禁書 해제에 왜 노대우 대통령 이름은 빠졌나

권위주의 시대에 월북작가의 작품 해금을 장관 혼자서 단행할 수 있었을까? 오늘 조선일보에 이런 기사 제목이 있다.《백석과 국수》

어느 이름난 시인이 쓴 칼럼이다. 신문을 펴고서 저 기사부터 읽었다. 허두가 마음에 들어선지 거침없이 읽어 내려져갔다. 거기에도 비슷한 문구가 있지만,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소설가와 시인을 덮어놓고 좋아한다. 직업인 한 명을 더 보태자면 기자다. 범인(凡人)도 이러할진대 시인에게야 오죽 시인이 존경스럽겠나. 기사 내용 중에 오류(?)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 대목이다.

“1988년 월북 작가들의 작품 출판이 공식적으로 허용된다. 여기에는 시인이자 국어학자였던 당시 정한모 문화공보부 장관의 노력이 있었다. 정 장관은 문학사의 단절을 극복하고 문학적 유산을 계승하기 위해 해금 조치를 단행한다고 밝혔다. 백석을 비롯해 정지용·임화·이태준·박태원·이용악·오장환 등이 포함됐다.”

해금 조치에 장관의 노력이 있었음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뒤에 가서 “장관이 해금 조치를 단행한다고 밝혔다.”고 썼다. 저 말을 숙독하면서 정치(精緻)하게 사색하지 않으면 장관이 해금을 단행한 것으로 읽히게 된다. 해금 조치를 밝힌 것은 장관이었을지라도, 대통령의 결심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때는 노태우 대통령 당시였다. 해금 조치도 노 대통령이 추진했던 북방정책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책적으로 그렇게 하게 돼 있었던 셈이다. 달리 말하자면 장관의 훈로라기보다 노 대통령의 결단으로 된 것이다. (훈로 勳勞; 나라나 군주를 위해 세운 공로)

저 때는 이른바 권위주의 시대였다. 다른 문제도 아닌 월북작가의 작품 해금을 장관 혼자서 단행할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있었다면 애당초 ‘금서’나 ‘판금’ 서적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1988년 7월 19일 당시 정지용, 임화 등 120여 명은 전면 해금된 반면, 북한 정권에서 부수상 등 고위직을 지낸 홍명희, 이기영, 한설야 등 5명은 일반 출판이 계속 금지되었다. 이후 홍명희 등의 작가들까지 제한 없이 대중에게 완전히 풀린 것은 1988년 10월 조치 등을 거치며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 '10월 조치'가 장관의 권한이었겠나.

중앙일보를 통해《임꺽정》도 해금되었음을 알았다. 나는 그날 동네 서점에 10권짜리 ‘소설 임꺽정’을 구해 달라 부탁했고 이튿날 내 손에 쥐었다. 해금과 구입 기념으로 중앙일보의 해금 관련 기사를 신문에서 오려내어 저 책의 면지 (Flyleaf)에 붙여 두었다. 저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것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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