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초대 내각에 친일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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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만세(토론방)
  
  
  제목 : [펌]대한민국독립운동-건국세력역사 vs 민족문제연구소의 주장/대한민국 초대 내각의 인적 구성, 그리고, 친일파 청산법을 주장하는 김희선이 이사로 있는 민족문제 연구소의 주장 비교..!!
  
  
  
  
  제헌 국회 의장 : 이승만,
  제헌 국회 부의장 : 신익희, 김동원
  
  대통령 : 이승만, 부통령 : 이시영,
  국무총리/국방부 장관 : 이범석,
  재무 : 김도연, 법무 : 이인,
  농림 : 조봉암, 교통 : 민회석
  내무 : 윤치영, 사회 : 전진한,
  문교 : 안호상, 상공 : 임영신,
  외무 : 장택상, 체신 : 윤석구,
  보건 : 구영숙, 무임소 : 이윤영, 지청천,
  공보처장 : 김동성, 법제처장 : 유진오
  
  [Naver 백과사전 검색 결과]
  
  가)제헌국회 의장/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 이승만 [李承晩, 1875.3.26~1965.7.19]
  한국의 정치가·독립운동가.
  본관 전주
  호 우남
  별칭 초명 승룡
  활동분야 독립운동, 정치
  출생지 황해 평산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49)
  주요저서 《독립정신》《일본내막기》
  본관 전주(全州). 호 우남(雩南). 초명 승룡(承龍).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출생하였다. 가난한 선비의 외아들로 태어나 3세 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주, 한문을 배우다가 1894년 배재학당(倍材學堂)에 입학, 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고 그 대가로 가계를 도우며 이듬해 졸업하였다.
  일본인의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에 대한 복수사건에 연루되었으나 미국인 여의사의 도움으로 관헌의 눈을 피하는 데 성공하여 위기를 모면, 이 무렵 개화사상에 심취,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서재필(徐載弼)의 지도하에 설립된 협성회(協成會)·독립협회(獨立協會) 등의 간부로 활약하였는데, 특히 협성회 기관지 《협성회보(協成會報)》의 주필이 되어 날카로운 필봉으로 정부 공격에 앞장섰다.
  1898년 정부전복을 획책하였다는 혐의로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투옥되었는데, 동지 한 사람과 탈옥을 꾀하다가 붙들려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 1904년 민영환(閔泳煥)의 주선으로 7년 만에 석방되었다. 그 해 겨울 미국에 건너가 미국정부에 일본의 한국침략저지를 호소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계속 머물면서 조지워싱턴대학교·하버드대학교 등에서 수학,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해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자 귀국,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지만, 미국인 선교사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1912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다.
  1914년 박용만(朴容萬)의 초청으로 하와이로 가 잡지 《한국태평양》을 창간, 한국이 독립하려면 서구(西歐) 열강 특히 미국정부와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외교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펴며 교포사회에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주도권 싸움으로 국민회(國民會)를 분열시키고 따로 좌파세력을 규합, 동지회(同志會)를 결성함으로써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던 박용만 등과 대립하였다.
  1917년 안창호(安昌浩) 등과 협의하여 뉴욕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회에 대표를 파견하고, 1919년 3·1운동 후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漢城)임시정부와 상하이[上海]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각각 최고책임자인 집정관 총재(執政官總裁)와 국무총리(國務總理)로 추대되자 미국 워싱턴에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설치하고 위원장이 되어 스스로 대통령으로 행세, 점차 카리스마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임시정부 내부의 무단파(武斷派)로부터 불신을 받아 1921년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불신임 결의가 있었다.
  그 후 워싱턴군비축소회의를 비롯하여 미국정부 및 국제연맹 등과의 외교교섭을 통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나 기대한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그 무렵 하와이와 워싱턴 등지의 재미교포사회에서는 그를 따르는 우남파(雩南派)와 안창호를 지지하는 도산파(島山派)의 대립양상이 노골화되어 해외에서의 독립운동노선에 분열이 나타났다.
  1934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와 결혼한 후 1945년 광복이 되자 그 해 10월 귀국, 우익 민주진영의 최고지도자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 총재, 민주의원 의장 등을 지내며 좌익세력과 투쟁, 1946년 6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발표, 그 해 한국의 독립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미국에 건너가 미국정부의 대한(對韓)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무투표 당선, 이어 국회의장에 피선되어,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제정·공포하고,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 그 해 8월 15일 취임하였다.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하였으며, 철저한 배일(排日)정책으로 일본에 대하여 강경자세를 견지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과 유엔의 도움으로 공산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당세력이 우세한 국회에서 자신의 대통령재선이 어렵게 되자, 자유당(自由黨)을 창당하고 계엄령을 선포, 반대파 국회의원을 감금하는 등 변칙적 방법을 동원하여 헌법을 대통령 직선제(直選制)로 개정하고 대통령에 재당선되었다.
