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람하게도 이재명 따위가 이럴 수 있는 원천적 까닭은 국민을 겁내지 않는 데에 있다
이전에 일본인이 우리나라 사람을 멸시할 때 주로 썼던 말은 ‘반도 근성(半島根性)’이다. 대륙 기질처럼 꾸준하지도 않고 섬나라처럼 화다닥하지도 않는다는 말인데 몸을 사리는 사람에게 주로 사용했다. 반면에 우리는 일본인을 향해 ‘도국 근성(島國)’이라 했다. 그냥 넘어가도 좋을 일에 흥분하여 칼을 뽑아 든다는 의미로서 성급하게 촐랑됨을 비웃을 때 썼다. 두 나라 모두 듣기는 싫겠지만 반드시 틀린 말도 아니다. 우리가 풍요해지자 ‘반도 근성’이 심화됐다.
반도 근성이나 도국 근성이 뜻하는 바가 전혀 잘못이 아닌 바에야 차라리 그런 근성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약점을 극복하려 노력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렇게 놓고 보면 우리는 비겁할 만큼 나랏일에 나서지 않는다. 달리 말하자면 국가 이익보다는 일신상의 이익을 우위에 둔다는 말이 된다. 무릇 세상 사람이 나라의 이익보다는 개인 이익을 우선하겠지만 우리는 유달리 심한 편이라서 나라가 방황할 때는 문제가 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문을 닫아걸고 방구석에 들앉아 공자왈 맹자왈 하는 것을 가장 바람직한 처신으로 친 것이 과거의 원인이다면,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로써 나서지 말기를 바라는 가정 교육이 지금도 이어지는 원인일 것이다.
단적인 예로써, 일 년 사이에 일본은 아베 총리가 암살당하고 지금의 총리인 이시바 시게루도 위기를 모면했었다. 트럼프도 한 번은 총을 맞았고 또 한 번은 맞을 뻔했다. 이유를 불문하고 저런 일이 있는 나라일수록 정치인이 국민을 조심하고 겁낸다. 그리하여 일등국가가 됐다. 우리 정치인은 어떠한가? 국회의원 앞에서 국민은 상전 앞의 종과 같고, 국민은 정치인의 가슴속에 있지 않고 세 치 혓바닥에만 있다. 저런 폭력이 없으면 좋으련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이성은 평화롭지만 역사는 폭력적이다”는 말처럼 폭력이 배제된 역사는 있지 않거니와 폭력이 추동한 역사가 먼저 선진국을 이룩했다.
우리가 아무리 반도 근성에 쩔어 살더라도 불의에 일어선 이 또한 많다. 장개석이 “중국군 300만 명이 하지 못한 일을 안중근 의사가 혼자서 했다”고 상찬했듯 안중근 의사와 같은 애국자도 있고, 수류탄을 던져 일왕을 죽이려 했던 이봉창 의사도 있고, 윤봉길 의사도 있다. 그들을 일본은 ‘폭탄의사’라 부르기도 했다. 민영환 같은 우국충절도 있고, 을사늑약이 되자 분함을 못이겨 자결한 분도 많다. 목숨을 초개 같이 던진 무명 독립투사도 셀 수 없고, 6·25에 몸 바친 분 또한 얼마나 많았던가.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학도병은 또 무릇 기하였던가.
이재명이가 못 하는 짓이 없다. 작금의 나라 형편은 국가 재난 상황이다. 어떤 이는 “이러다가 무슨 사달이 나고 말지.” 하며 혀를 차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혹자는 “좀 더 두고 보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또 누구는 분개하여 술을 들이키는 이도 있을 것이고, 또 때로는 이재명의 저 짓에 환호하는 자도 없지 않을 것이다.
이재명이가 여기저기서 재판받는 것을 기화로, ‘검찰 공화국’이라 욕하기도 하고 자기를 핍박당하는 사람으로 그리기도 하는데 아니다. 지금이 이재명의 전성기이다. 더민당을 줄 세워서 입법 권력을 틀어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국법질서, 국가행정, 국가사무를 자기 입 안의 사탕처럼 제 맘대로 굴려 먹고, 장관 탄핵. 검사 탄핵. 감사원장 탄핵도 제 맘 내키는 대로 하고, 방통위원장을 취임 이틀 만에 탄핵하여 방통위 업무를 마비시켜 버렸다 이는 국가기능을 수행하는 권력 기관이 없어지는 일로써 국가의 통괄적 기능이 마비되어 마침내 나라가 망하게 된다.
참람하게도 이재명 따위가 이럴 수 있는 원천적 까닭은 국민을 겁내지 않는 데에 있다. 국가 공권력에 대한 도전을 위정자가 국가 반역 차원에서 막는 것이 가장 선한 방법이겠으나, 윤석열이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음을 간파하고서 저러는 것이니 도리없이 국민이 일어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대한민국 국민을 하루아침에 ‘검찰 공화국’ 국민으로 전락시킨 것은 이재명의 범죄성향에 기인한 것으로서 국민의 위엄과 명리를 날치기한 것이다. 국가 반역 행위를 앉아서 구경만 한다면 일본이 욕하던 ‘반도 근성’은 절대 진실이 되고 만다. ‘
이재명이야말로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 같다. 프로크루스테스가 사람의 키를 침대에 맞추어 늘리거나 줄였듯 이재명도 법률을 자기 방탄에 맞추어 늘리고 줄인다. 나라 예산마저 제맘대로 늘리고 줄인다는 도그마(dogma)도 가졌다. 앞으론 또 무슨 일을 더하여 국민을 놀래킬지 모른다. 국민 앞에서 조심하고, 국민을 겁낸다면 감히 이러겠나? 이재명이가 국민을 겁낼지 말지는 그의 마음에 달렸지만, 국민 개개인의 영웅적 정신은 각자의 분노감에 달렸다. 정치인이 비록 국민을 우습게는 볼지언정 국민의 거룩한 분노심까지 뭉개지는 못한다. 나무 이파리는 매양 꽃 아래의 존재였지만 단풍철에는 꽃보다 아름답고 눈부시다. 그대와 나 같은 이 시대의 하천배가 사회의 도덕적 중심임을 잊지 말자.
지금은 이재명 전성기. 국민이 심판해야
- 무학산(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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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02, 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