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2) - 김영삼 총재의 등장과 김재규의 갈등(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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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뒤 박정희의 비호로 출세 시작
  
  5·16 쿠데타가 났을 때 김재규 준장은 국방부 총무과장이었다. 그는 5·16거사에는 가담하지 않았으나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에 의해 나주의 호남비료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공장의 건설을 지휘한 그는 공장 준공식을 치른 뒤 1963년 9월 서울근교의 제6사단장으로 복귀했다. 김재규가 존경하며 따른 사람은 박대통령을 비롯, 이종찬(李鍾贊·전육군참모총장) 장군, 정구영(鄭求瑛·공화당 총재 역임), 김계원 등이었다. 김은 존경할 만한 사람에겐 극진한 예우로 대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런 사람을 찾아가 만나는 데도 힘을 썼다.
  
  백두진 전국회의장은 부산 임시 수도 시절 재무장관으로 있던 자기를 찾아와 나라를 걱정하던 김재규 중령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1964년 6월 3일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대학생 데모대가 서울시내를 휩쓸자 정부는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김재규는 6사단장으로서 휘하부대를 이끌고 서울에 진주했다.
  
  10·26뒤 김재규는 강신옥 변호사에게 이렇게 진술했다.
  '그때 이화여대생들이 데모를 했는데 진압부대가 하이 힐을 일곱 가마니분이나 거두어왔다. 덕수궁에 앉아서 가만히 생각하니 나라가 큰일이라는 판단이 서더라.' 당시 공화당 부총무 이만섭은 옛 스승인 김재규의 부름을 받고 계엄 지휘부가 있는 덕수궁으로 갔다고 한다. '앰블런스 안에서 김장군은 군의 심상치 않은 공기를 이야기해주면서 그 내용을 박대통령에게 전달해 달라고 나에게 부탁을 합디다.' 그 부탁 내용에 대해서 이총재는 지금도 함구하고 있다.
  김재규는 가끔 '6·3사태 때 김종필의 외유를 건의한 것은 나다'고 자랑하기도 했었다.
  
  1969년 3선개헌 때 김재규는 국군보안사령관이었다. 박대통령은 차지철 의원을 정구영에게 보내 '3선개헌에 찬성해주시든지 탈당을 해달라'는 친서를 전달했다. 정구영이 고집을 꺾지 않자 김재규를 보냈다. 정구영이 계속 '찬성 못하겠다'고 하자 김은 '옳으신 말씀인데, 그러시면 더 큰 사태가 옵니다'고 말하곤 물러났다고 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정구영은 이종찬과 함께 김재규가 가장 존경하는 두 사람이 됐다. 한 사람은 군의 정치도구화에 반대했고, 다른 이는 장기집권에 반대한 사람이었다.
  
  1972년 6월 정구영은 OO산에 놀러갔다. 김재규는 당시 3군단장이었다. 정구영 일행이 차편으로 군단 사령부 앞을 지나는데 김재규가 미리 알고 아내와 함께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준비를 해놓았으니 들고 가시라'는 것이었다. 정구영은 '고맙지만 나와 만난 사실이 대통령 귀에 들어가면 자네가 곤란해진다'고 사양했다. 김은 '그러면 차 한잔이라도……'라고 졸라 정구영은 김재규의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정구영과 동행했던 반정부 인사는 처음엔 김재규와 동석하기를 꺼렸으나 헤어지고 나선 '괜찮은 군인이다'고 평했다 한다.
  
  군단장 시절 그를 만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는, 정구영의 어느 측근은 '그때도 공화당 정권에 대한 불만을 읽을 수 있었다'면서 '김재규를 멍청하다고 보는 이들이 있는데 바로 그들이 멍청한 사람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멍청'한 것에 대한 논리는 별도로 하고라도, 이 에피소드는 그가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이면 몹시 중히 알 뿐 아니라, 스스로 하고 싶다고 느낀 일에는 주위의 눈치를 별로 보지 않는 직정(直情)의 인간임을 보여준다.
  