  1953년 미국의 전쟁처리방법에 반대, 계속 휴전을 반대하다가 휴전성립 직전에 반공(反共)포로의 석방을 단행,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한 1954년 자신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종신대통령제 개헌안을 발의, 국회에서 1표 부족으로 부결되었는데, 사사오입(四捨五入)의 해석논리를 변칙적으로 적용하여 번복, 통과시킴으로써 1956년 대통령에 3선되었다. 1958년 12월 차기 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국가보안법 등 관계법령을 개정하고 경제시책의 빈곤으로 인한 특정재벌에 대한 특혜 등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1960년 3월 15일 여당과 정부가 전국적·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감행하여 대통령에 4선되었으나 4·19 혁명으로 사임, 하와이에 망명해 있는 동안 사망하였다. 장례는 고국에서 가족장으로 조촐히 집행되었으며,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에 《독립정신》《일본내막기》(영문) 등이 있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나) 제헌국회 부의장 : 신익희 [申翼熙, 1892.6.9~1956.5.5]
  한국의 정치가·독립운동가.
  본관 평산
  호 해공
  별칭 자 여구
  활동분야 독립운동, 정치
  출생지 경기 광주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여구(汝耉)이며 호는 해공(海公)이다. 경기 광주(廣州)에서 출생했다.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의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政經學部)에 들어가 한국 유학생들과 학우회(學友會)를 조직하고 총무 ·평의회장 ·회장 등을 역임,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을 발간하여 학생운동을 하였다. 1913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 고향에 동명강습소(東明講習所)를 열었으며,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 교수가 되었다.
  1918년 최린(崔麟)·송진우(宋鎭禹) 등과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 1919년 3·1 운동 당시에는 해외와의 연락 임무를 맡았다. 그 해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수립과 동시에 내무차장·외무차장·국무원 비서장(國務院秘書長)·외무총장 대리·문교부장 등을 역임, 내무부장으로 있으면서 광복과 더불어 귀국, 김구(金九) 등 임시정부 계통과는 노선을 달리하여 정치공작대(政治工作隊)·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이승만(李承晩)과 접근하고,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부위원장, 자유신문사(自由新聞社) 사장, 국민대학(國民大學) 초대학장 등을 겸하다가 그 해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 대의원에 피선, 1947년 의장이 되었다.
  지청천(池靑天)의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과 합작해 대한국민당(大韓國民黨)을 결성하고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부의장이 되었다가 의장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 의장에 피선, 정부수립 후 이승만과 멀어지기 시작한 한민당(韓民黨)의 김성수(金性洙)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9년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 다시 국회의장에 피선되고 1955년 민주국민당을 민주당(民主黨)으로 확대·발전시켜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5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 자유당의 이승만과 맞서 호남지방으로 유세가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사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다) 제헌국회 부의장 : 김동원 [金東元, ?~?]
  한말의 정치가.
  본관 전주
  활동분야 정치가
  출생지 평양
  평양의 대부호 대윤(大潤)의 맏아들로 소설가 동인(東仁)의 형이다. 일제강점기에 평안도 지방을 대표하는 민족주의계 인사로 일제 말기의 친일 행적에도 불구하고, 8·15광복 후 제헌국회 부의장을 지냈다. 1906년 일본에 유학하였으나 중도에 포기한 뒤, 숭실 대성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으며 신민회(新民會)에서 활동하였다.
  1911년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은 뒤 경제계에 진출하여 목재·면직물 등의 판매업에 종사하였으며, 1924년 평안고무공업사를 설립함으로써 산업자본가로 전환하였다. 한편 숭인상업학교, 숭실전문학교 등 기독교계 학교의 운영에도 참여하여 상공업을 통해 벌어들인 재산을 교육계에 투자하였으며, 예수교장로회총회 부회계 및 평양 YMCA 회장 등을 지내며 기독교계의 중진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조만식(曺晩植)과 함께 평안도의 민족주의 세력을 대표하면서도 신간회(新幹會) 등의 정치분야에는 전혀 관계하지 않은 것은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의 운동론에 투철했던 탓이었다. 이 단체의 핵심사상은 비정치적 분야에서 무실역행(務實力行) 정신으로 건전한 인격을 함양하는 것이 한민족 재생의 근본 방략이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단체에서 사법부에 해당하는 일을 담당하였는데, 이광수와 함께 조직을 총괄하는 최고의 실력자였다.
  1935년 평안농사주식회사(平安農事株式會社)를 설립하고, 이듬해에 평안고무공업사를 주식회사로 확대 개편하여 만주 진출을 기도하였다. 또한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을 경찰의 후원으로 저지한 뒤, 평양상공회의소 특별 평의원과 부회장을 지내며 총독부측과의 유대관계에 힘썼다. 1937년에 발생한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1940년 황도학회(皇道學會),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하였다.
  광복 직후 서울에 올라와 한국민주당에 참여, 창당시 총무를 담당하였으며, 1947년 조직개편 때는 기획부장에 선출되었다. 1948년 서울 용산구에서 제헌의회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국회의원 직선으로 거행된 국회부의장 선거에서 이청천·장면 등을 따돌리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1950년 2대 총선에서는 통일과 경제문제에서 진보적인 성격을 보인 중도세력에게 참패하여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6·25전쟁 중 납북되었다.
  
