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새끼! 남조선 가려구 홍콩까지 갔던 놈이야!"

탈냉전 시대가 되니 북한을 자극 않겠다고 탈북자를 냉대한다. 천만다행은 언론의 자유다. "저새끼! 남조선 가려구 홍콩까지 갔던 놈이야!"

이 말은 1990년 11월 혜산 정치보위부 집결소(예심소) 당비서가 한 말이다. 나보다 더 젊은 20대의 청년이었는데 얼굴을 보니 사색이 되다 못해 죽을 상이다. 보는 이가 오히려 안쓰러울 정도였다.

나도 탈북하여 하루천하에 장백시에서 잡혀 북송된 처지였다. 그래도 나는 농업과학자로서 식량문제가 풀린 중국의 종자를 몰래 가지려 갔었다는 <문익점 애국 목화씨>로 변명하여 살아날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그 청년은 탈북한 것도 모자라 가장 반역자로 보는 남조선행을 하려고 홍콩까지 갔다가 잡혀왔으니 변명의 여지조차 없이 죽게 된 것이다.

필자가 장백시내에서 변장한 중국 변방대에 잡혀 감옥에 갇혔을 때이다. 감옥은 높다란 담벽으로 둘러싼 한 채의 단층집이었다. 감옥 안에 죄수는 나 혼자였다. 그만큼 탈북자가 적을 때이다. 라디오 인터넷이 없는 폐쇄 속의 북한에서 일방적인 세뇌교육과 선전 속에서 깨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속에서 가물에 콩나듯 필자를 깨우친 것은 1990년 8월, 군대간 건장한 남동생이 수열병으로 죽었다는 통보를 받고 전연지구인 철원군 대전리에 갔을 때 본 삐라였다. 삐라를 통해 6·25 전범이 미국과 남조선이 아니라 김일성과 북한이란 진실을 알게 된 것이다.

민족 역사의 최대의 비극을 사기친 것에 놀라다 못해 나도 모르게 분노하였다. 분단의 비극은 서로의 증오심이다. 남에서는 왜 너희들이 침략을 했어! 북에서는 이보다 더 비교할 수없이 증오심이 고취되어 있었다. 이 증오의 원흉이 <어버이 수령 김일성>이었다.

가장 충성한 자가 멀어지면 가장 반역자가 된다. 제가 그 꼴이 되었다. 6·25 진실을 말이라도 할 수 있는 남한에 가서 북한동포에게 보내도록 하자며 탈북한 것이다. 너무나 미개했던 세뇌 시대였기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탈북하였다.

하지만 중국에서 잡혀 북송되어 보니 나 혼자만 아니라는 것이 홍콩갔다 잡혀온 청년에게서 알게 된다. 북한사람들을 깨우는 통일운동을 벌려야 할 사명이 이런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어렵게 탈북한 소수가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생명을 걸고 남한으로 향하다가 잡혀 죽게 된다. 그 중대한 원인의 하나가 남한 당국이다. 냉전시에는 금덩어리 상금을 제시하며 어서오라고 추기더니 탈냉전이 되니 북한당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안 받는다고 홱 돌아섰다.

한편 중국과 러시아, 베트남, 라오스 등지에서는 주재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목숨걸고 찾아온 국군포로마저 냉대하는 형편이다. 북한사람도 헌법상 대한민국 국민이다. 국가의 책무는 국민 보호가 제일이다. 하지만 통일을 밤낮 부르짖었지만 사실 천민자본주의 사상밖에 없는 삼류국가 정신이다.

자국민을 위해 정부수반급을 동원하는 미국, 일본과 너무나 대조되는 대한민국 정치수준이다. 통일이 우리보다 훨씬 어려운 독일은 통일하였고 우리는 안된 것이 그래서이다. 천만다행인 것은 언론의 자유였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경전의 말씀대로 월간조선 편집장 조갑제 기자가 탈북자 문제에 나섰다. 이것이 1994년 4월 특종으로 터져 그 여파가 탈북자 구원의 결정적 열쇠인 유엔 난민 보호(UNHCR) 이루어진 것이다.

혹자는 이 생명을 얻게 해준 은인을 입에 담지 못하게 욕하는 탈북인도 있다. 하지만 탈북자 중에 그래도 저는 그럴 수 없다. 그 감사를 몸으로 현장에서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적 기념비를 소박하게 남아 세워드리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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