  1967년에 김재규는 유명한 관광요정 선운각 주인 장정이와 깊은 관계를 갖게 된다. 2년 뒤엔 남자 아이까지 태어났다. 장마담은 술꾼들 사이에선 '몸뻬'란 별명으로 알려진 여자. 미모는 아니고, 아주 활동적인 성격의 여자였다.
  
  대통령 납치 계획?
  
  김재규는 10·26뒤 재판과정에서 3군단장 시절부터 박대통령에 대한 거역을 모의했었다고 진술했다. 3선개헌에 이어 10월 유신으로 박대통령이 장기집권을 시도하는 데 분개, 박대통령이 1972년말에 3군단을 방문하면 그를 감금, 하야 성명을 발표케 할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사령부 울타리를 바깥에서 안으로 침입하는 것을 막는 식으로 설계하지 않고 안에서 바깥으로 달아나지 못하도록 변칙설계를 해놓았다는 것이다. 박대통령은 예정대로 사령부를 방문했는데 막상 면대해보니 생각이 달라져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 진술은 아무런 물증이 없어, 생각하기에 따라선 단순한 공상으로 치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무렵 임방현 청와대 특별보좌관은 김재규의 부대에서 유신관계의 강연을 한 뒤 청와대로 돌아가려고 했다. 헬기에 임특보가 오르자 김재규는 경례를 하면서 '각하께 가시거든, 이 김재규 잘 있다고 말씀드려주십시오'라고 소리쳤다. 임특보는 김의 그 모습이 변경에서 임금을 그리는 신하처럼 비쳤다고 한다. 이즈음 김재규가 군복무중인 그의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지도자는 먼저 수양으로 인격을 완성해야 한다. 대인관계는 기교로는 될 수 없다. 지성(至誠)만이 요결(要訣). 하급자(사병)를 볼 때 이것이 우매하게 보이면 자기의 눈이 우매한 줄 알아야 한다. 민심 즉 천심, 사병심 즉 민심(民心卽天心, 士兵心卽民心)……'
  
  1973년 3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김재규를 유정회 1기 의원으로 지명한 것은 물론 박대통령이었다. 그러나 국회의원 시절 그의 활동은 전무상태였다. 1973년 12월 유정회 의원 재직중 정보부로 옮긴 김재규는 신직수부장 밑에서 실권 없는 차장 노릇을 했다. 신부장은 국내담당 조일제 차장보, 해외담당 이철희(李哲熙) 차장보 중심으로 조직을 운영했다. 김재규는 소외시켰다. 신부장은 김재규가 5사단 연대장으로 있을 때 사단 법무장교였다. 지학순 주교가 구속됐을 때 조차장보가 김수환 추기경을 설득, 추기경을 박대통령과 면담시켜 지주교를 석방케 한 적이 있었다. 추기경 설득 때 차장보와 동행한 김재규는 '추기경님, 십자가를 메어 주시지요'라고 연방 간청했었다.
  
  지주교 석방 직후 신부장은 마음을 바꿔 그를 재구금해버려 김재규는 중간에서 곤란한 처지가 되기도 했다.
  
  1974년 8월 신민당 전당대회 직전 신부장은 부하들에게 야당 공작에 개입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그 대신 당시 국회의원이던 차지철이 야당 공작에 깊이 개입했다. 차의 야당 공작 습성은 여기서 길들여졌고, 김은 이때부터 차를 좋게 보지 않았다. 김재규는 이즈음 미국에 갔을 때 경금속제로 된 조그마한 권총을 하나 사와 신부장의 허가 아래 휴대하고 다녔다. 바지 오른쪽의 작은 주머니를 크게 개조하여 라이터(김은 담배 안 피움)처럼 넣고 다녔다. 1974년 9월 건설부장관으로 임명받고 청와대에서 사령장을 받는 날 김재규는 이런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재판과정에서 진술했다.
  