  라)대한민국 정부 초대 내각
  
  1)부통령 : 이시영 [李始榮, 1869.12.3~1953.4.19]
  한말의 독립운동가·정치가.
  본관 경주
  호 성재 ·시림산인
  본명 성흡
  활동분야 독립운동, 정치
  출생지 서울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본관 경주(慶州). 호 성재(省齋)·시림산인(始林山人). 본명 성흡(聖翕). 1869년 12월 3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885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 1886년 가주서(假注書), 1887년 형조좌랑(刑曹佐郞)을 거쳐, 1888년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로서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189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승지(副承旨)에 이어 우승지(右承旨)에 올라 내의원(內醫院)·상의원(尙衣院)의 부제조(副提調)를 겸하고, 다시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궁내부(宮內部) 수석참의(首席參議)를 역임하였으나, 1896년 장인인 김홍집(金弘集)이 살해되자 사직하였다. 1905년 외부교섭국장(外部交涉局長)에 재등용되고, 1906년 평남 관찰사로 나갔다가 1908년 한성(漢城)재판소장 ·법부 민사국장(民事局長)·고등법원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자 만주로 망명, 류허현[柳河縣]에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 독립군양성에 힘쓰다가 1919년 4월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총장 ·재무총장을 역임, 1929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가, 초대 감찰위원장에 피선되고, 1933년 임시정부 직제개정 때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5년 8·15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였다.
  그 후 대한독립촉성회(大韓獨立促成會) 위원장으로 활약하다가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하고 1951년 부통령을 사임,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53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노환으로 죽었다. 국민장으로 정릉(貞陵) 남쪽에 안장되었다가 1964년 수유리로 이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국무총리/국방부장관 : 이범석 [李範奭, 1900.10.20~1972.5.11]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운동가·정치가.
  활동분야 독립운동, 정치
  출생지 서울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통령장(1969)
  주요저서 《우등불》
  1900년 10월 20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중국으로 망명, 1919년 윈난[雲南]에 있는 중국육군강무학교(中國陸軍講武學校) 기병과(騎兵科)를 졸업하고 둥베이[東北:만주]로 진출하였다. 1920년 청산리(靑山里)전투에서 중대장으로 참가,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922년 소련합동민족군 연해주지구 지휘관으로 소련 혁명전(革命戰)에 참가하였고, 1933년 중국 뤄양[洛陽]군관학교 한인장교대장, 1936년 중국 제3로군 사령관, 1940년 중국 중앙훈련단 중대장을 지냈다. 1941년 한국 광복군 참모장에 취임하고, 1945년 광복군 중장으로 8월 귀국하였다. 1946년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을 창설하였으며, 1948년 정부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에 기용되고 국방장관을 겸임하였다.
  1950년 주중(駐中)대사, 1952년 자유당 부(副)당수 및 내무장관 등을 지냈으며, 그 해 8월과 1956년 2차례 부통령(副統領)에 입후보하였으나 모두 낙선하였다. 1960년 충청남도에서 자유연맹(自由聯盟) 소속 참의원(參議員)에 당선되었고, 1963년 ‘국민의 당’ 최고위원에 추대되었다. 저서로 회고록 《우등불》이 있다. 196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3) 재무장관 : 김도연 [金度演, 1894~1967]
