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서리를 맞아 잎이 떨어지면 남은 감들이 집집마다 꽃처럼 보인다'
북한에 있을 때 우리집엔 친척이 없었다. 아버지가 남한 출신으로 월북했기 때문이다. 특히 추석 때 남들이 흥청일 때 우리 집은 찾아 갈 데가 없었다. 우리집에도 죽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였다. 그때마다 아빠는 우리들을 앉혀 놓고 남한의 고향 얘기를 영화 이상 더 상상되게 하셨다. 항상 배고픈 공산 북한에서 아빠의 고향 얘기는 배부르고 따뜻한 천국처럼 들렸다. 조선 사람 3년이나 먹을 호남 평야의 쌀, 쌀밥이 얼마나 찰진지 대전 사람이 점심을 먹으러 기차 타고 내려왔다 올라간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과장이겠지만 그만큼 쌀이 많고 맛있다는 뜻인 것 같다. 하지만 탈북하여 실제 와보니 호남 쌀은 최고 쌀로 취급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이천 쌀이나 철원 쌀을 최고 쌀로 인정하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인 것처럼. 하지만 그때는 아빠 말이 절대적이었고 말만 들어도 입에서 군침이 솟아났다.
또 늦가을 고향 마을마다는 서리가 내렸음에도 더욱 꽃처럼 집집마다 보인다고 했다. 그것은 감나무라고 했다. 서리를 맞아 잎이 떨어지면 남은 감들이 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 감은 말 그대로 사탕처럼 달다고 했다. 북한에서 감나무는 군사분계선 접경 동서 해안을 내놓고는 없다. 수송기재가 없으니 유통이 안돼 감을 못 먹어본 이들이 태반이다. 먹어 본 정도가 아니라 아예 구경도 못한다. 그런 귀한 감들이 아무리 가난한 집에도 몇 그루씩 있다는 것이다.
또 입에서 군침 돌게 한 것은 고구마 소리이다. 고향 땅은 빨간 땅 지대라 고구마가 잘 된다고 했다. 고구마는 말 그대로 꿀 같다고 했다. 고향은 북한보다 춥지 않다고 했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눈은 내리자마자 녹아 없어진다고 했다. 먹는 것 이상으로 추위 속에 고생하는 북한 사람인 우리에게 아빠의 고향은 방안 아랫목의 따뜻한 보금자리처럼 느껴졌다.
그 세뇌의 여파가 얼마나 강한지 아빠 고향보다 더 따뜻한 남해안가에 농가와 여러 땅을 사 놓았다. 제주도와 맞은켠으로서 기후는 별 차이 없는데 땅값은 남한에서 가장 싸다. 그마저 경매로 더 싸게 구입하였다.
아빠 고향 호남벌판이 얼마나 넓은지 해가 중천에 떳다 중천에서 진다고 했다. 탈북하여 와서 실제 보니 그러했다. 대지의 습기로 인해 그렇게 보이는 것이었다. 또 벌판은 얼마나 넓은지 보습(소로 끄는)으로 한 고랑 갈자면 하루 종일 걸린다고 했다. 항상 배고픈 북한사람에게 벌판이 넓다는 것은 배부른 곳으로 느껴진다. <남조선>은 이런 벌판이 북조선보다 훨씬 많아 통일되면 정말 잘살게 될 것이라 믿어졌다. 통일 염원이 사무친 주 요인의 하나인 것이다.
아빠 고향에는 친척이 한 동네 된다고 했다. 얼마나 세뇌되도록 들었는지 여기 친척보다 친척들을 더 잘 알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많은 친척이 있었지만 내가 탈북 과정 생사를 넘을 때 도움의 행동을 실제로 한 것은 이복 누님뿐이었다. 나는 탈북하기 전부터 KBS에 이산가족찾기 편지를 보냈었다. 가장 먼저 달려 온 것이 이복 누님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관계 기관에 열심히 찾아다니기도 하셨다. 그리고 500달러라는 여비도 보내주셨다. 1달러가 북한 월급인데 500개월분 즉 거의 50년어치 돈을 보낸 것과 같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아빠의 몫까지 합해서 누님을 잘 대하려 애쓰고 있는 중이다.
추석 때마다 듣던 아버지의 고향 이야기
- 이민복(대북풍선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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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9-26, 11: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