  '국민과 어머니, 집사람, 딸 및 남동생들에게 전할 유서 다섯 통을 준비, 나의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고 작은 태극기의 내면에 민주·민권·자유·평등이라 쓰고는 아주 작은 권총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사령장을 받으러 갔다. 그러나 대통령의 얼굴을 대하니 마음이 달라져 결행하지 못했다. 1975년도 대통령 초도 순시 때에 똑같은 생각으로 장관실에 있는 태극기의 축 늘어진 귀퉁이를 면도칼로 잘라 그 속에 권총을 넣어두었다가 순시하는 대통령의 목숨을 끊겠다고 결의했으나 막상 만난 뒤 대화해보면 모진 마음이 약해져서 그 생각을 버리고 유서와 태극기는 태워버렸다.'
  
  이 말 또한 김의 마음속에서 있었던, 증거가 없는 이야기라 객관적 신빙성은 약하다. 10·26 이후에 털어놓은 이야기인만큼 더욱 그렇다. 김재규는 가까운 사람들에겐 가끔 '나는 안방에 누워서 죽기 싫다'는 말을 하곤 했다. 불교신도인 그는 '無'자를 붓글씨로 자주 쓰기도 했다. '어떻게 명예롭게 죽을 것인가'를 김이 많이 생각해온 것은 사실인 듯하다. 안동농림학교 시절부터 엿보이기 시작한 무사적 사생관과 연결시켜 볼 때 그의 마음속에 살의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던 것도 사실인 듯하다.
  
  그가 아무도 증명해줄 수 없는 예전의 자기 혼자만의 여러 차례의 거사 기도를 이렇듯 주장하는 것은 10·26이 충동적이고 우발적으로 저질러진 사건으로 판단되는 것을 막기 위한 노력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요컨대 그는 그간 인정에 끌려 실행을 지연하다가 10·26에 와서 결행한 것일 뿐, 10·26의 살의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신념과 역사관에 바탕을 둔 판단과 의지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임을 주장한 것이다.
  
  김재규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이 한결같이 평하는 그의 충동성, 우쭐해하기 좋아하는 영웅주의적 태도, 우직성 등이 그 살의의 성격에도 잘 나타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살까'보다 '어떻게 죽을까'를 더 깊게 생각하는 사람은 영웅심리의 소유자이게 마련이다. 그런 김을 정보부장으로 임명한 박대통령의 눈에는, 김이 충직하기 비할 데 없는 사람으로만 보였을 뿐, 그가 명예롭게 죽을 명분을 찾고 있는 사람이란 것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온건했던 정보부장
  
  건설부장관으로서 김의 큰 공적은 중동 건설붐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정무장관이던 신형식은 '김재규가 경제장관회의에서 다른 장관들의 반대론을 몇 시간이나 맞받으면서 해외건설업체에 대한 국내은행의 지불보증제도를 결연하게 밀고 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결국 대통령이 김재규의 안을 지지했고, 이것이 중동 건설붐의 촉진제가 됐다'고 말했다. 장관 재임중 아버지가 죽자 김재규는 지관(地官)을 데리고 다니며 명당을 구했다. 이 명당은 대통령이 나올 자리라는 평까지 받았다. 그러나 풍수지리에 밝은 어느 국장이 보니 대역적이 나올 자세였다. 그는 간접으로 그와 같은 얘기를 장관에게 전했으나 묘소를 바꾸게 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1976년 12월 박동선(朴東宣)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보부장이 된 이후 김재규의 행동에서 세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업무 처리에 있어서의 무능, 정책 건의에 있어서의 온건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를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김재규는 '정보부장에 임명되었으므로 물리적 방법이 아니라 평화적 방법으로 박대통령을 설득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재판 과정에서 진술한 바에 따르면 김재규는 박동선 사건을 면밀히 검토해본 결과, '이 사건은 미국이 한국의 독재를 견제하기 위해 만든 일이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1977년 2월 대통령에게 '체제를 바꾸는 게 좋겠읍니다'고 건의를 했다고 한다. 그해 6월엔 '직선제로 출마해도 당선됩니다'면서 유신체제의 완화를 건의했고, 1978년엔 긴급조치의 해제, 1979년 7, 8월에도 '긴급조치 9호는 칼이 너무 녹슬고 무디어졌읍니다'면서 긴급조치 10호로 대체할 것을 건의했다는 것이다. 10호는 '9호의 규제범위를 훨씬 줄인 것이었다'는 게 김의 설명이었다.
  