  대한민국 초대 재무부장관. 정치가.
  호 상산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경기 김포
  주요저서 《나의 인생백서》(자서전) 《한국농촌경제》
  호 상산(常山). 경기 김포(金浦) 출생. 1913년 일본 긴조[錦城]중학 졸업, 1919년 게이오[慶應]대학 이재학부(理財學部)를 수료하였다. 1927년 미국 컬럼비아대학 경제학석사, 1931년 아메리칸대학 경제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1932년 연희전문 강사로 있다가 1934년 조선흥업주식회사 사장이 되었으나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관련되어 함흥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총무로 정계에 투신, 1946년 2월 미군정하에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에 위촉되고, 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당선되었다(민선).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 때는 한국민주당으로 출마하여 당선, 국회 개원과 함께 재정경제분과위원장에 선출되었다가 8월 초대 재무부장관에 취임하였고, 한편 한 ·미경제협정교섭 한국측 대표로 활약하였다. 2대 민의원선거에서는 낙선하였고, 1954년 민주국민당 최고의원으로 취임, 3대 민의원 의원 당선 후 1955년에는 민주당 고문이 되었다. 4대 민의원선거에는 민주당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59년 11월 민주당 중앙위원회 부의장이 되었다. 1960년 5대 민의원에 당선된 후 민의원 부의장에 선출되었고, 그 해 8월 제1차 국무총리에 지명되었으나 민의원의 동의를 얻는 데 실패하였다.
  민주당 구파동지회를 결성, 그 해 11월 신민당 위원장이 되었으나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의원자격을 상실하였다. 1963년 11월 6대 국회의원선거 때는 민중당 전국구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1965년 8월 한·일협정 국회비준을 반대하여 의원직을 사퇴하고, 그 해 신한당 정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저서로 《나의 인생백서》(자서전) 《한국농촌경제》(박사학위 논문) 등이 있다.
  
  4) 법무장관 : 이인 [李仁, 1896.9.20~1979.4.5]
  한국의 변호사 ·정치가.
  호 애산(愛山)
  활동분야 정치, 법률
  출생지 대구(大邱)
  주요수상 건국훈장 독립장(1963), 무궁화 국민훈장(1969)
  주요저서 《법률과 경제》,《애산여적(愛山餘滴)》,《반세기의 증언》
  호 애산(愛山). 대구(大邱) 출생. 1917년 일본 세이소쿠[正則]중학을 나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한 후, 대학원 과정인 니혼대학[日本大學] 고등전공과(高等專攻科)에서 수학하였다. 1923년 변호사시험에 합격, 변호사를 개업하고 많은 애국인사들을 법정에서 변호하였으며, 1927년 조선변호사협회장에 선임되었다. 1932년 조선발명학회장에 추대되고 조선과학협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사건으로 4년간 복역 후 1945년 8 ·15광복과 더불어 대법관이 되어 대법원장 직무대리를 역임하고 1946년 검찰총장이 되었다. 1948년 정부수립 때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되어 많은 일을 하였으나 대통령 이승만과 불목(不睦), 퇴임하고 그 해 제헌국회의원(制憲國會議員)에 당선되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1960년 참의원(參議員)에 당선되었다. 1962년 유엔인권옹호한국연맹 이사에 선임되어 활동하고, 1972년 민족통일촉진회장 ·통일원 고문 등을 역임하였으며, 5·16군사정변 후에는 야당 원로로서 야당통합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 유언을 통하여 집을 포함한 전재산을 한글학회에 기증, 오늘의 한글회관을 건립하는 데 밑거름이 되게 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1969년 무궁화 국민훈장이 수여되었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저서에 《법률과 경제》 《애산여적(愛山餘滴)》 《반세기의 증언》 등이 있다.
  
