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희가 미국에서 돌아와 김포 공항에 내렸다. 깜찍한 단발머리에 초미니스커트를 입고 말이다. 방송에는 야단났다. 당시 미니스커트는 상상도 못할 때였다. 윤복희는 구류를 3일 받았다.
대학 생활은 고등학교 운동장만 보다가 캔버스란 이름의 넓은 잔디밭이 좋았고, 학생들은 가방보다 팔에 책을 끼고 다니는 모습도 근사해 보였다. 수강 신청을 하는 것, 학급 교실로 선생님께서 들어오셔서 수업을 하는 게 아니고 강의실을 옮겨 가며 강의 듣는 게 대학 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수업을 기다리다 교수님이 안 오시면 과 대표가 연락이 온다. 오늘 교수님 못 나오셔서 휴강을 한다고 하면 우리는 곧장 당구장으로 달려갔다. 저 사람은 도대체 밥만 먹고 당구만 쳤는지 당구 300정도 되는 사람의 당구 치는 모습은 우리가 보기에 당구神 같았다. 당시 당구 꽤나 잘 치는 사람은 인기가 많았다.
당시 나의 당구 실력은 70 정도 되었는데, 밥상에 밥그릇과 젓가락이 당구 큐대 같은 때도 있었고, 누워 있으면 천장이 빙글빙글 도는 당구공같이 보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쓰리 쿠션 이란 게임으로 내기를 많이 했다.
그때 하숙생이 한 명 더 들어왔다.
해병대 연예인으로 있는 ‘영등포의 밤’을 부른 가수 오기택이었다. ‘추풍령’을 부른 남상규는 열흘에 한 번 정도 왔다 갔다 했다. 방송국마다 엽서로 인기투표를 집계하여 등수를 매긴다. 우리 동네는 청파동 S 여대 옆이라 여학생 팬들이 오기택을 보려고 문전성시다. 그때마다 엽서를 받아 우편함에 넣어주곤 하여서 인기투표에 올리기도 했다. 당시 가수들은 매니저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나는 그와 방송국에 자주 같이 갔던 관계로 방송국을 자유로 드나들 수 있었다. 오기택의 ‘영등포의 밤’, ‘고향무정’은 묵직한 저음으로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몇 년 전 추자도에 낚시를 갔다 떨어져 고생하다 작년에 작고 하셨다. 생각하면 많이 보고 싶다.
윤복희가 미국에서 돌아와 김포 공항에 내렸다. 깜찍한 단발머리에 초미니스커트를 입고 말이다. 방송에는 야단났다. 당시 미니스커트는 상상도 못할 때였다. 윤복희는 구류를 3일 받았다.
구류를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유행이 가만히 있었겠나. 1960~70년대는 정부 주도의 경제 성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개인에 대한 각종 규제가 있었다. 그 시기에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번져 나간 히피 문화가 팝 음악과 함께 들어오면서, 장발과 미니스커트는 자유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이에 대해 정부는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대표적인 퇴폐 풍조로 규정하고 엄중하게 단속하였다. 경찰은 자를 들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들을 단속했는데, 단속 기준은 무릎 위 20㎝였다.당시 길거리에서 가끔 볼 수 있었던 풍경 중의 하나는 가위를 든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는 장발 청년의 모습이었다. 미니스커트와 마찬가지로 장발도 단속의 대상이 되었다. 무단 횡단한 사람들은 도로에 칸을 막아놓고 거기에 가두어 놓기도 했다.
경찰은 길거리에서 30Cm 자를 들고 지나가는 미니스커트의 여성을 불러 세우고 무릎에서부터의 길이를 쟀다. 미니스커트, 노랑머리, 찢어진 청바지, 멀쩡한 공중전화를 옆에 두고 비싼 핸드폰을 쓴다고 젊은이들을 못마땅하게 생각(生覺)하는 분들이 많았다. 우리는 그런 어르신들을 흉보곤 했지만, 지금은 따라 하고 있다.
1970년대에 명동은 음악다방이 유독 많았다.
일제 강점기에도 다방에서 유성기나 축음기로 음악을 간헐적으로 틀어주곤 했다. 일반 다방은 소위 마담이라 하여 손님이 들어오면 자리를 안내하거나 혼자인 손님에게 말동무를 해주 곤했다. 그때 손님이 “마담도 한잔 하시지” 하면 자기는 꼭 쌍화차를 시켰다.
값은 커피보다 배나 비쌌다. 여기에 ‘레지’가 등장하면서 차는 물론 보리차를 갖다주곤 했는데 음악적인 분위기보다는 만남과 대화의 장이었기에, 음악 팬을 위한 음악 감상실이 따로 등장했다.
그러다가 본격적인 음악다방의 시대를 연 것은 1960년대 후반에 음악 감상실이 라디오의 위력 앞에 서서히 자취를 감추면서, 기존의 다방 형태에다 음악을 앞세운 음악다방이 등장한다. 1965년경으로 처음에는 음악 감상실처럼 DJ 방송 멘트를 하다가 음악만 틀어주는 형식으로 바뀌었는데, 그 발단은 광화문 조선일보사 골목에 있는 초원다방이었고 명동에서는 심지다방이 원조다. 벽에는 LP 레코드판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고, MUSIC BOX 안에 디스크 자키란 사람이 헤드폰을 쓰고 다양한 사연과 신청곡을 담은 예쁜 엽서들의 사연을 읽어 주고 했다.
종로1가에는 “희다방”, 통기타 가수들의 노래를 들려주던 “향원”이 있었고, 동숭동 대학로에는 “슈만과 클랄라”, “학림다방”, “참스다방”, “대학다방”이 있었고, 서울역 지금의 남대문 경찰서 자리엔 유명한 ‘역마차 다방”도 있었다.
