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따뜻한 사람

1년에 한 번씩 외상 진료비 장부를 태우던 시골 의사 <현명한 부인>

밤중에 한강다리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한 방송국의 여성 아나운서가 있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조대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 허공을 떨어져 내리는 순간 아니면 깊은 물 속에서 마지막에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떤 사람은 물 속에서 숨이 막힌 몇초의 시간이 일생 겪은 고통보다 더 컸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나는 물 속으로 몸을 던졌던 그 여성과 만났었다. 그녀는 자살의 원인을 이렇게 얘기했다.

“아나운서를 하다 보면 여러 초대 손님을 만나게 됩니다. 직업상 밥을 같이 먹는 경우도 있구요. 남편은 항상 불륜을 의심하면서 저를 괴롭혔어요. 내가 누구와 만났는지, 했는지 안했는지를 끝도 없이 반복해서 묻곤 했어요. 정말 미치겠더라구요. 아나운서라 직장에서는 항상 즐겁고 행복한 척했어요. 자존심상 죽어도 이혼은 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있었죠. 그런 상황이 오래 가니까 우울증이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죽으려고 손목을 한번 그은 적도 있구요. 다음으로 한강에 가게 된 거예요. 떨어지는 순간 ‘이제 고통에서 벗어나는구나’ 라는 것만 있었지 다른 아무 생각도 없었어요.”

그녀는 남편을 잘못 만난 것 같았다. 그녀가 유서를 써놓고 한강물로 떨어지는 순간에도 남편은 그녀의 컴퓨터를 해킹하면서 어떤 남자와 이메일을 주고 받았나를 알아보고 있었다. 이미 그들에게 한 방울의 사랑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지독히도 메마른 남편이었다.

그 반대로 갈라 터진 논바닥같이 물기없는 부인을 본 적도 있다. 성공 가도를 달리다가 감옥으로 간 부자가 있었다. 부인보다 누나가 면회를 다니면서 동생의 옥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 누나가 나의 변호사 사무실에 와서 감옥에서 보낸 동생의 편지를 보여주었다. 아내가 감옥에 있는 남편에게 보낸 편지였다. 아내는 감옥에 있는 남편에게 아들의 고급 차를 사주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자식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인심을 잘 써야 판사한테 정상참작을 받을 수 있다고 훈계까지 하고 있었다. 그 부인은 고생하는 남편보다 돈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 부인과 왜 살아왔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변호사를 하면서 직업상 남의 가정 안을 많이 들여다 보았다. 같은 집에 살지만 마음은 전혀 남남인 경우도 많았다. 남 정도가 아니라 증오가 이글거리는 관계도 있었다.

며칠 전 곱게 나이를 먹은 한 부인을 만났다. 선생님이었던 남편이 퇴직을 한 후 부부가 숲 속에 집을 마련하고 노년을 평화롭고 여유 있게 살고 있었다. 그 부인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처녀 시절 결혼을 전제로 두 명의 남자와 데이트를 한 적이 있어요. 두 분 다 저를 좋아해 주시고 저 역시 두 사람 다 훌륭하다고 생각했어요. 첫번째 데이트를 할 때였죠. 남자가 키도 크고 미남이고 의사였어요. 같이 길을 가다가 거지가 다가오는 걸 봤죠. 남자가 뿌리치는 태도를 보니까 너무 차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물론 저한테는 따뜻하게 대해주고 솜사탕 같이 부드러웠지만요. 그 다음으로 지금의 남편을 소개 받아 데이트를 하게 됐죠. 가난한 사람이 많았던 시절이라 길을 가다가 또다시 모퉁이에 웅크리고 있는 거지를 보게 됐어요. 데이트를 하던 지금의 남편은 거지를 보자 동전이 없나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아예 지갑을 열고 돈을 주는 거예요. 자기도 넉넉하지 못하면서요.
선물을 파는 가게에 들어갔는데도 손님이 없으니까 차마 그냥 나오지 못하고 사주는 거예요. 그런 따뜻한 마음을 보고 저는 결혼을 하기로 했죠. 결혼을 해 보니까 시골에서 의사를 하던 시아버님도 따뜻한 분이었어요. 비가 쏟아지는 장마철에도 한밤중에 아프다는 사람이 있으면 외딴집까지 왕진을 갔고 돌아오는 길에 강에 물이 불어 죽을 뻔하시기도 했어요. 시아버님은 일 년에 한 번씩 외상을 적은 진료비 장부를 태워 없애 버리시더라구요. 시아버님을 닮은 남편은 칠십대 말이 된 지금까지 변함이 없어요.”

결혼에서 정말 중요한 건 배우자가 될 사람의 맑은 영혼과 따뜻함이 아닐까.

오랫동안 법률사무소를 하면서 나는 사랑을 감별하는 비법을 알게 됐다. 아무리 못생기고 가난해도 사랑을 받는 여성한테서는 얼굴에 윤기가 있다. 그것은 화장품으로 만든 인공적인 것이 아니다. 내면에서 은은하게 번져 나오는 빛이었다. 반면에 아무리 미녀라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성은 거칠고 푸른 그늘이 서려 있다. 사랑이 서정시고 결혼이 서사시가 되면 행복의 꽃이 피어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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