었다. 박정희는 박승환에 대해서 존경하는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었다.
  
  박명근(전 파주출신 4선 국회의원)은 심계원에서 근무할 때인 1950년대 말 박정희 1군참모장을 찾아가 '박승환의 조카입니다'라고 인 사한 뒤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삼촌 말씀을 하시면서 저를 따뜻하게 대해주셨습니다. 삼촌의 딸 정근이 해운대로 피서갔다가 익사하였을 때는 군수기지사령관이시던 그분이 뒷수습을 다 해주셨지요. 제가 경제비서관으로 청와대에서 근무할 수 있었던 것도 그분이 직접 선택하신 때문입니다. 제가 지역구 의원후보로 공천을 받을 때 일부에서 삼촌의 사상에 대해서 시비를 걸자 막아주시기도 했습니다.'
  
  박승환의 미망인 김순자(뒤에 김민행으로 개명)할머니(75세)는 캐나다 토론토에 살고 있다. '1963년에 박의장이 대통령으로 출마했을 때 마산에 내려왔는데 지방유지들과의 모임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박승환의 처입니다'고 인사했더니 갑자기 정자세를 취하더니 깍듯이 인사를 하여 주위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박대통령 시절에는 아부자들이 박승환과 박정희의 관계를 과장하고 조작하여 박정희가 '비밀독립군이었다'는 내용을 담은 책들을 펴냈다.
  
  1980년8월18일에 육군본부가 펴낸 '창군전사'란 자료집에도 박정희가 '간도특설대에 장교로 근무하면서 비밀광복군이 되어 북경을 비밀리에 오가면서 활약했다'는 요지로 적혀 있다. 1991년에 중국만주지방의 조선족 유지들이 발간한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 결전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특설부대에 참가한 자들은 모두 민족반역자들이다. 박정희는 특설부대의 중대장급 군관이었다. 그는 해방이 되자 시세에 편승하여 하북지대 조선청년들을 묶어세워 조선의용군에 참여하려 했다. 그러나 받아주지 않자 곧추 남조선으로 내뺐는데 그 뒤 우익세력을 긁어모아 나중에는 대통령으로까지 되었던 것이다.> 앞으로 밝혀지겠지만 박정희는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적도, 활동적인 비밀독립군이었던 적도 없으며 독립투사를 잡아가둔 정보장교였던 적도 없다.
  
  미화와 격하의 교차점에서 헷갈리기 쉬운 '박정희의 만군행적'을 좀 넓은 관점에서 바라보려면 박승환이란 인물의 연구가 필요하다. 박승환은 박정희보다 1년 늦은 1918년 경기도 파주군 월룡면에서 태어났다. 대지주 박우용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경복고교의 전신인 경기제2고보를 졸업했다. 수영, 스케이트 선수였고 훤칠한 키에 힘이 셌다. 졸업한 뒤 1년간 집에서 쉬었는데 폐가 나빴던 것이다. 이때 몽양 여운형(여운형)과 접촉하더니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박승환이 1937년에 봉천군관학교 제7기생으로 들어간 것도 여운형의 권고에 의한 것이었다. 봉천군관학교에서는 2·26사건에 연루되었 다가 만주로 밀려온 일본인 교관 간노 히로시(관야홍)의 지도와 격려를 많이 받았다. 졸업후 박승환은 1년간 기병장교로 근무하다가 항공장교로 전과했다. 조종사가 된 것이다. 그는 봉천항공학교에서 교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봉천에는 그때 김태덕이란 조선인이 공장들을 경영하여 돈을 많이 벌고 유지로서 현지 사회에서는 높은 신망을 얻고 있었다. 여운형은 홍사익장군에게 박승환을 김태덕의 둘째 딸 김순자에게 중매해줄 것을 부탁했다. 여운형은 박승환의 조직활동을 은폐하고 엄호해줄 보호막으로써 김태덕의 그늘을 빌리려 했던 것 같다. 그때 홍사익은 소장(별은 하나였다. 준장은 일본군제에는 없었다.)으로서 길림성의 공주령학교 부교장으로 있었다. 일군내의 조선인 장교로는 가장 선임자였을 뿐 아니라 존경받는, 즉 민족혼이 죽지 않은 분이었다. 박, 김 두 사람은 1942년에 봉천신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박승환이 약 7년간 닦아놓은 인맥을 중심으로 조직에 들어간 것은 1945년 4월 봉천에서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박승환, 이상렬, 박준호, 최창륜, 문용채는 여운형의 건국동맹 산하 조직이란 뜻에서 '조선건국 동맹 만주분맹 군사위원회'란 명칭에 합의하였다. 박준호의 기억에 따 르면 이 조직의 대표는 박승환, 연락책은 금주 주둔 만군헌병대 문용 채 상위, 군관학교출신 장교 담당은 최창륜, 재정은 김순자의 형부인 평양갑부 최기영이었다.
  
  이들은 지역별로, 또 기수별로 조직대상 장교들을 추리게 되었다. 박준호는 생전에 기자에게 '신경 비행대에 있던 최창륜이 1기 후배인 박정희를 2기생 대표로 추천한 것으로 기억된다. 박정희와의 연락은 그가 맡았을 것이다. 박승환이 해방 전에 박정희를 직접 만난 적은 없 다고 본다'는 증언을 남겼다. 간도 용정 광명중학교 출신의 쾌남아 최 창륜은 생도시절에는 후배 박정희를 구타하여 눈물을 맺히게 한 적도 있었으나 졸업한 뒤에는 친해졌다. 연령초과인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에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강재호 상위는 간도특설대 에 있었다.
  
  간도특설대는 1개 대대규모의 부대였지만 부대장을 제외하 고는 거의 전부가 조선인이었으므로 국내진공작전을 위해선 가장 중요 한 병력이었다. 이 부대에선 최남근, 강재호 두 장교가 버티고 있으면 서 박승환과 완전히 호흡을 같이 하고 있었으므로 따로 공작을 할 필 요가 없었다. 박정희가 강재호, 최창륜 같은 핵심 장교들과 믿고 지내 는 사이였고 그의 평소 성향이 민족적이었다는 점들로 미루어볼 때 '만주분맹'의 회원이 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박정희는 주 동적 참여자나 활동가는 아니었다. 박정희가 중도좌파로 분류되는 여 운형계열에 해방 전부터 동조했다는 것은 해방 후 그에게 닥쳐올 험난 한 역정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 2004-07-28, 16:2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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