  박찬현 문교부장관에겐 또 제적학생들의 복교를 세 차례 요청했다고 한다. '훗날 우리가 무슨 소리를 듣겠는가. 학생들은 백 번 잘못해도 백 한 번은 용서해주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박장관은 '복교생들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다'고 거절하더라고 김은 진술했다. 기자는 이 부분에 대해 지금은 외국어대에서 일하는 박찬현 교수에게 확인을 해보았다. 박교수는 '그런 말을 듣긴 했으나 정보 책임자로서 나의 마음을 떠보는 것으로 생각했다. 꼭 복교시키려면 그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했다.
  
  김재규는 10·26 이후 이 '온건한 건의'를 되풀이 강조, 자신의 행동을 '민주혁명'으로 미화시키려 애썼다. 나라의 주요 정책에 큰 영향을 끼치는 정보부장이란 직위에 있는 인물은 얼마나 합리적인 건의를 했느냐는 점보다는 건의를 얼마나 받아들이도록 했느냐는 점에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 '받아들이도록 하는' 능력면에서 김재규는 여러 번 무능을 드러냈다. 이것은 그의 논리적 설득력의 부족뿐만 아니라 박대통령의 아집에서도 기인된 결과일 터이다.
  
  역사를 의식하기 시작한 김재규
  
  김부장을 접촉했던 사람들 중 그의 우직하고 예절바른 인간됨은 인정하면서도 능력면에선 혹평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박찬현 당시 문교부장관은 '대국을 보는 안목이 없는 사람이었다. 시국안에 기조가 없고 상황에 따라 수시로 태도를 바꾸곤 했다. 또 소심한 편이었다. 회의에서 발언을 한 뒤 '내 말이 지나치지 않았는가' '그 장관이 기분 나빠하지 않았을까'하고 묻곤 했는데, 대수롭지 않은 걸로 그러는 것이었다'고 했다.
  
  김의 참모로 일했던 김영광(金永光·전국민당 사무총장)은 이렇게 증언한다.
  '대통령께 하는 그의 1일 징후보고는 나열식이었다. 어제 어느 교회에서 반정부 집회가 있었고, 내일은 어디서 터질 것이라는 식으로 나열만 할 뿐 대책이 없는 것이었다. 통치자의 입장에선 그런 보고를 들으면 쓸쓸해진다. 그럴 때는 차지철처럼 '새끼들, 또 나오면 싹 뭉개버리겠읍니다'는 말이 오히려 위안을 주게 된다. 김재규가 보고를 한 다음에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는 사람은 꾸지람을 듣게 된다는 말이 나올 만큼 그의 보고는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김재규는 업무의 대소와 완급을 못 가리는 사람이었다. 직접 주교나 추기경을 만나러 가곤 했는데 그것은 하급자가 할 일이다. 그러나 하급자가 결재받기엔 김재규가 아마도 가장 상대하기 쉬운 부장이었을 것이다. 보고서를 읽는 데 힘이 든다고 해서 녹음테이프에 녹음을 시켜달라고 한 사람이다. 출퇴근 때 차 속에서 그것을 듣곤 했었다.'
  
