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도끼로 생사람을 찍어죽이게 만들었나

북한에 살면서 전쟁에 가장 가깝게 느껴졌던 8·18 판문점 사건 맨 정신을 가지고는 사람을 죽이기 어렵다고 한다. 전쟁시 이 맨 정신을 없애기 위해 인위적인 훈련을 시킨다고 한다. 이는 저의 상관이었던 림병환 소장(강냉이 연구소)이 직접 겪었던 증언이다.

6·25 전쟁이 일어날 당시 김일성대학 학생이었다고 한다.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되는 혁혁한 전쟁 승리 소식은 젊은 혈기를 자극한다. 승리의 쾌감만 있고 참혹함을 모르는 젊은이들인 것이다. 남반부를 해방시키자는 궐기 대회 속에 인민군에 자진 입대하였다.

자신들이 전선에 도착한 곳은 서울을 지나 오산이었다. 난생 처음 미군 포로를 보았다. 문제는 이 포로를 총살시키는 훈련이었다. 살인을 모르는 햇내기들에게 살기를 불어넣는 훈련인 것이다. 총구 앞에 세운 것은 미군 흑인 병사였는데 말 그대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던 모습이 평생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은 전쟁시의 이야기이다. 평화시에 그것도 손가락만 당기면 되는 총이 아니라 도끼로 생 사람을 찍어 죽인 것이 1976년 8·18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다.

북한에 살면서 전쟁에 가장 가깝게 느껴졌던 사건이다. 당시 나는 평안남도 순천시 은산 노동자구 소재 전문학교 학생이었다. 평양에서 소개되는 기관과 소개민들이 홍수 나듯 지방으로 밀려들었다. 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소개이면서 한편 급격히 불어난 평양시 인구를 줄이자는 계획의 일환이기도 했다. 인구가 불어나 평양시도 못 살아졌다는 관료들의 이기심이 전쟁 분위기를 잘 이용한 것이기도 했다.

한편 평양시에 남은 기관들의 구성에서도 추방자를 물색하여 지방으로 보냈다. 이는 같은 해에 감행된 캄보디아 공산당 서기 폴 포트의 정책과 일맥상통하다. 폴 포트의 눈에는 농민에 비해 얼굴이 하얀 수도 프놈펜 시민들이 모두 브르죠아 적대 계급으로 보였다.

1976년 당시는 중국에서 문화 대혁명이 끝났다고 하지만 아직 모택동을 후계한다는 화국봉 시대인 만큼 폴 포트의 뒤 배심이 되어주었기에 거칠 것이 없었다. 지식 분자들을 비롯해서 적대 계급들을 수도에서 대거 지방으로 소개시킨 폴 포트의 행위는 북한에서도 따라 배울 시원한 혁명적 조치로 보였다. 다행이도 폴 포트처럼 눈에 보이는 대량 학살은 없었지만 그 대신 북한은 정치범 수용소에 사람이 대량 채워지기 시작했다.

수학으로 유명한 김일성대 김수산 교수가 있다. 하지만 구시대의 인테리로서 성분이 나빠 평양에서 추방자로 찍혔다. 권위를 보아 추방지를 고르라고 해서인지 이미 평양에서 소개된 토양학 연구소에 찾아왔던 초라한 모습이 기억난다. 유명한 만큼 제자들도 많았으나 피차 소개된 가련한 처지에서 가볍게 인사만 하는 어색한 분위기를 곁에서 보기도 했다. 평양에서 소개, 추방은 정치적 물질적 나락에 떨어짐을 의미한다.

평양에서 이곳에 소개된 기관은 주로 농업과학원 산하 연구소들이다. 농업과학원 본원 소재지는 평양시 룡성구역 청계동이다. 대로 맞은켠에는 국방과학원이 있을 만큼 농업과학원도 단수가 높았다. 하지만 이곳에 있던 토양학연구소, 축산학연구소, 농화학연구소, 등이 지방인 평남도 순천으로 소개된 것이다.