  5) 농림장관 : 조봉암 [曺奉岩, 1898~1959]
  독립운동가 ·정치가.
  본관 창녕(昌寧)
  호 죽산(竹山)
  활동분야 독립운동, 정치
  출생지 인천 강화(江華)
  본관 창녕(昌寧). 호 죽산(竹山). 인천 강화(江華)출생. 강화에서 보통학교와 농업학교를 졸업, 군청에서 일하다가 상경하여 YMCA 중학부에서 1년간 수학한 후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1년 동안 복역하였다. 일본 주오[中央]대학에서 1년간 정치학을 공부하고 비밀결사 흑도회(黑濤會)에 참여하여 사회주의사상에 입각한 독립쟁취를 목표로 항일운동을 하다가 귀국하였다.
  1925년 조선공산당 조직에 참여하고,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그 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중국 상하이[上海]를 거쳐 소련의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서 2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그 후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勞農總聯盟朝鮮總同盟)을 조직하여 문화부책(文化部責)으로 활약하다가 상하이에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 조선대표에 임명되고, ML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운동을 하다가 다시 검거되었으나 8 ·15광복으로 출감, 인천에서 치안유지회·건국준비위원회·노동조합·실업자대책위원회 등을 조직하고, 조선공산당 중앙간부 겸 인천지구 민전의장(民戰議長)에 취임하였다. 1946년 박헌영(朴憲永)에게 충고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공산당을 탈당하여 우익진영으로 급선회하였다.
  1948년 제헌의원·초대 농림부장관이 되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어 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에 출마하여 차점으로 낙선, 1956년 다시 제3대 대통령에 출마하였으나 낙선되었다. 그 해 진보당(進步黨)을 창당, 위원장이 되어 정당활동을 하다가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6)교통 장관 : 민회석 - 검색내용 없음.
  
  7)내무장관 : 윤치영 [尹致暎, 1898.2.10~1996.2.9]
  독립운동가 ·정치가.
  호 동산
  활동분야 독립운동, 정치
  출생지 서울
  호 동산(東山). 1922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대학 ·조지 워싱턴대학을 거쳐 1934년 아메리칸대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하다 9개월간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고, 광복이 되자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승만(李承晩) 박사의 비서실장을 필두로 제헌의원과 제2 ·3 ·6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초대 내무장관 ·대한국민당 당수 ·민주공화당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3년과 1968년 2차례에 걸쳐 민주공화당 의장을 역임하면서 그는 격동기 한국정치의 한가운데에 서왔으며, 특히 1963년에는 박정희(朴正熙) 최고희의 의장을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지명, 민정(民政)에 참여토록 하였다. 이후 공화당 총재 상임고문 ·국토통일원 고문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 ·국회의원 동우회 회장 등을 지냈다.
  
  8)사회장관 : 전진한 [錢鎭漢, 1907~1972]
  정치가.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경북 문경
  주요저서 《건국이념》《협동조합운동의 신구상》
  경상북도 문경(聞慶)출생. 1928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경제과를 졸업하고, 1945년 독립촉성전국청년연맹 위원장이 되고, 1946년 민족통일총본부 노동부장이 되었다. 대한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그 해 새로 발족한 정부의 초대 사회부장관에 발탁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54년 다시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1955년 노동분과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1963년 민주정의당(민정당:民政黨) 최고위원에 추대되었으며, 그 해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5년 민정당 부총재, 민중당 지도위원, 1966년 민중당 운영위원에 취임하였다. 그 해 대통령선거 때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추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하였다. 저서로 《건국이념》 《협동조합운동의 신구상(新構想)》 《민족위기와 혁명세력》 《자유협동주의》 등이 있다.
  