  김치열 당시 법무장관은
  '차에 비해 김이 온건론 쪽이었다고 하지만 '론'으로 부르기에는 논리나 일관성이 없는 의견이었다. 한마디로 소신이나 중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정보부장으로서의 영향력도 전임자들보다 약했다. '욱!'하는 성격이 있어 무식한 머슴이 화가 나면 큰일을 저지르는 식으로 일을 벌일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김재규는 수양대군의 쿠데타에 거역, 친왕정 쿠데타를 모의하다가 사형당한 김녕김씨 김문기(金文起)의 18대손이다. 그는 이 김문기를 사육신으로 공인받게 하려고 직권을 이용했다. 협조를 거부한 부하는 좌천시켰다. 김문기의 사육신 여부는 젖혀두고라도 공인이 이런 역사의 해석 문제에 개입한 것은 옳지 못한 일이었다. 김재규의 김문기 숭배열은 평소에도 대단했고, 김녕김씨 문중에선 김문기가 진짜 사육신이라는 사실을 집안 사람들에게 가르쳐왔다. 이것은 김재규의 사생관 형성과정을 엿보게 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김은 또 스스로를 '지위욕은 없지만 명예욕은 있는 사람이다'고 평했고 '역사에 깨끗한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와 오랜 친교를 가졌던 김계원은 '김재규의 성격은 자존심과 의협심이 강하고 저돌적이며 추진력도 있지만 뒷마무리를 못하는 사람이다'고 평했다. 천황을 따라 자결한 노기 대장의 흠모자, 쿠데타 모의를 하다가 사형당한 조상의 숭배자, 역사를 줄곧 의식하는 사람…… 이런 인물은 명분이 그럴 듯하면 목숨도 내던질 수 있다.
  
  1979년에 잇달아 일어난 사건들은 박대통령의 김에 대한 신임을 약화시킨 만큼 김의 대통령에 대한 불만도 축적시켰다. 더구나 차지철은 가끔 대통령의 대행자 행세를 하면서 오만불손한 태도로 김을 대했다. 김의 기질은 차와 같은 방약무인의 인간형을 도저히 못 참는 유형이었다. 좌절감, 열등감, 정의감, 명예욕 등이 뒤범벅된 김은 자신을 꾹 누르고 있었다.
  
  1979년 여름 무렵 공화당 사무총장 신형식은 김재규가 무심코 보인 태도에서 대통령에 대한 불칙·불손의 기미를 두 번 느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섬뜩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는 박대통령 시해 사건에 접했을 때 '당했다'는 생각과 함께, 김의 불손을 퍼뜩 떠올렸다고 한다. 육사동기생 손모 장군도 같은 시기에 김부장과 만났는데 대통령에 대한 반감을 느꼈다고 했다. 권력의 핵심에 잠복한 시한폭탄, 그것이 김재규였다.
  
  카터를 면전에서 공박한 박정희
  
  1979년 6월 29일 저녁 9시 30분, 박정희 대통령을 그토록 괴롭혀 온 미국 대통령 카터는 2박 3일의 짧은 일정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 카터가 드러내보였던 태도는, 동등한 국가관계에 있어서의 점잖은 손님이 아니라 노골적이고 거침이 없는 간섭자로서의 자세였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강대국의 통치권자이기 때문에 그렇다기보다는 상대를 경멸하기 때문에 취하는 그런 태도인 것 같았다.
  
  카터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방문 상대국인 한국이란 나라를 조금도 어렵게 여기거나 존경치 않았던 태도는 도착 그 순간부터 드러났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카터는 그 특유의 함박웃음은 커녕 미소도 짓지 않은 채 굳은 표정으로 특별기 트랩을 내려왔다. 공식 방문(state visit)임에도 불구하고 도착 성명조차 없었고 마중 나간 박대통령과는 악수 하나로 끝마친 다음 곧바로 헬리콥터를 타고서는 동두천에 있는 미군 캠프로 날아가 그곳에서 첫날 밤을 보냈다.
  
  이튿날 미군병사들과 함께 조깅까지 하면서도 예정된 한국군 기지 시찰은 날씨가 나쁘다는 이유로 예고도 없이 취소하는 바람에 기지에 가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한국 국방부장관은 바람을 맞았다. 그러면서도 카터는 야당이나 반체제 인사들은 기를 쓰고 만나고 다녔다. 카터는 박대통령이 초청하는 만찬석상의 연설에서조차도 인권문제를 소리 높이 거론했는가 하면 청와대 정상회담에서는 구속중인 정치범 리스트를 들이밀고서는 그들의 석방을 요구했었다.
  
