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은 음식을 만드는 데에만 쓰여야 한다.
현대는 감각의 과잉이자 이미지의 범람인 시대이다. 사람 수보다 많은 크고 작은 액정화면과 스크린의 영상들은 인간의 감각을 즉각적으로 파고든다. 이러한 영상매체는 제작자 개인의 주관적 이념, 검증되지 않은 음모론 혹은 정치적 올바름(PC)이라는 이름의 恣意的 가치관을 대중에 注入하는 강력한 사상무기가 되고 있다.
文字를 통한 受容과 映像을 통한 受容은 인간의 知性作動機制에 차이가 있다. 글을 읽는 행위는 受容者에 비판적 사고와 성찰의 여백이 있다. 독자는 텍스트가 던지는 주장을 스스로 반추하고 논리적 개연성을 따져 물으며 자신의 理性으로 판단을 내린다. 설령 텍스트 속에 편향된 시각이 들어있다 한들 글을 읽어가는 鈍重한 시간 자체가 수용자의 판단력을 훈련하는 과정이 된다.
반면 영상은 直觀的이며 卽刻的이다.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는 이미지는 理性의 검문소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대중의 감정과 무의식에 着根한다. 수용자가 “이것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비판적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영상이 뿜어내는 實體感과 刺戟的 印象은 이미 하나의 ‘사실’이자 ‘느낌’으로 수용자의 思考를 집어삼킨다.
영상매체는 오직 명백하고 객관적이며 공익에 부합하는 사실을 전달할 때만 쓰여야 한다. 자연과학의 원리, 동식물의 생태 혹은 모두가 공감하는 公共의 정보와 진실을 시청각적으로 전달할 때 영상은 인간의 지성을 돕는 훌륭한 도구가 된다. 순수한 오락을 위하거나 보편적인 삶의 용기를 주는 창작물 또한 容認된다.
영상의 창작에 개인의 사상이나 역사관 그리고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개입하면서 영상은 대중의 理性을 마비시키는 무기로 변질된다. 昨今에 국내외 영화계에서 벌어지는 世態는 이러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암살자(들)〉이란 영화에서는 “의문점을 관객에게 던진다”는 辨明 아래 현대사의 중요사건에 어떤 비약적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을 수용하는 관객에게 충분한 思考와 省察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음은 앞서 밝힌 바와 같다. 치밀한 고증과 논리적 근거로 역사를 밝히는 대신에 화려한 스펙터클과 감각적 연출의 힘을 빌려 대중이 理性的 판단을 내리기 전에 어떤 분파적 가치판단을 수용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이미 세계적 화제작인 〈오디세이〉 等 고전 脚色物을 비롯한 근래 歐美 영화계의 제작 추세에서도 마찬가지다. 古典 固有의 세계관과 구조적 완성도를 존중하기보다는 인위적인 피씨주의를 이식하기 위해 역사적 배경과 어울리지 않는 캐스팅을 고집하고 오디세이가 아킬레스 대신 이름 없는 병사의 유령을 대면하게 하는 등 관객을 향해 훈계를 늘어놓는다. 물론 전쟁에서 이름 없는 병사의 代價없는 희생이 가장 억울한 것이라는 취지는 理解된다. 그러나 그 정도 생각을 안 하는 세계인은 없다. 특히 우리의 文化史에서는 일찍이 판소리 〈赤壁歌〉의 〈군사설움타령〉으로 민중의 삶의 고통과 恨을 공감하고 위로한 바 있는데 이것은 삼국지의 각색을 표방한 것도 아닌 새로운 창작으로서 고전의 敍事를 빌려 새로운 민중적 가치로 독자적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고전의 이름을 빌려 원작의 맥락을 自家撞着的으로 훼손하고 관객에게 특정한 정치도덕적 가치를 注入하고 가르치려하는 현대 영화감독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오디세이〉에 이름 없는 병사를 느닷없이 침투시키는 것은 "너희는 아직도 영웅주의에 빠져있으니 내가 깨우쳐 주겠다"는 오만한 선민의식의 발로이다. 이미 온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상식적 명제를 마치 자신들만 깨달은 고매한 진리인 양 포장하여 감각적 이미지로 대중의 이성을 압도하려 드는 것이다. 反面 판소리 〈적벽가〉는 거대한 역사 앞에서 짓밟히던 민중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찾아낸 진실한 예술적 구원이다.
여하튼 전쟁은 비극적이니 막아야 한다 이겨도 불행하다 주장하는 것은 좋다. 그토록 미국과 세계에 영향력을 주고자 한다면 그 만큼의 책임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전쟁은 또 일어났다. 근래의 對이란전쟁의 결과를 〈오디세이〉의 감독과 제작자는 트럼프와 함께 책임질 用意는있는가.
이렇듯 대중을 계몽하고 가르치겠다는 知的 傲慢은 국내외 연출자들에 澎湃하다. 그러나 진정으로 자신의 사상과 가치관, 세계관을 세상에 호소하고 검증받고자 한다면 정교한 논리와 치열한 글쓰기를 통해 '글'이라는 정직한 도구로 대중과 겨루어야 한다. 맨손으로 思惟의 정밀함을 다듬는 글쓰기의 고통은 뒤로한 채 영상이라는 거대한 자본과 압도적인 감각 자극의 도구를 빌려 자신의 주관적 신념을 대중에게 주입하려는 것은 대중을 知的으로 陶冶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종속시키는 행위에 불과하다.
주방의 칼은 음식을 만드는 도구로 쓰일 때 가치를 發한다. 그러나 그 칼을 타인을 자기 생각에 복종시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면 극히 비극적이다. 영상매체 역시 모두가 필요로 하는 객관적 진실과 공익적 가치를 전달하는 ‘음식을 만드는 칼’로서 존재할 때 문명의 도구가 된다. 영상이 갖는 압도적 殘像의 힘을 무기 삼아 대중의 이성을 뒤흔들고 주관적 사상을 전파하려는 미학적 오만은 이제 억제되어야 한다. 대중 또한 스크린이 선사하는 화려한 이미지의 주술에서 깨어나 글이 주는 정직하고 깊은 사유의 뜰로 돌아가 비판적 이성을 되찾아야 할 시점이다.
"영상은 사상을 주입하는 무기가 아니다. 칼이 오직 음식을 만드는 데 써야 하듯, 영상 매체 역시 객관과 공익이라는 정직한 가치 안에서만 비로소 허용될 수 있다."
영상으로 思想을 전파하려는 연출자들의 오만
- 박경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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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9-29, 17:5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