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생활을 마치고 와서

1971년에 자동차 서울 운전 면허를 땄다. 그곳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 중 특별한 두 커플을 지금까지 친구로 사귀고 있다. 만남을 만든 것은 제대하고 20년쯤 지나서였다. 장소는 부산 해운대에서 부부간 상견례 모임을 갖기로 하고, 그때 기억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애기들도 한둘씩 데리고 온 듯하다.

우리의 만남은 이랬다. 남자 친구 셋이는 군에서 만났지만, 부인들은 모두가 처음이다. 그런데 마산 사는 친구 부인이 우리 집사람을 보고 언니라고 했고, 안동 사는 친구 부인은 마산 친구 부인보고 서옥이라 했다. 마산 사는 친구 부인은 안동 사는 친구 부인보고 두희야 했습니다.

따져보니 우리 집사람은 고등학교를 마산에서 나왔으니 마산 친구 부인에겐 고등학교 한 해 선배이고, 마산 친구 부인하고 안동 친구 부인은 대학 동창이었다. 좀 복잡한 관계 같지만 아주 희한하게 얽힌 재미있는 만남이다.

여기저기 알라들 들쳐업고 참 많이도 다녔다. 그런 인연으로 지금까지도 아주 절친하게 지내고 있다. 마산 친구(若水)는 나에게 아호(雅號)를 선물해 주었다. 내가 생각해도 나와는 그럴듯하게 잘 어울리 것 같다. 호연(浩然). 클 호에 그러할 연입니다.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4학년 2학기 복학합니다. 군 제대 후 1971년에 자동차 서울 운전 면허를 땄다. 11-71-001364-**그리고 윌리스 지프를 중고로 하나 샀다. 검정색 지프인데 아주 날렸다.

그 차는 통금도 관계 없이 그냥 무사 패스다. 그런 차는 개인보다는 기관에서 많이 탔다. 차도 얼마 없던 때라 삼일 고가도로에서 맘대로 U턴도 하고, 사거리 교통순경 있을 땐 라이트만 한 번 깜빡하면 우리 차 보고 경례를 한다.

그 당시 교통순경과는 상부상조(?)했다. 한 마디로 와이로가 통하던 시대였다. 속도위반이라고 차를 세운다. 스피드 건을 쏘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확하지도 않은 것 같다. 차를 세우면 걸어 온다. 일단 경례를 한다. “속도 위반하셨습니다.” 지갑에서 오천 원 빼서 건넨다. 순경은 잠시 앞뒤를 바라보다 슬며시 운전석으로 손이 들어온다.

갈 때는 웃으면서 경례까지 받는다. 잔돈이 없을 땐 만 원짜리 주고 5천 원 주고 거스름돈을 받는다. 그 시절이 그립다.

당시 자동차 창문은 손으로 페달을 돌려서 올렸다 내렸다 하고 스페어 타이어는 필수로 가지고 다녔다. 지금은 노 튜브지만 당시 비포장도로가 많아 빵구도 많이 났다. 룸미러는 있었지만 빽미러는 지금 같이 운전석 옆에 있어서 전동으로 조정하는 게 아니라 자동차 보닛 앞에 붙어 있어 어린애들이 부수고 방향을 바꿔 놓으면 그것 조종하는데 애도 많이 먹었다. 지금 전조등은 LED라 수명도 오래 가지만 당시에는 흐릿한 전구라 예비로 몇 개씩 가지고 다녔다.

엔진을 식히는 팬 벨트도 3개씩 가지고 다니고 주유소가 귀해 군용 20L짜리 스페어 깡통을 싣고 다니고 배터리도 성능이 좋지 않아 시동 걸 때 라지에타 앞구멍에 쇠로 된 막대기를 넣고 스타징이라고 돌려서 시동을 걸고 했다.

여기서 우리나라 자동차 역사를 한번 더듬어 보자. 1955년 6.25 전쟁 후 미군이 두고 간 윌리스 MB를 주워다가 만든 시발택시, 1962년 일본 닛산 자동차와 제휴하여 새나라 자동차를 시작으로 신진 자동차의 2기통 공랭식 퍼브리카 코로나, 크라운 아시아 자동차의 피아트 124, 기아 산업의 기아 부리사, 새한 자동차의 새한 제미니, 현대 자동차의 코티나 소나타 그라나다 등등에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것이 고속도로 건설과 포철 현대 중공업 등이 자동차 산업을 일으켜 세운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많은 기업가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지만 누가 뭐래도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 정신과 탁월한 정치적 리더십이었다고 생각한다.