  8월 7일자 『뉴욕 타임즈』는 방한중 카터가 박대통령에게 크리스찬이 되라고 권유한 사실이 있음을 밝히면서, 이같은 일은 '외교에 있어서의 정교분리 원칙을 깨뜨린 것이며 미국이 한국의 종교적 신앙들을 도덕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7월 2일자 일본의 『산케이 신문』은 '카터 미국대통령의 한국 방문은, 말하자면 대통령, 즉 미국의 페이스로 모든 일이 짜여진 채 전개되었다'면서 '카터는 한국측이 기대하고 있던 것과 같은 동양적인 예의에 입각한 우호적 방문과는 전혀 딴판으로 강경한 자세로 일관한 다음 귀국했다'고 보도했다.
  
  당시의 매스콤에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으나 훗날 알려진 바로는 6월 30일 청와대에서 열렸던 박·카터 회담은 동맹국 정상회담의 분위기와는 걸맞지 않을 정도로 몹시 냉랭한 분위기였다 한다. 정상회담의 분위기에 관해, 당시 동석했던 국무장관 사이러스 밴스는 1983년에 발간한 그의 회고록 『힘겨운 선택』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카터 대통령은 서울을 방문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철군문제를 직접 거론할 것을 우려, 매우 난처한 입장이었다. 카터 대통령은 자신이 박대통령의 견해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서 수행 각료들에게 박대통령이 철군문제를 직접 제기하는 일이 없도록 사전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우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제1차 양국 정상회담 자리에서 철군정책이 한국과 동북아시아 지역에 초래할 위험에 관해 45분 동안 장황하게 설명했다. 박대통령의 철군정책 공격으로 회담 분위기가 냉각돼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카터 대통령과 브라운 국방장관 사이에 앉은 나는 카터 대통령이 분을 참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이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오직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회의가 끝난 후, 곧 카터 대통령은 그가 무엇을 생각했고 무엇을 들었던가를 분명하게 말했다. (그는 단지 박대통령과 다른 문제, 즉 주로 인권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단독으로 만나자고 요청했을뿐, 박대통령의 주장에 관해서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신동아』, 1987년 4월호에 실린 李洋雨의 『70년대 한국의 민주화와 미국의 압력』)
  
  당시 청와대의 고위 보좌관으로 있었던 모씨에 따르면, 1차 정상회담장에서 인사가 끝나고 대좌하자마자 박대통령은 손님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한동안 하고 싶은 말을 쏟아놓았다는 것이다. 그 요지는 나라의 운영에 대한 소신이었다. 나라마다 국정 운영의 기본방침이 다르다. 미국은 미국 나름의 원칙이 있고, 한국은 한국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다. 미국에서 쉬운 일이 한국에서 어려울 수 있고, 한국에서 쉬운 일이 미국에서 어려울 수 있다. 따라서 상호간의 내정 간섭을 삼가해야 한다……. 외교관례에 비추어서도 매우 이례적이라고 할 이 모두발언은 카터를 당황하게 했다고 한다.
  
  金溶植 대사의 증언
  
  당시 주미 한국 대사였던 김용식(金溶植)은 자신의 회고록 『희망과 도전』(1986, 동아일보사)에서 정상회담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청와대에 도착하자 양측은 회담참석자들을 서로 소개하고 선물을 교환했다. 한국이 미측에 건넨 선물 중에는 카터 대통령의 초상화가 포함되어 있었다. 양측은 회담을 위해 소접견실에 자리를 잡았다.
  
  회의 탁자를 중심으로 밴스 국무장관, 브라운 국방장관, 브레진스키 보조관, 홀브루크 차관보, 글라이스틴 미 대사 등 미측은 남쪽을 향해 앉았고, 한국측은 북쪽을 향해 자리를 잡았다. 통역은 최광수(현외무부장관)씨가 맡았다. 박대통령이 먼저 준비한 메모를 보면서 발언을 시작했다. 박대통령은 서두에 카터 대통령의 방한을 환영한다고 말한 후 곧장 주한 미지상군의 철수문제를 꺼냈다. 박대통령은 주한미군이 얼마나 미국의 안전과 이 지역의 평화에 기여하고 있는가를 설명했다. 박대통령은 45분에 걸쳐 철군정책의 부당성을 길게 지적했다.
  