갑자기 소개되니 집들이 있을 리 없었다. 남의 집 웃방은 고급이고 대부분 허줄한 창고 등에 기거할 수밖에 없었다. 허줄한 곳에서는 막노동을 할 줄 알아야 꾸리고 사는데 머리 허연 박사급의 인테리와 가족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러니 설상가상의 노숙자 신세처럼 보여 불쌍할 정도였다. 이 고난을 못 견디어 늙은 부모들이 죽어 산에 묻는 작업에 동원된 적도 있다. 민원 즉 불평이란 있을 수 없다. 위의 명령이면 무조건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국가의 주요 기관들이 대거 소개되는 것을 보면 당장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이 느끼기도 하였다. 하지만 1년 후 소개된 기관들 모두 평양으로 돌아갔다. 차후에 알게 되었지만 김일성의 처음되는 유감 표시를 미군이 받아들여 전쟁 위기가 가셨다고 한다,

흉악한 미군이 아니라 지나칠 정도로 착한 자유 세계 군대였다. 이런 미군들을 어떻게 도끼로 찍어 죽였을까. 한마디로 생 사람을 찍어 죽일 만큼의 증오심 선전과 교육이었다. 이런 증오심을 자극시킨 결정적 근거는 8·18 사건 한 해 전에 만들어진 <금이와 은이의 운명> 영화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8·15 해방 후 운명적으로 북과 남으로 갈라진 쌍둥이 형제에 대한 것이다. 북한에 온 금이는 예술인으로 맘껏 행복하고 이쁘게 성장한다. 하지만 남한에 남겨진 은이는 영양실조에 장님이 될 정도로 불행에 허덕인다. 영화를 보면 누구나 눈물을 자아내게 만든 이 비극의 원흉은 조국을 분단시킨 미군이라는 것이다. 실제 판문점 경비 미군 실물까지 보이며 <세계의 양심이어! 대답하라!>로 영화를 마친다.

필자도 참을 수 없는 눈물과 증오의 감동이 일어나 영화사에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실제 판문점에서 미군과 마주한 북한 군인들은 어떠했을까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러기에 사건 전말을 보면 그것이 보인다. 이미 북한측에 승인을 받고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1시간 후 번복하며 하지 말라고 생트집을 건다. 그리고 도끼를 빼앗아 미군들을 찍어 죽인 과정들이 증명된다.

남북 통일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통일을 할 만큼 마음 문을 먼저 열게 해야 한다. 굳게 닫힌 마음 문이란 증오이다. 증오의 근원은 미군이다.

1972년 14살 때 '붉은청년근위대'로 난생 처음 총을 쏴봤다. 겉으로는 남북 화해 무드였지만 내 속은 적화 통일을 위해 미성년자들에게까지 총을 쏘는 훈련을 시키는 것이었다. 요란한 총 소리에 부들부들 떠는 우리들에게 세 발의 총탄을 준다. 강조하기를 명사수가 되려면 증오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첫발은 미국 놈, 둘째 발은 일본 놈, 세 번 발은 박정희 괴뢰도당에 대한 증오를 가지고 쏘라고 했다.

본래 공산주의는 증오의 사상이다. 이런 증오의 교육에 감성적인 증오의 영화까지 보이면
나래도 도끼로 사람을 찍을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증오의 근원인 미군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8·15 해방의 은인은 김일성이 아니라 미군이라는 진실 말이다. 또 철군했다 현재 주둔하고 있는 것은 김일성 일으킨 6·25 침공 때문이라는 진실을 알려야 한다.

이 진실이 알려질까봐 북한은 라디오 인터넷을 막은 유일한 곳일 만큼 폐쇄 정책을 고수 하고 있다. 이 폐쇄를 자유롭게 평화적으로 뚫는 것이 대북 풍선이다. 그래서 저는 대북 풍선을 개발하여 이 진실을 알린다. 대북 풍선의 핵심은 증오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통일 전이든 통일 후이든 이 증오는 반드시 사라지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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