버스도 깡통을 두드려 공업사에서 만들었고 그때 우리 집엔 기아 브리사 자동차가 있었다. 이제는 마이카 시대에 왔다. 나날이 발전하는 자동차는 이제 자동차 회사에서 만드는 게 아니라 전자회사에서 자동차를 조립하는 시대가 온 것 같다.

네비게이션이 나왔을 때만 해도 신기했는데 차선이탈 방지, 스마트키, 어라운드 뷰, 자동주차 등 수많은 기능들이 첨가된 아이오닉 5 EV6, 테슬라의 전기자동차 5G를 이용한 무인 자동차 시대가 도래하여 앞으로 사람이 운전하면 벌금을 무는 시대가 올 것 같다.

당시는 외판원들이 많았다.

백과사전 중 브리태니커 27권짜리가 본책 한 권이 단행본 20권 분량과 맞먹는 양이었다. 값도 비쌌다. 그때는 유행이라 집집마다 장식품으로 놓고 유명 외판원들은 다른 회사에 스카웃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건설 경기나 모든 게 시작하던 때라 수요보다 공급이 따르지 못해 자동차 영업 사원들은 건설 장비 중 덤프트럭 배정을 받기 위해 뒷돈이 오가는 시대가 있었다.

그럭저럭 하숙집을 두 군데 정도 전전하다가 대학을 졸업한다.

지금은 대학 졸업하고 취업 전문학원을 몇 군데씩 다녀도 취직이 어려운데, 그때는 회사에 사람이 부족해서 대학만 졸업하면 어지간한 회사에서는 환영이라 멋대로 골라서 갔다.

나는 아버지께서 당뇨가 있어서 아버지 사업을 도와야 했기 때문에 서울에 눌러 있을 수 없고 고향으로 가야 한다. 나는 직장 생활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아쉬웠다. 고향 와서 하는 사업의 거래처는 주로 관공서에 납품하는 것이다.

사업은 잘 되었다. 지역 관공서, 학교 등 우리가 90% 이상의 마켓쉐어를 가지고 있었고 그 후 한국에서 제일가는 사무용 기기 S 기업, 오디오 일등기업 I 회사의 대리점도 하고 예식장도 경영하였다.

우리 어머니께서는 정말 하나님 말씀과 기도로만 사셨고 그것을 실천하신 분이다. 어머니에게는 일요일이 아니고 주일도 아니고 일요일은 안식일 그 자체셨다. 시장은 토요일에 가셨고 일요일에는 목욕 미장원에도 안 가신다. 교회 헌금이 구겨지면 다리미로 다려서 성미(聖米)와 함께 정성껏 바치신 분이셨고, 목사님은 주의 종이라고 정성껏 섬겼다.

사업도 시기가 중요하다. 오디오 판매나 예식장은 일요일 손님의 매출이 많은 날인데 어머니는 그것이 항상 불만이셨다. 오디오는 본사에서 일요일 문을 닫으면 대리점 해약한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나는 일요일 셔터를 내렸다. 또 그 잘 되던 예식장도 폐업하였다.

빨간 250cc 혼다 오트바이를 타고, 현대 자동차의 포니가 처음 나올 때 자동차를 교환했다. 당시 온천이 유행이라 우리 가족은 할머니 모시고 자주 다녀왔다. 갈 때는 집에서 떡과 김밥 등 소풍 가는 정도로 준비하고 갔다.

부곡 온천은 경남 창녕군 부곡에 있는 온천이다. 수온이 70도나 되는 우리나라 대형 온천이라 전국에서 사람들 방문이 줄을 이었고, 시설도 아주 대형으로 좋았다. 그렇게 멀미가 심하시던 어머니도 멀미를 언제 잊어버리셨는지 몰라도 그때부터는 멀미를 잊으신 것 같았다. 지금은 온천이 사양 산업이 되었는지 그곳은 파시(波市)를 연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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