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이 없다는 건 사실이 없다는 거죠. 그러니까 누군가 꼭 써서 남겨야 합니다." (한승헌 변호사)
냉기 섞인 바람이 부는 봄이었다. 나는 서울구치소에서 오랜 감옥생활을 한 죄수를 만났다. 백지같이 하얗게 바랜 얼굴이었다. 바짝 마른 몸을 홑겹의 얇은 죄수복으로 감싸고 있었다.
“변호사법 1조를 보면 변호사는 사회정의와 인권옹호를 위해 일한다고 되어 있더라구요. 변론을 하니까 인권옹호는 알겠는데 사회정의가 뭐죠?”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이 나를 꿰뚫듯이 보고 있었다.
“감옥의 높은 담을 통과해 들어온 변호사만 보고 들을 수 있는 사건들이 있어요. 그걸 세상에 알리는 게 사회정의 아닐까요?”
무심히 지나쳤었다. 그에게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런 변호사를 찾았다.
봄비가 촉촉이 내리던 날 오후 2시경이었다. 서울시청 부근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찾아 갔었다. 팔순이 다가오는 그가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바짝 마른 몸에 볼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여기저기 저승꽃이라는 검은 점들이 보였다. 선배 변호사 한승헌이었다. 그는 ‘정치재판의 현장’, ‘분단 시대의 법정’ 등의 책을 쓰고 혹독한 댓가를 치렀다.
“법정의 현실을 글로 써서 세상에 내놓았던 이유는 뭡니까?”
“내가 어떤 말을 해도 판사들은 이미 결론을 정해놓고 귀를 막은 상태였으니까. 나는 그런 사실들을 본 기록자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기록이 없다는 건 사실이 없다는 거죠. 그러니까 누군가 꼭 써서 남겨야 합니다. 그때는 변호가 아니라 법정에 끌려온 외로운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과 동행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지.”
나는 80년대의 법정 풍경을 기억한다. 눈을 막고 귀를 막은 판사를 향해 검정 고무신이 날아갔다.
“글을 쓴 이유가 뭡니까?”
“어려운 사람을 외면했다가 나중에 양심의 가책을 받고 후회하면 힘들 거 같았죠. 위험이 다가올 때 도망치면 후회가 될까 봐 정면으로 맞아들였죠. 무서워도 물러나지 못한 거죠.”
그의 작은 눈이 반짝였다.
“감옥에 들어가던 순간 어떠셨어요?”
“변호사로 가던 감옥과는 차원이 달랐어요. 죄수복을 받아 갈아입고 플라스틱 식반과 젓가락을 가슴에 안고 교도관을 따라 사동 복도를 걸어갔죠. 구석의 한 감방 안으로 들어가니까 뒤에서 ‘철커덩’하고 문이 닫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는데 천둥치는 것 같이 크게 들렸어요.”
나는 그의 말을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수첩에 받아 적었다. 성경 속의 누가가 그랬다. 그가 데오빌로에게 쓴 보고서의 첫 문장이 이랬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세밀히 조사해 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순서대로 엮어서 당신에게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복음서가 된 누가의 글만 따로 복사해서 들고 다녔다. 이천 년이 넘는 생명력의 원천은 무엇일까.
사건마다 그들과 함께 어두운 터널을 걸었다. 그들의 애환과 절규를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모니터에 박아 넣었다. 그들의 내면 밑바닥까지 들여다 보려고 노력했다. 재판장의 표정과 무심히 지나치는 말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감옥 안에서 나에게 변호사법 1조의 사회정의가 뭐냐고 묻던 죄수가 고발한 인권유린을, 시간과 공간이 제한되는 법정에서 못 다한 말을 글로 만들었다. 변호사의 소명을 엉뚱하게도 죄수를 통해 깨달았다. 며칠 전 행안부 장관을 지낸 친구와 통화를 했다.
“바닷가에서 뭐 하고 지내니?”
“젊은 시절 체험했던 안전기획부에 대해 쓰고 있어.”
“그거 자칫하면 그쪽에서 문제 삼을 건데?”
창 밖으로 방파제 위로 솟구치는 하얀 파도가 보였다.
“괜찮아, 벌 받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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