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사람들

링겔병을 난로 위 주전자에 담가 주사해 주던 가난한 동네의 의사 선생님. 바닷가 마을에서 더러 잊고 있었던 따뜻한 정을 발견한다.

이따금씩 들리는 중국음식점 주인이 감나무에서 감을 땄다면서 한 박스를 짊어지고 왔다. 식당에 갈 때면 군만두 두 개씩을 서비스로 주는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다.

내가 단골로 가는 포구 옆의 횟집이 있다. 늙은 개 한 마리를 끔찍하게 사랑하며 사는 부부가 하는 집이다. 한번은 서울에서 온 친구와 함께 그 집에서 맥주를 곁들여 회를 먹은 적이 있다. 바다에 어둠이 내리고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날 무렵 그 집 주인은 자기 차로 한참이나 걸리는 내가 사는 곳까지 우리를 데려다주었다. 하루 종일 장사하다 보면 피곤할 텐데 그의 배려가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 횟집 주인은 밤을 지새며 작은 어선이 그물에 거두어 온 싱싱한 은빛 물고기를 보면 내게 연락을 하곤 한다. 인정이 많은 사람이다.

길이 멀어도 찾아오는 벗이 있다. 기별이 없이 와도 그를 맞이하는 정겨움이 가슴에 가득 찬다. 부부간이라도 털어놓을 수 없는 이런저런 속내를 밤새워 나눈다. 속마음이 이미 통하는데 말이 필요 없을 때도 있다. 그냥 마주하면 심정을 안다. 세월의 강을 흘러 이제 모습들이 노인으로 변해도 친구의 속은 소년 시절의 모습 그대로다.

돌이켜 보면 내가 살아온 세상은 가난했지만 따뜻한 것들이 많았다. 어려서 어머니가 아파 누워있으면 동네 사람들이 죽을 쑤어서 가져다주었다. 고마웠다. 내가 대학입시를 준비하고 있을 때 앞집 할머니는 소고기 한 근을 사다가 우리 집 대문 아래 공간으로 몰래 밀어넣고 갔다.

내가 고시 공부를 하던 시절 아파서 동네 의원으로 간 적이 있었다. 평생을 가난한 동네에서 환자를 돌보던 의사선생님은 온 길에 링겔을 한 병 맞고 가라고 했다. 의사선생님은 링겔병을 난로 위의 커다란 양은 주전자에 담겨있는 물에 담아 따뜻하게 했다. 그리고 내게 주사해 주었다. 돈은 나중에 있을 때 가져오라고 했다. 말이 별로 없던 그 의사선생님은 따뜻했다.

나는 내가 만났던 수많은 따뜻했던 사람들에게서 배웠다. 내가 오늘 어떤 사람을 만났다면 그 사람에게 내 안의 따뜻한 가슴이 전해져야 한다는 걸. 그래야 만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십여년 전쯤이었다. 아는 친구의 부탁으로 그와 함께 재개발 지역인 달동네를 찾아갔었다. 혼자 병을 앓고 누워있는 사람의 얘기를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흐르고 나오려고 할 때였다. 대화를 하던 아픈 분이 나보고 잠시 밖에서 기다려달라고 하고서는 나를 데리고 온 친구와 몇 마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산동네를 내려와 함께 친구와 작은 음식점에서 늦은 저녁을 먹을 때였다.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아까 아픈 그 친구가 비상금 오만 원을 꺼내주면서 변호사님 저녁 대접을 해드리라는 거야. 가난한 그 친구에게 그게 얼마나 귀한 돈이겠어? 그래서 내가 걱정하지 말라고 그랬어.”

조금이라도 보답하려는 따뜻한 마음이었다.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면 내 자신이 기뻐지고 누군가를 언짢게 하면 내 자신이 괴로워진다. 그런 게 바로 마음의 메아리가 아닐까.

그 무렵 박원순 서울시장과 개인적으로 만났다. 박 시장은 나의 고교 후배이기도 하고 빌딩에서 위아래로 법률사무소를 하기도 했었다. 재개발지역에 대한 말을 나누었다. 박 시장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어제 쪽방촌으로 가봤어요. 재개발의 개념을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재개발을 하면 그곳에 살면서 가게를 하거나 물건을 만들던 사람들은 생활의 근거지가 파괴되는 셈이죠. 거기 더 이상 살지도 못하고 직장도 없어지게 되는 거죠. 재개발을 하더라도 있는 그 자체로 개조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장의 말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요즈음은 따뜻한 눈빛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실험 삼아 남과 눈길이 부딪칠 때면 고개를 까딱하고 숙여 본다. 미소 한번 짓는 것도 고개를 숙이는 것도 작은 선행이 아닐까. 그 작은 동작에 상대방이 화들짝 놀라고 얼음같은 눈빛이 순간 따뜻하게 변한다. 사는 게 별 게 아닌 것 같다. 작고 미미한 것일지라도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하루 한방울의 작은 선이라도 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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