  9)문교장관 : 안호상 - 검색내용 없음.
  
  10)상공장관 : 임영신 [任永信, 1899~1977]
  교육자.
  호 승당
  활동분야 교육, 정치
  출생지 충남 금산
  주요수상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미국 아이젠하워상, 청조근정훈장
  호 승당(承堂). 충청남도 금산(錦山) 출생. 1930년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동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31년 중앙보육(中央保育)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여성교육자로서 첫발을 내딛고, 1945년에는 대한여자국민당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다. 1946년에는 중앙(中央)여자대학을 설립, 학장에 취임하였고, 1948년 상공부장관에 발탁되었으며, 1949년 안동(安東) 보궐선거에서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재선되고, 유엔총회 한국대표가 되어 한국의 국제적 지위 향상에 공헌하였다.
  1953년 중앙대학교 총장에 취임하고, 1961년 대한여자청년단장이 되었으며, 1963년에는 한국부인회를 결성하여 회장에 취임하였다. 1965년 대한교육연합회장, 1971년 대한교원공제회 초대이사장을 지내고, 그 후 중앙대학교 명예총장, 중앙문화학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유해는 중앙대학교 교정에 묻혔다.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미국 아이젠하워상, 청조근정훈장 등을 받았다. 저서에 《My Forty Years Fight for Korea》가 있다.
  
  11)외무장관 : 장택상 [張澤相, 1893~1969]
  정치가.
  호 창랑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경북 칠곡
  호 창랑(滄浪). 경상북도 칠곡(漆谷) 출생. 영국 에든버러대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하여 청구회(靑丘會) 회장으로 있다가 8·15광복을 맞아 수도경찰청장·제l관구경찰청장에 취임하였다. 재임기간 중 좌익세력 축출에 큰 공을 세웠으며 혼란기의 치안유지에 진력하였다. 1948년 정부 수립과 동시에 초대 외무부장관에 취임하였고, 1950년 고향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 그해 민의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50∼1951년 제5·6차 국제연합총회 한국대표로 참석하고, 1952년 국무총리에 기용되었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1956년 원내국민주권옹호투쟁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1958년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반공투쟁위원장으로 반공투쟁에 앞장섰다. 1959년 재일교포북송을 저지하기 위하여 제네바에 파견되었고, 1960년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나, 5·16군사정변 후에는 재야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병사, 국민장으로 장례가 거행되었다.
  
  12) 체신장관 : 윤석구 - 검색내용 없음.
  
  13) 보건장관 : 구영숙 - 검색내용 없음.
  
