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당 집무실의 어항이 얼었습니다"(황장엽)

북한은 1970년대에 이미 망했다. 망한 걸 접수하지 않고 다시 살도록 도와주었다. <1960년대, 80년대, 90년대 남북한 양쪽을 가 본 증언>

<가보니 먹고 사는 것은 일 없더라!> 1960년대 남파 간첩으로 남한을 직접 본 작은 아버지의 증언이다. 작은 아버지는 중앙당 3호청사(대남 사업부) 한 부서의 세포 비서였다.

1987년 나의 결혼식에 오셨을 때이다. 작은 아버지는 위치가 위치니만큼 말이 참 무거우신 분이다. 그럼에도 조카의 질문 즉 남조선은 헐벗고 굶주린다는데 어떤가요?에 이런 한 마디로 함축하여 답하신 것이다.

작은 아버지의 고향은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면이다. 남로당 청년비서 출신으로 6·25 전쟁 때 월북, 송도정치대학 1기생이다. 송도정치대학은 개성에 있었는데 대남공작원 양성 원초기지였다. 1960년 4·19 봉기 후 대남적화통일을 본격화한 분위기로 남파되었던 것이다. 1960년대에는 북한 역사에서 가장 잘 살았다는 시기이다. 그럼에도 북한에서 남한에 가 본 증언은 <먹고 사는 것은 일 없더라!>이다.

1970년대에 남북한 양쪽을 가본 사람은 만나 보지 못했다. 이 당시 남한을 가보진 못했지만 북한에서 살아본 필자의 체험은 이렇다. 1970년대 북한은 1960년대에 비해 생활수준이 급격히 떨어졌다. 근거적으로 말하면-1977년 1월 쓴 나의 일기장에 보면 이렇다. 사리원, 평양, 평성에 가보니 상점에 상품은 텅텅 비어있고 식당에는 밥 먹기가 정말 힘들었다는 기록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 드린다면 손님은 300명인데 물건이나 밥그릇은 100개밖에 없다고 보면 된다. 1970년대에 식량 배급은 1960년대에 비해 한 달에 4일분을 <전쟁미>로 뗀 상태로 줄어들었다. 동시에 식량 배급의 질도 떨어졌다. 이해를 도모하여 설명을 드리면 - 흰 쌀과 강냉이의 비율이 5대 5였던 1960년대에 비해 1970년대에는 3대 7로서 흰쌀 비율이 30%로 낮아진 것이다. 식량 배급량과 질이 동시에 낮아졌지만 공급은 재 때에 주던 시기이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서서는 양상이 달라진다. 식량 배급의 질은 더욱 낮아지고 그나마 제때에 공급하지 못한다. 설명한다면 흰 쌀은 없고 100%로 강냉이만 줄 정도로 질이 낮아진다. 한편 보름에 한 번씩 공급해야 할 식량 배급을 처음에는 한 달, 그 다음에는 두세 달 밀려 주는 것이다. 이렇게 밀려 주는 시기는 갈수록 늘어난다. 그 밀려주는 시기가 늘어날 수록 굶주림은 길어졌고 아사자도 발생된다. 필자가 직접 체험한 사실로 증명한다.

1987년경 라진 선봉 지구 출장길에서 아사자 소식을 지방 간부로부터 듣게 된다. 라진 시의 한 주부가 밀린 식량 배급을 기다리다가 아사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아사자가 몇 명이 안되어 당국에서는 입 소문을 막느라 급급하였다. 아사가 아니라 심장마비로 급사했다고 덮는 것이다. 북한의 아사는 통상 1990년대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비사인 것이다.

1990년대에 남북한 양쪽을 가 본 사람은 필자 본인이다. 필자가 탈북하여 1990년대에 남한에 와 보게 된다. 정확히 1995년 10월 처음 정착지로 배치받은 곳은 성남이었고 숙소는 분당시 이매동 재림교회였다. 예배 후 성도들을 위해 그 식사를 무료로 제공한다.

북한에서는 생일날에나 겨우 먹던 입팝(흰쌀밥)을 공짜로 먹이는 것이다. 문제는 그 입팝이 남아도는 것이다. 나 혼자 다 먹을 수 없어 버려야 했다. 버리기는 너무 아까워 분당 내천 가에 물고기나 새가 먹도록 뿌려 놓았다. 며칠 후 가보았는데 입팝이 그대로 있었다. 물고기나 새들도 배가 불러 먹지 않는 것이다. 남는 입팝을 뿌리면 환경 파괴범이라 경고를 받는다. 그 당시 북한은 강냉이 배급도 완전히 끊어져 대량 아사에 진입하였다.

다시 돌아가 되새겨 보자. 1960년대에 남북한 양쪽을 가본 증언은 있다(작은 아버지). 1970년대에 남북한을 양쪽을 가본 증언은 없다. 위에 설명은 북한에서 살아본 나의 증언만 있다. 1990년대 남북한 양쪽을 살아 본 증언은 있다(필자).

그러면 1980년대에 남북한을 가본 증언은 있을까. 어제 바로 그런 분을 만났다. 친히 저를 찾아오셔 선물과 두둑한 돈, 식사까지 대접하고 가셨다. 이분은 1985년 남한에서 북한을 방문하였던 김용석 박사이다.

