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은 주었지만 국적은 주지 않았다?

역사적 사실은 역사적 평가와 다르다. 여권은 국적의 주요한 징표이고, 국적은 또 주로 여권에 의해 표현된다. 어떤 의미에서 국적은 바로 여권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권은 주었지만 국적은 주지 않았다고? 세상에 이런 황당한 일도 있나?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에게.

며칠 전, 역사학자 전우용교수가 김어준의 무슨 프로그램에 출연해 한 말들이다. “1920년에 일본에서 국적법을 개정해요. 일본에 5년 이상 거주하면 귀화를 신청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조선인은 일본인으로 취급하지 않으면서도 조선인은 귀화신청이 안돼요. ” 김어준이 참견 왈, “김문수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되잖아, 사실은 귀화할 필요도 없어야 되거든요. 일본 국적이면.” 김어준이 제대로 잘 말한 것이다. 조선인들은 1910년의 한일병합조약에 의해 자동적으로 이미 일본 국적을 부여 받았으니 당연히 귀화가 필요 없는 것이다. 김어준도 꽤 유명인사라고 들었는데, 그 순간 아마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실수를 한 모양이다.

전우용 교수가 또 하는 말, “대외적으로는 일본인, 일본에 메달을 따주는 조선인에 한해서 일장기를 달아 주는 것 뿐이죠. …일본 국적을 준 적이 없어요… 실제로 일본인으로 안 만들어줘요. 그러고 나서는 꼬드겨요. 조선일들에게 군대 가서 일본을 위해 죽어라, 죽으면 나중에 그때 일본 국적 주겠다. 꼬드겨서 조선인을 전쟁터로 끌어내는 데 이용했을 뿐 국적을 준 적은 없어요. 여권 얘기를 자꾸 해요. …1937년 한 해 동안 조선총독부 각 도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발행한 여권 총수는 70장이예요. 진짜 무식한 소리를 하는 거죠. ” 요약하면, 국적은 준 적이 없지만 여권은 줬다는 말인데, 제 나라 국적도 아닌 조선인들에게 여권을 발급할 만큼 일본인들이 그렇게 멍청했을까.

그는 또 그 당시 조선인 국적이 일본이 아닌 이유로, 화페가 달랐다, 교육의 동일성이 없었다, 행정권이 달랐다 등을 열거했다. 지금 홍콩이나 마카오 사람들은 중국 국적이지만, 두 지역 모두 특별 지역으로 분류, 관리되기 때문에 중국 본토와 화폐도 다르고 여권도 다르다. 그 당시 일본도 국적을 통일하기는 했지만, 호적은 내지(일본 본토)호적, 조선호적, 대만호적 3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속지주의 정책을 실시했다고 한다. 민족 차별, 지역 차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역사학자라 하니 이런 것도 누구보다 더 잘 알 텐데.

한편, 경북대 김창록 교수는 1910년의 한일병합조약이 “이미 무효”가 아니라, “원천 무효”이기 때문에 “1910년 이후에도 한반도가 일제의 영토가 된 적이 없고 한반도의 인민이일본의 국적을 취득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병합조약이 “원천무효”라고 해서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은 적이 없었다, 일본 국적을 취득한 적이 없었다고 하는 이런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역사적 사실은 역사적 평가와 다른 것이다. 평가와 해석을 어떻게 하든 조선이 35년간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았으며 우리 조상들이 일본신민으로 살았다는 역사적 사실 자체는 소멸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역사적 사실이었고 객관적 현실이었던 것이다. 누가 뭐라고 떠들어도 서울 한복판에 조선총독부가 있었던 사실도, 일본인들이 이 땅에 와서 토지조사를 하고, 산림 측량을 하고 쇠말뚝을 박았던 역사적 사실 자체는 말소되지 않는다. 자랑할 만한 역사도 역사이지만, 부끄러운 역사도 역사가 아니겠는가. 분하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 조상들이 “일본신민”이었다는 역사적인 사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우리 조상들의 국적이 일본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일제강점기 우리 조상들의 국적이 일본이 아니었다면 무엇이었는가? 이미 망해 버린 대한제국이었는가? 아니면 대한민국(임정)이었는가, 아니면 무국적자였는가? 아니면 일본과 대한민국 이중 국적이었는가?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일제강점기 우리 조상들의 국적은 대한민국(임정)일 것 같은 데, 그 시절 임정에서 국제적 효력을 가진 여권을 발급한 적이 있었는가?

또 묻고 싶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와 동메달을 딴 남승룡 선수가 가슴에 달고 뛴 것이 태극기였는가? 일장기였는가? 경기 후 손기정 선수가 여러 번 “우리 나라 일장기”란 말을 하고 출국할 때 소지한 것도 “키테이 손(KITEI SON)” 이란 일본 여권이었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나는 대부분의 경우 상식이 곧 진실이라고 믿는다. 한국 사람들 대부분은 지금까지 우리 조상들은 일제강점기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에 일본신민으로 살았다고 생각해왔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문수 장관도 청문회에서 그게 상식이라고 했다. 100년 넘게 지켜온 그런 역사적 상식이 다 틀렸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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