  14) 무임소장관 : 이윤영 [李允榮, 1890.7.19~1975.10.15]
  교육자·목사.
  호 백사
  활동분야 종교·교육·행정
  출생지 평북 영변
  호 백사(白史). 평안북도 영변(寧邊) 출생. 1907년 평양 숭실사범학교를 졸업, 태천보통학교장을 거쳐 서울 감리교신학교에 입학, 신학을 전공한 후, 1917년 목사가 되었다. 3·1운동 때 독립선언 강연회를 갖고 시위를 하다가 체포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40년경까지 배천·진남포·개성·평양 등지에서 성직자로서 일하다가 광복 후 평양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조선민주당 부당수를 지내고 월남, 1948년 서울 종로에서 제헌국회의원(制憲國會議員)에 당선되었다. 초대 국무총리 서리와 무임소장관·사회부장관을 거쳐 5·16군사정변 후 군정연장 반대투쟁위원회 의장, 국민의 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15) 무임소장관 : 지청천 [池靑天, 1888.1.25~1957.1.15]
  독립운동가, 정치가.
  본관 충주(忠州)
  호 백산(白山)
  본명 대형(大亨)
  별칭 일명 이청천(李靑天)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서울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본관 충주(忠州). 호 백산(白山). 본명 대형(大亨). 일명 이청천(李靑天). 1888년 1월 5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08년 정부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校)를 졸업, 191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중위로 있다가 1919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교성대장(敎成隊長)이 되어 독립군 간부양성에 진력하였으며, 1920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조직되자 그 간부에 취임하였다.
  청산리(靑山里)전투 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보복을 피하여 신흥무관학교를 폐쇄, 병력을 이끌고 간도(間島) 안도현(安圖縣) 밀림으로 이동하였다. 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 등과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여단장으로 있다가 만주를 벗어나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자유시(自由市)에 집결하였다. 흑하(黑河)사변으로 러시아혁명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만주로 탈출하였다.
  1925년 양기탁(梁起鐸)·오동진(吳東振) 등과 정의부(正義府)를 조직, 군사위원장 겸 사령장이 되고, 그해 군민의회(軍民議會)가 설치되자 군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 군사위원장이 되었으며, 별도로 한국독립군을 만들어 총사령관이 되고, 1932년 동아혈성동맹(東亞血成同盟)의 간부로서 각지의 항일단체를 규합하는 데 힘썼다.
  1933년 치치하얼[齊齊哈爾]에 잠입하여 항일지하운동을 지휘, 한 ·중연합군(韓中聯合軍)의 총참모장이 되었으나, 중국공산당의 압력을 받아 무장해제당한 후 그 해 재만독립군(在滿獨立軍)을 산하이관[山海關]으로 이동시키고 뤄양[洛陽]군관학교에 한국인특별반을 설치하여 그 총책임자가 되었다.
  1940년 충칭[重慶]으로 옮긴 임시정부의 광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항일전을 수행하다가 1945년 광복 후 귀국,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을 창설하였다. 1947년 제헌국회의원, 정부수립 후 초대 무임소장관을 역임하고, 제2대 국회의원,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민족문제 연구소 창립 선언문]
  
  우리 겨레는 반만년 동안 외세의 끊임없는 침략에 맞서 자주를 지키는 자랑스런 역사를 창조해왔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이땅에 미친 제국주의의 총칼은 수천 년 지켜온 주권을 빼앗고 민족혼마저 말살하려 하였다. 온 강토는 제국주의자의 말발굽 아래 무참히 짓밟혔으나 우리 민족은 저들의 노예되기를 거부하고 죽음으로써 민족정신을 수호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과 세계 진보적 민중들의 도움으로 가혹한 압제의 사슬을 끊고 마침내 해방의 날을 맞았으나, 반민족범죄자들은 다시 외세와 결탁하여 그들의 기득권을 누림으로써 자주적 민족국가의 수립은 분단이라는 상처를 안고서 또다른 시련을 겪고 있다.
  
  굴절된 근현대사의 전개가 어찌 외세의 탓뿐이겠는가. 민족의 이름으로 단죄되어야 할 매국, 배족의 무리들이 참회하고 자숙하기는커녕 오히려 반민족적 반민중적 지배구조를 온존시킴에 따라 민족의 정신사는 황폐해지고 기회주의와 타락한 가치만이 현실을 지배하게 되었다. 따라서 친일이라는 문제는 단지 과거의 죽은 사실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살아있는 망령으로, 반드시 청산해야 할 역사적 과제로 제기되는 것이다. 임종국 선생께서 일관되게 이 가증스러운 반민족적 범죄와 싸워 그 내용과 자취를 밝히는 데 평생을 바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제 우리 연구소는 선생의 업적을 토대로 하여 민족사의 오점인 친일행위의 구조와 실체를 명백히 드러냄으로써 민족정통성의 회복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자 한다. 또한 우리는 온갖 반민족적 범죄를 발굴하여 왜곡된 가치구조를 바로세우고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연구에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연구소의 출범을 맞아 이 엄숙한 과업을 한가닥 흔들림 없이 힘차게 수행할 것을 다짐하면서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뜻 있는 분들의 뜨거운 관심과 애정어린 질책을 바랄 뿐이다.
  
  1991.2.27
  반 민 족 문 제 연 구 소
  
  
  
  
  
  220.117.19.81
  
  
   내용
  
  
  
  
  
[ 2004-11-03, 00:0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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