이분은 서울대와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서 청와대 경호 쪽에 계셨다. 1984년 북한이 남한의 수해 지원을 계기로 모처럼 교류가 이루어졌다. 다음해인 1985년 방문단 일원으로 북한을 가게 된 것이다. 겉으로는 기자 신분이었지만 청와대의 요원으로 간 것이다. 비밀 임무는 차후 정상회담을 할 수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분을 통해 1985년 당시의 남북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판문점을 넘어 개성에서부터 기차로 평양을 향했다. 차창 밖 논을 보니 피(잡풀)가 벼들 속에 무성히 보였다. 남한의 논은 내 농사이니 잡풀 하나 없었다고 한다. 집들도 남한 집들에 비해 어둡고 획일적으로 지어졌다. 고려호텔에서 창밖을 보니 평양시 건설장이 보인다. 그 무거운 시멘트와 자갈 등 자재를 등짐으로 져 올린다. 인력으로 하다 나니 사람들이 작업장에 너무 많다. 한쪽에서는 힘들게 일하는데 또 한쪽에서는 노래와 구호를 부른다. 노래와 구호를 부르는 대신 일을 해야 더 효율이 아닐까.

당시 남한에서는 기계로 건설을 할 때이다. 이것은 남한 농업기관 출신으로 통일원에 계시던 분의 증언과 일치한다. 1984년 인천항에 들어온 수해 지원 물자 수송 북한 배에 오른 적이 있다. 남한 같으면 하루면 부릴 수 있는데 한 주일 걸렸다.

기계로 물자를 부릴 구조가 안되어 전부 인력으로 하기 때문이다. 휴식 시간에 간식으로 먹는 사과를 보았는데 너무 작아 놀랐다. 북한의 일반 주민들은 과일을 먹어볼 수 없다. 이들은 특별한 대우로 받은 사과인데 남한 쪽에서 볼 때에는 너무 작은 것이다.

다시 김용석 박사의 평양 방문기로 돌아가자. 개성에서 평양까지 그리고 평양 거리에서 자동차가 너무 없었다. 평양 차 거리에서는 교통경찰의 곤봉으로 신호등을 대신한다. 당시 남한에서는 차가 길을 메웠고 신호등으로 교통 정리했다. 북한 사람들이 얼굴이 활기가 없어 보였고 분위기가 숨이 막혔다. 거리는 회색빛이었고 획일적이었다. 김용석 박사의 견해로 볼 때 북한은 남한에 경쟁이 안될 것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전두환 대통령의 북한 수해 지원 승낙은 자신감임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공산권의 각종 수치는 믿을 수 없는 통계이다. 북한은 더 믿을 수 없다. 그런 수치임에도 남북한을 비교할 수밖에 없다. 남한이 북한을 압도하기 시작한 연도는 1972년이라는 기록을 본 적이 있다. 이것은 많은 남북한 비교 중에서 비교적 정확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 비교는 주민 생활로 비교하는 것은 또한 다른 문제이다.

민주적 표 권리가 없는 공산권 주민 생활은 더욱 국가 통계와 배리(背理)되어 있다. 공산 국가의 지표를 보고 주민 생활수준을 보는 것은 커다란 오류라는 것이다. 유럽의 빵 바구니 우쿠라이나에서 350만 명 굶겨죽이면서 식량을 팔아 중공업을 세운 것이 스탈린의 소련이다. 수천만 명이 아사 속인 1964년 핵폭탄을 완성한 것이 모택동의 중국이다. 작은 나라 북한에서 300만 명이 아사 속에서 <광명성1호> 로켓을 발사하고 핵 폭탄을 완성한 것이 북한의 3대세습이다.

내가 떠나 온 35년 전에 북한의 월급이 1달러 정도였다. 현재는 0.3달러로 낮아졌다. 북한 주민의 식량 배급이 완전히 중단된 것은 김일성이 죽은 1994년이다. 30년 지난 지금까지 식량 배급은 중단된 상태이다. 북한 주민들은 국가와 별개로 원시인들처럼 알아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실정에서 북한에 1인당 국민소득이 어쩌고 하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다.

이런 북한은 언제 망하는가. 아니다. 이미 망했다. 남한의 기준으로 보면 1970년대에 망했다. 남한의 상점들에 물건들이 없어 텅텅 비었다면 망했다고 할 것이다. 나의 북한 일기장으로 철저히 기준을 잡으면 1977년 1월, 평양과 황북도 소재지 사리원, 평남도 소재지 평성의 상점이 텅텅 비어있었다.

공산국의 존재는 배급이다. 그 배급이 끊겼으면 망한 것이다. 그 배급이 끊긴 북한은 1990년대에 망한 것이다. 식량 배급이 끊긴 것을 보고 받은 김일성은 그 충격으로 죽었다. 수백만 아사 속에 김정일은 자살하려고 권총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부인이자 김정은의 엄마인 고영희가 말렸다. 이는 김정은 후계를 위해 사전 작업하던 고영희 덕성 녹음에 나온다. 평양 역전에서 아사된 아이들을 본 장성택은 가슴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이는 측근이었던 김동수 탈북 외교관의 증언이다.

1997년 탈북한 북한을 만든(주체사상)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말했다. <중앙당 집무실의 어항이 얼었습니다.> 중앙당에도 전기가 끊어졌으니 다 망했다는 것이다. 언제 망하느냐가 아니라 이렇게 망한 것을 접수하지 않았을 뿐이다. 아니 망한 것을 다시 살도록 도와 주었기 때문이다.

<동맹보다 민족이 더 우선이다!>(김영삼 대통령).
<북핵은 개발 의사도 개발 능력도 없다. 내가 책임진다>며 몰래 달러를 갔다 준 <햇볕 정책>의 김대중과 그 후계인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
<더러운 평화가 낫다! 흡수 통일은 하지 않겠다!>(이재명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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