팝송, 가요, 칸소네, 샹송, 세미 클래식, 영화음악 등 고객의 다양한 요구를 들어주었다. 이곳을 드나드는 멋쟁이들은 바바리코트 차림에 영어로 된 타임지나 라이프지를 손에 든 인텔리들이었다.
우리도 여기를 드나들며 분위기를 즐겼다.
유행하던 노래는 대부분 팝송이다. 무슨 뜻인 줄은 확실히 몰라도 멜로디가 좋아 흥얼거리곤 했다. 외국 노래, 특히 미국 노래는 팝송, 한국 노래는 가요 이렇게 불렸었다.
케니 로즈스, 스피드웨건, 스티비원더, 신디로퍼, 라이오넬 리치, 엘비스 프레슬리, 아하, 마이클잭슨, 휘트니 휴스튼, 마돈나, 보니엠 등 기라성 같은 가수들이 쏟아져 나오고 주옥같은 노래들이 가슴을 퉁닥거려 자주 들락거렸다.
또 대학생 중심의 MBC 강변가요제(MBC 江邊歌謠祭)는 문화 방송의 주최로 매년 7월과 8월 사이에 청평유원지, 남이섬, 춘천시 등지에서 개최되어 홍삼 트리오 주현미 김상우 마음과 마음 이상은 이상우 등을 배출하였고, 유행하던 대중가요는 송창식 “고래사냥”, 최양숙 “가을편지”, 남진 “나에게 애인이 있다면”, 윤복희 “이거야 정말”, 영화로는 “바람과 라이온”, “바보들의 행진”, “불꽃”, “삼포로 가는 길”, “영자의 전성시대 ”등이 있었고, 외국 영화로는 제임스 본드의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 안소니 퀸 “마르세이유 탈출”, 아랑드롱 “불사리노”, 쥴리 앤드류스 “내일을 향해 쏘라” 등등 수 많은 대중 예술들이 쏟아져 나왔다.
경성 전차로도 불리며 70년이나 서민의 발이 되어 서울 거리를 땡땡거리며 달리던 서울 전차의 레일을 걷어 낸 시기도 이때였다. 당시 버스 요금은 10원, 택시 기본요금은 60원이었고, 80년대는 500원이 되었다. 전차는 몇 번 탔는데, 그때 요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구경할 수 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공무원이나 교사들은 숙직이 있었고, 이것을 핑계로 외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 부인들에게는 친구 어머니, 친구 삼촌이 돌아가셨다는 구실을 대고 친구와 밤새 술을 먹거나 했다. 어떨 땐 2번씩 우려먹다가 산통이나 부부 싸움을 하기도 했다.
어떤 친구는 음주를 상습적으로 하며 초상집 상주 완장을 차에 가지고 다녔는데, 단속에 적발됐을 때 친구 문병 다녀온다 하면 단속하는 경찰도 인심 좋게 통하던 때도 있었다.
아~ 다시못볼 그리운 추억이여.
1964년 봄, 대학 2학년.
청파동 교회에 다니며 친구를 만났다. 일요일에 뭐 하나며 자기를 따라 미8군 내 교회 찬양대에 가자고 한다. 일요일 아침 9시경이면 8군의 카키색 버스가 도착한다. 시내를 돌아왔기 때문에 먼저 탄 많은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 학생들 같았다.
좀 낯설긴 했지만, 찬양대원들은 노래로 금방 친해질 수가 있었다. 나의 파트는 베이스였다.보통 우리 연습은 오고 가는 버스 안에서 했다. 모두 생짜가 아니고 주로 찬송가라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가끔 다른 부대 공연도 가고, 특별 발표회를 공연할 때는 모여서 밤늦도록 연습했다.
공연을 마치고 8군 장교 식당에서 햄버거며 오렌지 등 시내에서 구경 못 한 맛있는 음식도 먹고 크리스마스 때는 많은 선물도 받고 휴일엔 여기저기도 다니고 판문점 방문도 했다.
그땐 일반인들은 판문점 가기가 어려웠다.
신원 조회란걸 마치고 상당 시간 교육도 받았다. 나는 8군 합창단에서 또래의 군인들과 어울려 이태원도 가고 휴일이면 등산도 많이 다녔다. 그때 관악산, 북한산 등 서울 이곳저곳을 다니며 서툰 영어를 한 게 영어에 취미를 갖고 외국인과 대화를 할 수 있는 토대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합창단 버스를 탈 땐 늦게 타서 그런지 꼭 옆자리엔 그 여학생이 먼저 앉아 있어 자주 같이 가게 되었다. 처음은 머쓱했지만 같이 연습하다 보니 자연스러워졌다. 그 여학생 집은 대구고 아버지는 의사, 어머니는 대학교수셨다. 지금은 삼촌이 있는 장충동에서 학교를 다닌 단다. 집안에 딸은 자기 혼자라고 했다. 그렇게 말을 많이 하거나 소리 내 웃지 않는 조용한 성격의 여학생이었고, 항상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학생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만나면 인사하고 연습만 했지 개인적으로 만나서 이야기하거나 따로 만나지는 않았다. 만난 지 1년 정도 되었을 때 우리 합창 단원들은 판문점 방문을 하게 되었다. 차 속에서 음료수를 두 개를 준비해 와 나에게 건낸다. 그렇게 오가며 우리는 서로를 알아 가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나에게 메모를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나에게는 부치지 못한 한 통의 편지가 있다.
대학생활이 시작됩니다
- 浩然의生覺(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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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30, 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