  카터 대통령의 기색은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그는 펜을 들고 메모지에 무엇인가 쓰는 자세를 취했는데 박대통령의 예기를 경청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당시 철군정책은 보류되었을 뿐 철회된 것은 아니었다. 카터 대통령은 미국 국내에서도 논란이 많은 주한미군 철수문제에 대해 또 박대통령으로부터 얘기를 듣고 싶지 않은 심경이었을 것이다.
  
  박대통령은 자신의 얘기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터 대통령의 표정이나 반응을 모르고 있었다. 박대통령의 철군반대 발언에 대해 카터 대통령은 한마디의 코멘트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철군과 관계없는 몇 가지 사항에 대해 의견이 교환되었을 뿐이고 그것으로 회담은 끝났다. 다음 일정은 단독회담이었다.
  
  두 사람은 박대통령의 집무실에서 통역을 가운데 두고 대좌했다. 양측 관계자들은 단독회담이 끝날 때까지 별실에서 기다렸다. 단독 회담을 마치고 나온 박정희 대통령의 표정은 밝지가 않았다. 나는 미국무성이 약속한 대로 철군중지의 언약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박대통령은 그런 약속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박대통령은 카터 대통령이 한국의 국방비가 GNP의 5.5퍼센트밖에 안됨을 지적하고 그 증액을 요구하더라고 말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국방비 증액도 증액이지만 회담 분위기가 원만치 못했음을 알게 되었다.
  
  다음날 오전 10시에는 우리측 관계관 회의가 있었다. 나는 박대통령에게 단독보고시간을 달라고 해서 전날 밴스 장관과의 의논내용을 보다 상세히 보고했다. '각하, 이따가 밴스가 와서 긴급조치 9호에 관한 얘기를 꺼내면 '그 문제는 국내치안에 관한 문제이니 나에게 맡겨달라'고 말씀하시면 되겠읍니다.' 박대통령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예정대로 밴스와 글라이스틴은 11시에 청와대에 들어왔다. 박대통령은 그들에게 한국이 국방비를 6퍼센트로 계산할 것을 약속하고 긴급조치 9호는 치안에 관한 문제인만큼 자기에게 맡겨달라고 말했다. 밴스는 박대통령과의 면담이 끝난 뒤 이 두 가지 문제에 관해 카터 대통령에게 낙관적인 보고를 했다.
  
  이날 오후 회담에서 카터 대통령은 박대통령에게 한국측 입장을 밴스 장관을 통해 들었다고 말했다. 카터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주한 미지상군문제는 워싱턴에 돌아가는 대로 의회 지도자와의 협의를 거쳐 한국측이 염려하지 않도록 조치하겠다고 언약했다. 마침내 철군중지에 관한 카터 대통령의 구두 약속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마지막 회담을 끝낸 뒤 카터 대통령은 이한 준비에 들어갔다. 양국 정상은 김포공항까지 동승하게 되었다. 차중에서 카터 대통령은 박대통령에게 종교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카터 : 각하의 종교는 무엇입니까?
  
  ·박 : 집사람은 독실한 불교신자였읍니다. 아이들 중에는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다니는 아이도 있읍니다. 나는 특별히 종교가 없읍니다. (카터 대통령은 박대통령에게 기독교에 귀의할 것을 권유하고 싶은 눈치를 보였다.)
  
  ·박 : ……
  카터 대통령은 박대통령에게 포교를 한 셈이었다. 신심이 두터운 카터 대통령은 체한중 한국 국내 종교인들을 만났고 여의도 침례교회에서 예배까지 보았다.
  
  이날 저녁 박대통령은 관계관들을 청와대에 불러 비공식 만찬을 베풀었다. 박대통령은 정상회담 결과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박대통령은 차중에서 카터 대통령이 종교문제를 얘기했던 것을 떠올렸다. 박대통령은 '그 친구……참……'이라고 중얼거리며 다소 의외였다는 표정을 지었다.
출처 : 책
[ 2003-07-15, 17:4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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